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2화 (3/202)
  • 2. 요리사가 가장 잘하는 것

    “이야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네. 여권이면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일반 여권이 아니라 관용 여권 덕분에 그 까다롭다던 파나르 입국 심사도 단번에 통과했다.

    외교 업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발급되는 관용 여권.

    나라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작은 특권이었다.

    시작부터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아 마음이 들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아무리 날고 기었다 해도 해외 근무는 처음이었으니까.

    파나르 국제공항 출국장

    [장덕수 요리사]

    공항을 빠져나가자 장덕수라고 적힌 한글이 바로 눈에 띄었다. 대사관에서 직접 마중까지 나와 있을 줄이야.

    “안녕하세요. 요리사님.”

    “네 안녕하세요!”

    어눌하지만 한국어로 또박또박 인사를 건네는 현지 직원을 보자 반가운 맘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반면 현지 직원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뭐랄까? 철창에 갇혀 있는 동물들을 쳐다보는 느낌이랄까?

    나를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줄곧 쳐다보고 있었다.

    “차에 타세요. 그리고 잠자세요.”

    “아 자라고요? 네 알겠습니다.”

    조수석에 오르자, 시트는 한참 뒤로 밀려 있었다. 마치 간이침대처럼.

    장시간 비행으로 피곤했던 몸은 금세 시트에 적응되어, 눈꺼풀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도착했다. 요리사님 내려… 세요.”

    “네 감사합니다.”

    빠른 속도로 1시간쯤 달렸을까?

    능숙한 운전 실력 덕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파나르의 바깥 풍경 좀 보고 그랬어야 했는데.

    그래도 덕분에 몸이 한결 가벼워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우와 이게 집이야 궁궐이야.”

    먼저 도착한 곳은 대사관이 위치한 곳이 아니라 관저였다. 한눈에 봐도 웅장한 규모였다.

    관저는 재외 공관장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거주지였다. 동시에 귀빈들을 초대하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공적이면서 사적인 공간이었다.

    그 나라의 국격을 곧바로 보여 주는 곳이기 때문에 규모도 시설도 굉장했다.

    끼이이익-

    내 키보다 2배가 훌쩍 넘는 거대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관저를 관리하는 관리인이 반갑게 반겨 주었다.

    “킴 대사님, 킴 대사님.”

    역시 현지 직원이라 말투가 조금 어눌했지만 꽤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대사를 불렀다.

    “어서 와요. 장덕수 요리사.”

    “안녕하십니까, 김용수 대사님.”

    “벌써 내 이름을 알아요?”

    나의 임기응변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첫 만남에 외교부에서 퇴직한 지 한참 지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니 김용수 대사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런 표정은 그때뿐이었다.

    그 후로 날 바라보는 김용수 대사의 표정에선 줄곧 찬바람만 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뭐 아직 젊어서 괜찮겠지만.”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이제 짐이라도 좀 풀고 조금 쉬라는 말이 나올 차례였지만 김용수 대사의 표정이 한 번 더 굳어졌다.

    “도착한 지 5분도 안 돼서 이런 말 꺼내서 미안한데….”

    “네?”

    아직 커다란 캐리어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도 못한 상태였다.

    김용수 대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주방을 한번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다짜고짜 주방 얘기부터 꺼내는 이 사람.

    내가 일을 해야 하고 관리해야 하는 곳이긴 하지만 짐부터 풀고 보면 안 되는 건가?

    “네 일단 한번 보시죠.”

    “보고 너무 놀라지 마요.”

    김용수 대사는 놀라지 말라며 당부를 했지만, 이 주방을 보고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허억보다는 하아….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이…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인가요?”

    관저 주방의 규모는 얼핏 봐도 크고, 웅장했다. 호텔의 주방과도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

    그렇지만 그건 단지 크기에 대한 것일 뿐, 그 커다란 주방 전체에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알다시피 파나르 대사관이 한참 동안 비어져 있었잖아요.”

    “그… 그렇긴한데. 이건 좀.”

    “대사관 사무실도 정상화하는 데 한참 걸렸어요. 관저도 이제 겨우 정리가 다 돼 가는데 주방은 요리사가 오면 같이하려고 남겨 뒀어요.”

    그 말이 진짜인지 핑계인지 그런 건 알 필요가 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내가 해야 할 일인 건 확실했으니.

    “그동안 식사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냥 간단하게 라면 먹거나 김치랑 밥 정도만… 아니면 대부분 밖에서….”

    “이런 곳에서요?”

    별다른 대답 없이 김용수 대사는 손가락을 뻗었다. 그곳엔 식탁의 딱 한 자리만이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요리사가 쓸 곳이니 직접 청소하고, 기구들 자리 배치도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

    “그런 이유도 있지만 이건 엄연히 요리사가 할 일입니다.”

    핑계도 좋다.

    내가 할 일이 맞긴 하지만 뭔가 찜찜함을 숨기기 힘들었다.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건가?

    “오늘은 여기 청소에만 신경 쓰도록 해요. 사무실 직원 한 명을 보내 줄 테니 같이해 봐요. 나이도 덕수 씨와 비슷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 안으로 청소 다 끝내고, 저녁은 간단하게 나랑 같이해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의견도 좀 나누고.”

    오자마자 커다란 임무를 건네고 출근을 하는 김용수 대사의 뒷모습을 보며 애써 미소 지었다.

    “하아 첫날부터 재미나네.”

    나는 일단 주방 내부를 다시 한번 싹 둘러봤다. 김용수 대사가 현재 임의로 사용하고 있는 냉장고 하나를 제외하곤 전부 먼지투성이.

    기구며, 접시며 전부 그냥 사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청소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사람들에게 요리사들이 제일 잘하는 것이 뭐겠냐고 묻는다면, 칼질이나 음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요리사들이 그것보다 잘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설거지와 주방 청소.

    설거지와 청소는 세계 어떤 형태의 주방을 가더라도 요리사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단, 나처럼 주방장쯤 돼야 그나마 손을 뗄 수 있었다.

    “흐익! 오늘 안에 여기를 다 청소하는 게 가능해요?”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요리사님.”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주방에 누가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얼핏 봐도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대사님이 주방 청소를 도우라고 보낸 대사관 직원이었다.

    “파나르 대사관 행정원 임윤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요리사 장덕수라고 합니다. 오늘 안으로 청소 끝내야 하니깐 일단 바로 들어오시죠!”

    깊은 한숨을 푹 내쉰 윤아는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통성명 말곤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청소할 게 태산이었으니까.

    “일단 기물들부터 삶죠.”

    “기물들을 익혀야 하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먼저 제일 큰 냄비에 한가득 물을 담고, 식초와 베이킹 소다를 살짝 섞어 줬다. 묵은 때를 벗기는 데 식초와 베이킹 소다만 한 조합이 없었다.

    “콜록콜록, 근데 여기다가 식초는 왜 넣는 거예요?”

    “좀만 있어 보세요. 말보다 직접 보는 게 빠를 테니.”

    주방에 있는 모든 기물을 차례대로 식초물에 넣어 삶아 냈다. 먼지가 눌어붙어 거뭇해진 기물들은 본래의 색을 찾아 은빛을 내기 시작했다.

    “와아. 이게 무슨 연금술인가요? 금방 번쩍번쩍해지네요.”

    “푸웁. 연금술은 무슨 연금술이에요. 오래 묵은 때를 벗겨 낼 땐 식초랑 이 베이킹 소다 약간 섞어서 씻으면 직빵이에요.”

    “아하 그래서 기물들을 삶는다고 했구나.”

    새로운 행성이라도 발견한 듯 윤아는 신기해했다. 청소는 빡빡 문지르는 것만 정답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분무기에 담아서 벽이나 테이블 닦아 줄 때 써도 좋아요.”

    “요리사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아세요?”

    “주방에서 한 30년 구르다 보면 다 알아요.”

    “30년이요?”

    “아… 30년 요리하신 저희 주방장님한테 배웠죠.”

    아직까지 머리는 회귀했다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좋은 걸 왜 빨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냐.

    “자 이제 주방 전체를 닦아 줄게요.”

    희석시킨 식초물을 분무기에 담아 뿌려 주자,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때를 벗겨 낼 수 있었다.

    “와아 이거 볼수록 진짜 신기하네요. 이러니깐 청소가 재밌기까지 해요.”

    “그래요? 그럼 여기서 저~ 어기까지 부탁할게요. 기왕이면 냉장고 안까지.”

    내 검은 속셈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양손에 행주와 분무기를 든 윤아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윤아에겐 주방 청소를 시키고 나는 식재료 정리를 시작했다.

    “다른 재료는 별거 없으면서 양파는 왜 이렇게 많은 걸까요?”

    “양파요? 아 그거!”

    대부분 냉장고는 거의 텅텅 비어 있었고, 채소들은 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

    김용수 대사가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 조금과 밑반찬 몇 가지가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양파만 한가득 남아 있었다.

    상태로 봐서 이건 그나마 최근에 구매한 게 확실해 보였다.

    “근데 이거 양이 너무 많아서 이대로 놔두면 절반 정도는 오늘 넘기기가 힘들겠네.”

    “그… 대사님이 당뇨가 좀 있으셔서, 식사하실 때 생양파를 반찬처럼 드시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시장 가서 사 왔어요.”

    “아… 이렇게 많이요? 밑에는 이미 다 상해서 생양파로 먹기 힘들 텐데.”

    “많이 사야 싸다길래….”

    도매 시장에서 공동 구매라도 한 듯 양파가 망째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미 제일 아래에 깔려 있는 양파들은 무게를 이기지 못해 썩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버리는 것보다 낫겠죠?”

    “이걸로 뭐 하시려구요?”

    살릴 수 있는 양파들을 살려 봤지만, 생으로는 먹지 못할 것들이 반이 훌쩍 넘었다.

    “아까우니깐 푹 삶아서 양파주스로 만들려구요. 생양파보단 효능이 떨어지겠지만 보관 기간도 훨씬 길어져요. 생각보다 맛도 좋고.”

    “양파주스요? 윽 그게 뭐예요.”

    “말 그대로 양파로 만드는 주스예요.”

    윤아의 표정엔 의심이 가득했다.

    양파 따위로 달콤한 주스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주스란 건 달콤한 건데, 양파로도 그런 게 가능해요?”

    “당연히 가능하죠. 왜 양파즙이 아니라 양파주스라고 부르는지 보여 드릴게요. 기대하세요.”

    “썩 내키진 않지만 일단 알겠어요.”

    “진짜 맛있는데….”

    환갑을 넘기면 건강했던 사람에게도 없던 병이 생기곤 한다. 당뇨는 물론이고, 고지혈증 등 각종 성인병 등.

    나 역시 성인병을 예방할 겸 생양파를 챙겨 먹다가 최근엔 양파주스 맛에 빠져 꾸준히 먹고 있었다.

    이제 회귀, 아니 회춘했으니 그럴 필요 없겠지만.

    “그나저나 윤아 씨는 할 줄 아는 요리 있어요?”

    “저요? 저는 요리보다 맛보는 걸 잘합니다.”

    “그건 누구나 잘하는 거 아닐까요?”

    뭐라도 시킬까 봐 격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윤아.

    이렇게 당당하게 맛보는 걸 잘한다고 말하다니….

    미안하지만 맛보는 일만 맡길 생각은 아직 없었다. 아무리 요리를 할 줄 몰라도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이 양파 좀 깨끗하게 씻어서 반만 껍질을 벗겨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윤아가 깨끗하게 씻어 준 양파의 반을 도마 위에 올렸다.

    “그럼 오랜만에 실력 발휘 한번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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