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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과거형인 거 보니, 못 잡은 모양이군요?”
“네, 각 행성에 대대적인 조사를 벌인 결과 카트리아9의 비밀을 발견했지만, 이미 수년 전에 거처를 옮긴 후였습니다. 이후의 흔적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군요.”
카트리아의 내무총괄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약한 소리를 하자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곧 안드로메다 탐색이 시작될 텐데, 꺼림칙해서 외은하로 나가겠습니까?”
“아이기스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요?”
“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날아올 수도 있지만.”
이번 안드로메다 탐색을 방송으로 공개할 생각을 하던 나로선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외 정보는요?”
“일단 해당 인물이 누군지는 알아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공중에 화려한 카트리아 양식의 복장이 아닌, 단조로운 죄수복 같은 옷을 입은 사내의 프로필을 띄웠다.
[종족: 베넌인 / 이름: 자카루스 / 나이: 50]
피처럼 붉은 머리에 눈동자가 흰자 없이 새카만 종족.
더구나 이마에 있는 제3의 눈이 기괴한 도깨비를 연상시켰다.
“분명 8년 전에 주노님께서 양자화 기술을 습득하는데 일조한 종족이 베넌인이라 했던 것 같은데요?”
과거 베넌인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 나는 그렇게 물었고, 그는 그랬냐며 의문을 표했다.
“저도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인데,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요?”
기억력은 이제 드래곤 수준을 자랑하는 나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능이 카트리아인보다 높지만 종교적 이유로 물리학만이 발전한 별이라고요.”
“맞습니다. 그 종족이죠.”
“해방하지 않았던가요?”
분명 카트리아는 모든 노예들을 해방하고 고향을 돌려주었다.
“네, 대부분 카트리아20으로 명명되었던, 베넌 행성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더군요. 그래서 보상금과 봉급을 받으며 생활하다가 4년 전에 일을 관두었습니다.”
해방을 시켜주고 고향을 돌려준다고 해서 그들이 벌인 일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그간의 고생을 잊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도 될 텐데, 굳이 남아서 비밀 연구를 거듭했다는 점에서 악의적인 복수심이 느껴진다.
“아마도 그의 목적은.”
“저희를 향한 복수겠죠.”
개인의 복수로 베넌인이 또다시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하는 걸까?
물론 그 한 명 때문에 다른 동족에게 죄를 묻진 않겠지만, 카트리아인도 감정을 가진 종족인지라, 큰 피해를 입으면 비상식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보면 카트리아의 자업자득이라 볼 수 있지만, 자카루스라는 베넌인도 경솔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만큼이나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다는 뜻이니, 꽤나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단순한 노예 출신이 그만한 무기를 홀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긴 힘들지만, 정황들이 그에게 향해 있네요.”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힘을 갖고 있을 수도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힘이 지구의 초능력 같은 이능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시스템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그는 카트리아를 매우 잘 안다는 점이다.
“하울의 소형버전이라 할 수 있는 무기 두 기를 과감히 포기하는 부분에서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방심은 안 할 겁니다. 싸움을 걸어온다면 더 큰 힘으로 물리칠 뿐이죠.”
은하 연합이 결성되고 몇 년 동안은 카트리아의 군사력을 기존 수준으로 제한했지만, 지금에 와선 그 제한을 모두 풀어 주었다.
덕분에 카트리아의 함대는 8년 전과 비교해 1.5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군사력은 모선과 하울의 증가로 2배 이상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카트리아를 쓰러뜨리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 정도 되는 힘이 끼어들지 않는 이상 말이다.
“세피아 은하의 두 종족을 공격한 건 힘을 시험하기 위함이라 볼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녀석들의 탐사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 됩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죠.”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라도 위험이 닥치면 도와주시겠죠?”
“당연하죠. 카트리아의 위협은 우리 은하의 위협인데요.”
“다행이군요.”
내 즉답에 그는 한결 편해진 모습을 보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예측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한 것은 아니니, 경계는 하되 괜히 벌써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
65. 안드로메다에서 생긴 일
로이아스 연방 제국의 수도 세이로의 의장 청사 앞.
“네, 안녕하세요! 신 예능프로그램 ‘안드로메다에서 생긴 일’의 멤버, 132세 드워프 소녀 김불녀 입니다! 제 예명이 왜 ‘김불녀’냐고요? 원래 드워프가 불이란 단어를 참 좋아하거든요. 하이랜드어로 제 본명이 불과 여자를 더한 합성어라서 불녀란 예명을 지었습니다. 김씨는 한국에서 활동해서 김씨인 거고요! 한 천 번은 내뱉은 자기소개 같은데, 이제 다들 아시죠?”
귀여운 드워프 소녀가 활발히 오른손을 위로 들며 숨 한 번 쉬지 않고 속사포 랩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로이아스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으로 방송 경력 5년 차의 프로였다.
예능프로그램의 블루칩으로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연예인으로 이번 프로그램의 메인 멤버였다.
“안녕하세요! 레드잼의 멤버 레드아이 티아입니다! 케일론인은 체구가 작아도 힘이 무척 세거든요. 무슨 일이든지 시켜만 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어서 케일론 민족의 특성인 동양인 외모에 붉은 눈을 가진 여성이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녀의 인사에 김불녀가 끼어들었다.
“키가 작아도 힘이 센 건 드워프가 제일이지! 어딜 인간이!”
“아, 그, 그렇네요.”
갑작스런 김불녀의 불꽃 애드리브에 아이돌인 ‘티아’는 잠시 주춤거렸다.
“안녕하세요. 아이돌 그룹 ‘서울 남자’의 강원도가 고향인 청담입니다.”
이어서 남자아이돌까지 자기소개를 하자 모든 멤버의 인사가 끝이 났다.
“이번 우주여행은 저희 셋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인원이 너무 적다고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 프로그램 ‘안생일(안드로메다에서 생긴 일)’의 멤버는 지금부터 탑승하게 될 기함 바리사다의 모든 승무원이거든요.”
역시 방송 5년 차의 인기 연예인답게 진행을 해나가는 모습이 매우 안정적인 김불녀였다.
“그 말씀은 설마 아르비스 총수님도 출연하시는 겁니까?”
김불녀의 멘트에 뜨악하는 청담의 모습은 미리 짜여져 있는 각본.
그에 티아가 예정대로 바톤을 이어받았다.
“네, 맞습니다. 누구 한 명 예외 없이 모든 승무원이 참여할 수 있죠.”
“그동안 뉴스를 통해서나 접했던 아르비스 총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 잘생겼다고 반하지 마세요. 아시겠지만 그 잘난 큐티의 캐럿 선배가 항상 이상형으로 꼽아도 반응이 없으신 분이 아르비스 총수님이니까요.”
“하긴 아리따우신 부인이 세 분이나 계시니까요.”
“그, 그래도 말은 가려가면서.”
애드립인지, 아니면 대본인지 티아가 리얼하게 당황하며 청담을 말렸다.
“자, 그럼 바로 아르비스 총수님과 대화를 나눠 볼까요?”
“정말 나오시는 겁니까?”
“그럼요. ‘총수님!’하고 부르면!”
그때, 세 사람 사이로 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루이스와 1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엄청난 미모의 엘프 소녀가 나타났다.
“짠, 하고 나타나십니다.”
루이스는 카메라를 향해 느끼하게 눈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루이스입니다.”
“루이스 님이요?”
“다들 저를 아르비스라고만 하지. 의외로 이름을 잘 모르더라고요? 아르비스는 성입니다. 이름은 루이스고요. 저도 아르비스고 이 아이도 아르비스니, 방송에는 이름을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루이스는 은근슬쩍 옆에 있는 엘프 소녀로 포커스를 돌렸다.
“그런데, 총수님. 옆에 계신 천사분은···.”
청담이 진심으로 넋 나간 표정을 짓자, 루이스의 눈꼬리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제 첫째 딸 루나입니다. 엄마보다 예쁜 절세 미녀죠. 하핫!”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에서 딸바보의 기운이 느껴졌다.
“루나임돠.”
독특한 억양으로 내뱉은 짧은 인사.
표정은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데 변화가 없고, 한 번 닫은 입은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식은땀을 삐질 흘린 루이스가 얼른 말했다.
“워낙 과묵한 아이인지라, 이해해 주시길···. 솔직히 저도 이틀에 한 번 목소리를 들을까 말까예요.”
“그, 그렇군요.”
과묵한 건 좋은데, 말투는 왜 저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겉으론 태연한 척해도 다들 속으론 긴장하고 있는지라, 대본 외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묵한 것과 이상한 말투에도 미모가 모든 것을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여서 얼마 가지 않아 모두의 입꼬리가 헤벌쭉 벌어졌다.
“그런데 따님은 어떻게 방문한 거예요? 아버지 배웅하러 왔어요?”
외모와 이제 막 여물기 시작한 슬림한 몸매가 10대 중반으로 보이는지라 김불녀는 루나를 아이 인터뷰하듯 대했다.
그에 대한 루나의 답변은.
“루나임다.”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루이스가 재빠르게 끼어들어서 루나의 말을 번역해 주었다.
“따님이란 호칭보단 이름으로 불러달라는군요. 본인이 정식 마법사로 활동하는지라 누구누구의 자식이란 표현을 별로 안 좋아한답니다.”
루이스의 보충 설명에 루나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네 글자에 그렇게 많은 듯이 담겨 있었군요?”
“아빠 된 자로서 이 정돈 당연하죠.”
그러면서 다시 호탕한 웃음을 흘리는 루이스였다.
“루나님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루나는 이젠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13살입니다. 한국 나이로는 15살이죠.”
은하 연합의 최고 의원이나 신 지구 연합의 총수가 딸아이에게 부려지는 모습이 굉장히 독특하게 보였다.
시작부터 접하기 힘든 루이스의 모습에 담당 PD는 더없이 만족스럽단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정식 마법사로 활동하고 계시다고요?”
“네, 현재 루나는 5클래스의 고위 마법사로 아르비스 마탑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13살에 5클래스요? 어우, 대단하네요.”
청담이란 이름의 한국인은 대단한 거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케일론인인 티아와 드워프 김불녀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냥 그런가보다라 생각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란 건가요? 세계 최고 마법사의 자식은 역시 천재일 수밖에 없나 봐요.”
루이스는 웃으며 대답 대신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왠지 앞으로 좋은 모습을 많이 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불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혹시 탐사 시작 전에 해주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저는 제 가족과 동료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을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이번 안드로메다 탐사는 그 목표에 크게 다가가는 발자취가 될 것이며, 여러분은 새로운 역사의 산증인이 되겠죠. 모두 이 시간을 뜻깊게 새기며 즐기도록 하죠.”
“크!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니, 멋지네요.”
작고 귀엽게 생긴 퓨어 드워프가 술 취한 사람 같은 감탄사를 토했다.
“그럼 지금 바로 달기지로 이동하도록 할까요?”
루이스의 물음에 모두가 기분 좋게 답했다.
“네!”
안드로메다에서 생긴 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