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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마법사-127화 (12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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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2시간에 걸친 회의 및 친목 다지기가 끝이 나고 일행들이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갈 때.

    성녀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무실엔 나와 성녀 외에 아직 실비아와 테라시아, 마그누스가 남아있었다.

    테라시아는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물러가고 마그누스는 얌전히 벽을 보고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성왕께선 안 돌아가십니까?”

    나를 대신해 성녀에게 용무를 물은 것은 다름 아닌 실비아였다.

    성녀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 실은 아르비스 공작님께 청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남았습니다.”

    그에 실비아의 고운 미간이 좁혀지고 나는 뒷목을 긁적였다.

    성녀는 실비아의 태도에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을 내밀며 당당하게 말했다.

    “아르비스 공작님이 좋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혼인을 청하려 합니다.”

    실비아는 이미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 있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연히 그런 실비아의 눈치를 살펴야 했는데, 그녀는 토라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거 곤란한데, 솔직히 하렘은 바라지도 않고 여자에게 휘둘리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발생하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미 혼약을 하기로 한 여인이 둘이나 있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성녀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올곧았다.

    이미 그녀가 몇 번이고 낌새를 보였기에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언제고 둘이서 대화를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런 식으로 실비아 앞에서 공개 구혼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여자의 입장에서, 남자에게 세 번째 부인으로 받아달라고 프로포즈를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일 것이다.

    “제가 성황 폐하의 구혼을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셋째 부인이 되는 셈인데요.”

    “누가 성녀이자 성왕인 저를 셋째 부인이란 이유로 무시하겠습니까? 오히려 성왕국의 귀족과 국민들은 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만큼 내 존재감이 국가의 규모를 넘어섰다는 뜻이 된다.

    내가 난감해하자, 성녀는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르비스 공작께서도 저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거 압니다. 굳이 복잡하게 생각 안 하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결혼은 다른 이야기죠.”

    내 대답에 성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아르비스 공작님께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분이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이고 들이면 됩니다. 아무도 불평하지 못할 거예요. 당장 마그누스님을 첩으로 맞이한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할 겁니다.”

    성녀의 비유에 알아서 벌을 서고 있던 마그누스가 기겁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에엑?”

    “나도 싫어 이 자식아.”

    마그누스에게 신발을 집어 던지고는 성녀에게 말했다.

    “저는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마구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결혼한 이상 반드시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겠단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겁니다.”

    “과연 멋지십니다.”

    성녀가 물러나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실비아는 포기했는지 알아서 하란 제스쳐를 보내왔다.

    “아르비스 공작님께서 허락하실 거라 믿습니다.”

    어디서 나오는 믿음인지 모르겠다.

    내 의문에 그녀는 상쾌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르비스 공작님께서 허락해 주실 때까지 계속 푸시할 생각이거든요.”

    그러면서 성녀는 나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켰다.

    당황한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실비아는 뜨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을 무릅쓸 만큼 공작님을 원한다고 생각해 주세요.”

    이어서 성녀는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떨어지며 집무실을 나섰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실비아를 바라보는데, 그녀 또한 상황이 간단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셋째 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물음에 그녀는 의심하듯 반문했다.

    “넷째 부인은 없겠죠?”

    있을 리가 있나.

    *

    47. 결혼

    [마드세인 왕국 아르비스 공작이 하이랜드 엘븐킹덤 왕위 계승 서열 9위의 엘프와 결혼을 한다.]

    해당 사실은 대륙 전체에 퍼졌다.

    당연히 내 근간이 되는 아르비스 공작령은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가뜩이나 신처럼 떠받드는 자신들의 영주가 하이랜드의 왕족과 결혼을 한다는 사실에 신비로움 가득한 소문이 퍼졌다.

    ‘아르비스 공작은 가이아의 선택을 받은 존재다! 엘프들이 아르비스 공작님을 떠받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인지는 조사를 하지 않아 모른다.

    하지만 일부 사실이 포함되어 있어 괜히 소름이 돋았다.

    엘프들이 나를 떠받드는 것은 아니어도 여신의 선택을 받은 것은 맞지 않은가.

    로엘 제국에서 마족에 관한 소문을 퍼트렸음에도, 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대륙의 제1 종교는 가이아 교단이지만, 제2 종교는 아르비스 교단이라는 것을 농담으로 여기기 힘들 만큼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다만 내 영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선 여왕이 아니라 엘프와 먼저 결혼한다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루시엘라가 오랜 세월 내 옆자리를 지킨 반쪽이란 것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 결혼식은 황제의 임관식 못지않게 화려하게 진행될 것을 예고했다.

    겉모습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이종족을 포함한 로이아스 대륙 모든 국가의 지도자가 참석하고, 드래곤이 마나의 축복을, 성녀가 여신의 축복을 내릴 예정이다.

    과연 세기의 결혼식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엘븐 실크에 테라시아가 건네준 황금색의 드래곤 가죽을 덧대고, 드워프 킹이 직접 세공한 귀금속으로 치장한 나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화려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내 물음에 화장과 화려한 복장이 더해져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루시엘라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 여러모로 이상하게 만나긴 했지.”

    생명의 은인에서 적대 세력으로.

    오랜 시간 내게 구속을 당한 데다가 일방적인 구혼에 사이가 소원해질 대로 소원해지기도 했었다.

    우리의 사이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 그녀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고 난 다음이었는데, 결국 내게 지독하게 엮이는 바람에 하이랜드에서 추방까지 당했다.

    “생각해보면 일방적으로 당한 느낌이지만···.”

    루시엘라의 말에 괜히 찔려서 헛기침을 했다.

    “이런 인연도 있는 거겠지. 솔직히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계속 신경 쓰였었어.”

    “그쪽 취향이었어?”

    “아니라니까?”

    내 농담에 그녀는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냥, 대체 어린 녀석이 무엇 때문에 이리도 위태롭게 구는 걸까 싶어서 신경 쓰였지. 욕망 가득한 눈빛도 그렇고.”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이 뒤에서 나 모르게 부채질을 한 가이아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최고로 아름다운 신부를 얻게 되었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그때의 꼬마와 반려의 약속을 나누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지.”

    맑은 창공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하늘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때까지만 해도 루시엘라와 결혼하게 되리라곤 상상치도 못했다.

    평범한 취준생에게 엘프 마누라라니, 인생역전의 끝을 보는 듯하다.

    “더구나 그 아이가 세계의 종말을 뒤집을 메시아란 것도 말이야.”

    “무슨 메시아씩이나.”

    루시엘라는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을 잡았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결혼식이라 그런가, 나답지 않게 말이 많았네.”

    나는 루시엘라에게 환생과 회귀를 거친 사실을 밝혔다.

    루시엘라는 처음엔 황당해했으나, 비로소 이해가 되지 않던 상황의 퍼즐이 맞춰졌다며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내가 환생을 했건 회귀를 했건 그녀의 연인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행복하게 해줄게.”

    “당연하지.”

    서로 맞잡은 손을 잡아당겨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대기실로 쓰이던 천막의 입구를 들추니,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짐과 동시에 방금까지의 고요가 거짓말처럼 시끌벅적한 소음이 귓속에 스며들었다.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장소는 아르비스 영주성 정문 광장.

    나는 반짝이는 갑옷 차림의 기사들이 줄 지어선 길을 천천히 걸으며 식장을 향해 나아갔다.

    나와 루시엘라가 걷고 있는 양옆, 바리케이트 뒤로 영지민들이 열심히 손을 흔들며 내 이름을 연호했다.

    다들 내 결혼식이라고 복장을 신경 쓴 모습이다.

    나를 믿는 것도 좋지만, 일부 사람은 광적으로 보여서 살짝 무서웠다.

    그러나 우리는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긴 거리를 직접 걸으며 나아간 우리 앞에 거대한 식장이 나타났다.

    미스릴 타일과 크리스탈, 백금 등이 더해져 전체적으로 실버톤을 띈 화려한 무대.

    식장 정면엔 각국 지도자를 비롯한 귀빈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의 축하를 받으며 한명 한명 인사를 나눴다.

    귀빈석보다 앞에는 가족석이 위치했다.

    신랑 측엔 아버지와 어머니, 에리스, 이브릴이 있었으며, 신부 측엔 엘프퀸과 루시엘라의 아버지인 오스카 장로가 자리해 있었다.

    어쩐지 의기양양한 엘프퀸의 표정이 살짝 꼴 보기 싫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모습을 보이자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기 바쁘셨고, 그간 딸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오스카 장로도 찔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정작 나와 루시엘라는 부모님을 따라 우는 일 없이 덤덤하게 식장 중심에 섰다.

    우리 앞엔 주례를 담당할 테라시아가 서 있었다.

    [이렇게 축복이 가득한 자리에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혼인의 증명인으로 참석한 드래곤 테라시아라 합니다.]

    테라시아의 자기소개와 함께, 드래곤으로 돌아간 마그누스가 유유히 상공을 노닐다가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여 귀빈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건 드래곤이란 소개가 말뿐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그에 소란이 일었던 광장은 금세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아르비스! 아르비스! 아르비스!

    누가 주도하는 건진 몰라도 자꾸 내 이름을 연호하는데, 솔직히 그만해 줬으면 좋겠다.

    [정숙해 주십시오.]

    테라시아의 요청에 광장은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금세 침묵으로 물들었다.

    이어서 결혼식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는데, 지구의 결혼식과 비슷했다.

    주례의 덕담과 함께 결혼반지를 나눈다.

    테라시아와 성녀의 축복이 더해지는 것이 다른 점이었지만, 결혼식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구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데 축복을 내려야 한다니, 기분이 이상합니다.”

    여신의 축복을 내리며 우리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하는 성녀.

    나는 어색하게 웃었고, 루시엘라는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인간들이 아무리 침을 발라봤자, 그는 결국 나의 것이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성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축복을 내린 후 물러났다.

    그리고 우린 결혼식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키스를 나눴다.

    동시에 영지의 종들이 일제히 울리고 영주성 위로 화려한 폭죽이 터지며 꽃가루가 날렸다.

    그렇게 나와 루시엘라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

    결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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