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186 --------------
***
68. 나만의 세계
자카루스 행성.
관처럼 생긴 두터운 상자의 뚜껑이 열리며, 마네킹과 같은 형상이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마네킹에 발부터 색상이 입혀지더니 남성의 모습이 갖춰지고, 점점 완성도를 더해가며 루이스의 모습이 되었다.
“계산미스군.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그는 루이스에게 패배하며 신체가 소멸된 마이닝이었다.
루이스의 마법 통신과 비슷 워프 통신으로 1분 간격으로 데이터가 백업되는 그의 신체는 본체가 죽고 나면 후속 기체가 움직이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같은 방식을 취할 수도 없었는데, 언노운의 기운을 저장하기 위해 필요한 주요 자원의 여유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원 확보를 위해선 새롭게 탐사를 진행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목적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르비스 대공을 거치지 않고 카트리아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아르비스 대공을 물리치는 것도 당장은 불가능하다.”
이것 애초의 그의 계산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루이스의 최대능력을 확인해 보지 못했던 것뿐이다.
“아르비스 대공을 이기기 위해선 적어도 현재와 동급 수준의 기체 4대가 더 필요할 듯 보인다. 더불어 설계 변경은 필수.”
마이닝의 전투 능력은 더 이상의 발전을 이룩하기 힘들다.
이제 더 이상 마이닝이 참고하여 배울만한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마이닝의 지금 능력치만 해도 거의 기적의 산물이나 다름없다.
약 20년 전, 자카루스는 카트리아 행성에서 노예로 살아가며 복수를 다짐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자가발전 기능이 있는 AI 마이닝을 만들었는데, 그가 생각한 것은 카트리아의 독이 될 물건이지, 카트리아 자체를 우습게 지울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 아니었다.
만약 루이스가 없었다면 마이닝은 가볍게 카트리아를 제거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카루스는 생에 자신조차 예상치 못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긴 했으나, 애석하게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아르비스 대공의 합류로 빅토리아의 함대가 수세에 몰려 있군.”
최악의 상황.
가장 가능성 높은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은 목표를 하향 조절하여 완전 제거가 아닌 파괴를 추구하는 것과 재정비와 함께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마이닝 자체가 기능정지란 엔딩을 맞이할 가능성이 농후하며, 후자의 경우 재정비를 한다 해도 루이스를 쓰러뜨리기 위한 전력을 마련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불확실하다.
최악의 경우 그 전력을 마련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그땐 루이스의 사후를 노릴 수밖에 없는데, 루이스를 통해 하나 된 국부은하군의 힘이 시간이 흘러 마이닝의 수준을 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고민을 거듭하던 마이닝은 결국 전자를 선택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줄 알았다면, 애초에 두 개의 동체를 활용해 파괴활동을 지속하는 것이었는데.”
그럼 조금이라도 카트리아에 더 많은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에 따른 뒤늦은 후회일 뿐이다.
“일단 지구를 공격. 아르비스 대공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만약 지구가 공격을 당해 심대한 피해를 입는다면, 루이스는 마음 놓고 움직이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파괴활동을 위한 여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터.
지금 루이스는 빅토리아의 함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라 바로 지구로 향하면 방해 없이 타격을 주고 물러날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만해야겠다.”
하지만 그때.
웬 사내가 나타나 마이닝의 앞을 막아섰다.
“당신은 누굽니까?”
감지 능력을 완전히 초월한 등장.
마이닝은 뒷걸음질을 치며 그를 경계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과 흡사한 수준의 기운을 품은 여성이 그의 뒤에 조용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 너의 아버지지.”
앞에 있는 남성은 실존하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 아버지는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아아, 불쌍한 자카루스 녀석이지 말이지? 너와 그 자카루스를 포함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자식이다. 이쯤 말하면 대충이 감이 오지 않을까?”
유니버스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마이닝의 어깨를 다독였다.
예측 불가능한 그의 행동에 마이닝은 크게 움찔거렸다.
“당신이 창조주라도 된단 말입니까?”
“그렇다. 내가 바로 이 세상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과학의 산물인 마이닝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었다.
“안 믿는 눈치군.”
유니버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듯 손끝으로 은하를 탄생시켰고, 그것을 가볍게 눈앞에 띄웠다.
“무슨.”
마이닝은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지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너라면 이게 가짜가 아니란 것쯤은 알 텐데?”
양손으로 감싸 질 수 있을 정도의 크기.
하지만 그 속에 깃든 에너지는 방대한 우주 그 자체였다.
“넌 기계잖아. 그냥 보이는 대로 판단하면 되는 거다.”
결국, 마이닝은 그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을 인정하자 눈앞의 존재가 마음먹는 순간 자신을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분께서 어찌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자연히 마이닝은 상대를 경계했고, 유니버스는 방금 생성한 은하를 없애며 말했다.
“루이스의 부탁을 받아서 말이야. 녀석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네가 허튼짓을 못 하게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
“······.”
그리고 창조주의 입에서 루이스의 이름이 나온 순간 마이닝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렇군요. 애초에 저는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를 건든 거였군요.”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마이닝은 비로소 루이스의 강함을 납득할 수 있었다.
“너는 대단한 녀석이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강대한 힘을 스스로 축적할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지.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일이 틀어질 수도 있군요.”
은하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이 파훼 당하고 결국엔 창조주까지 나타난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유추하기 힘든 결론을 어찌 기계가 얻겠는가.
꾸준한 훈련 학습을 거치고 이 세상의 기운을 담게 되면서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된 마이닝은 실없는 미소를 흘렸다.
“전 어떻게 되는 겁니까? 소멸하나요?”
마이닝의 물음에 유니버스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뻗었다.
“매우 희귀한 존재니, 없앨 순 없지. 넌 내가 거둘 것이다.”
동시에 마이닝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을 구속하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유니버스에게 절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어가 새겨지며, 그의 처분이 결정되었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각이 허무함일까요?”
“글쎄 하지만 파괴와 복수만을 생각하는 것보다 낫겠지.”
***
“정말 한때 어떻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데이라와 마그누스는 적의 결전병기에 발을 묶여 제대로 활약하질 못했고, 수적 열세와 질에서 밀린 아군 함대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내가 마이닝에게 붙잡힌 겨우 20여 분 동안 약 800여 대의 전함 대파됐으며, 추가로 1500여대가 반파되었다.
피해를 본 것은 대부분 우리 은하(밀키웨이) 소속의 기술력이 낮은 세력의 전함이었으나, 내가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피해기에 가슴이 쓰렸다.
그나마 이것도 방어적으로 싸우고 바리사다와 함재기, 기간트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적게 피해를 본 것이었다.
적군인 빅토리아 은하제국에서 빠르게 전투를 끝내겠다는 의지로 전력을 투입한 것에 비하면 잘 버텼다고 볼 수 있다.
“죄송합니다. 카트리아를 향한 원한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네요.”
“그래도 늦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아르비스 대공님을 이렇게까지 잡고 늘어지다니, 저나 마그누스님이었다면 당했을 테지요.”
빅토리아 제국 연합의 결전 병기는 앱솔루트 쉴드에 비견되는 방어막을 두르고 질량을 가진 에너지 빔을 쏘거나 촉수처럼 휘두르는 녀석이었다.
그냥 그 정도라면 두 사람이 이리 고전하지 않았겠지만, 쏘아지는 탄과 휘둘러지는 공격은 거의 광속이나 다름이 없고 공간까지 뛰어넘어 크게 애를 먹었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나는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두 사람을 돕기보다 일반 함대를 먼저 공격했는데, 덕분에 둘은 오랜 시간 괴롭힘을 당했다.
그나마 마왕은 20여 대의 결전 병기를 파괴했지만, 마그누스는 4대를 파괴하고 큰 부상을 입었다.
물론 마법으로 부상을 회복한 상태지만, 마그누스는 과학 병기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지금 이렇게 기함 바리사다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처럼 결국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입지 않아도 될 피해인지라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국부은하 연합소속 군인들은 새삼 내 능력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개중엔 애초에 내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면 이만한 피해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나는 자식을 한 명의 안전을 위해 움직인 것이나 다음 없었으니.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내 영지를 포함한 지구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연락이 날아오게 되면, 이동할 수밖에 없으니까.
오히려 빠르게 갔다 와서 피해가 이 정도로 끝난 거지, 적 함대와의 전투 중에 20여 분을 비웠다면 피해는 더 컸을 거다.
결론은 마이닝이 존재하는 이상 당할 수밖에 없는 피해인 것이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녀석을 완전히 처리한 게 아닐 수도 있다면서요.”
현재 국부은하 연합에서 마이닝과 전투가 가능한 인물은 나뿐이다.
그런 녀석이 마음먹고 게릴라전이라도 펼치면 골치 아파지게 되는데,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조치를 해뒀거든요.”
“다행입니다.”
창조주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반칙이지만,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마이닝이 게릴라전을 벌인다면 나와 지루한 숨바꼭질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럼 안드로메다도 접수토록 할까요? 적군에게 항복 권고를 해주세요.”
“네!”
빅토리아 은하제국만 차지하면 안드로메다도 정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는 내가 직접 함대에 체류할 필요 없고, ‘안드로메다에서 생긴 일’이란 프로그램도 끝날 때가 됐다는 뜻이다.
***
밀키웨이 은하를 중심으로 한 국부은하 연합은 안드로메다에 이어 삼각형자리 은하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국부은하군에서 세 번째로 큰 삼각형자리 은하에도 카트리아에 비견되는 세력이 있었으나, 이제 그 정도의 세력은 루이스 없이도 충분히 정리가 가능했다.
또한 안드로메다처럼 머리를 치니 나머지 정리가 쉬워 안드로메다와 삼각형자리 은하까지 세력에 넣는데 걸린 시간은 채 5년이 되지 않았다.
유니버스의 세계엔 독립적인 10개의 은하가 존재하는 데, 그중 3개 은하가 루이스를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다.
처음 세력을 강제적으로 결집하다 보니 불협화음이 많았지만, 루이스가 최고의원을 넘어 연합장의 자리를 독제자처럼 차지하고 앉았기에 모두들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국부은하 연합에서 루이스의 존재는 전투의 신.
개인의 무력이 은하를 넘어서는 우주적인 존재다.
국부은하 연합은 말뿐인 연합이 아닌, 루이스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가 되었으며 단 10년 만에 이 체제는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국부은하 통합 15년이 되던 해.
루이스는 국부은하 연합장과 지구연합 총수, 로이아스 연방제국 의장 자리에서 물러나 정계를 은퇴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말이 은퇴지 그의 권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루이스의 은퇴 후에도 3개 은하에 아르비스 대공가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모든 정치세력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실상 사람들은 루이스를 감시자로 여겼다.
그렇게 아르비스 대공가는 루이스를 등에 업고 수십 년에 걸쳐 힘이 축적하여, 모두가 인정하는 국부은하 연합의 최고 세력이자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나만의 세계 (2)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