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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꿔진 아르비스 공작령의 풍경에도 지지 않을 깔끔함.
하지만 어딘가 눈에 익은 풍경에 내 눈동자는 크게 흔들렸다.
“야, 저기 봐봐. 저 외국인.”
“응? 헐, 대박 존잘.”
“그런데 옷이 왜 저래?”
“새로운 패션인가? 원단이 비싸 보이긴 하는데?”
“무슨 촬영 중인 거 아냐?”
극도로 발달한 청각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전생 21년, 현생 11년.
약 32년 동안 잊고 살았던 언어임에도 너무도 또렷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하지만 한참을 가만히 광장에 서 있어도 바뀌는 것은 없고, 퀴퀴한 바람에 트레이드 마크인 백색의 로브 자락을 펄럭였다.
마치 나와 주변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쳐져 있는 것 같다.
“무슨 곤란한 일 있으세요? 도와드릴까요?”
“아, 한국말 못 알아들으시나?”
그런 내게 친절한 미소를 띤 여성 두 명이 다가왔는데, 둘은 로이아스 대륙에서 보기 힘든 숏팬츠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마드세인이 아무리 문화가 개방적으로 발달하고 있다지만, 저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면 미쳤다고 돌 맞기 십상이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확인차 묻는 내 말에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 웃음을 흘렸다.
“와, 한국말 잘하시네요.”
오랜 세월 잊고 산 한국어.
어눌해질 법도 하지만, 평범한 몸과 머리가 아닌지라 과거에 대한 기억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여기 광화문이에요. 서울 광화문. 어디 가시는데요? 저희가 알려 드릴게요.”
그녀들은 그저 잘생긴 금발의 외국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일 테지만, 나는 그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로이아스 대륙.”
“네?”
그래, 이건 분명 정신 공격이 분명하다.
나 혼자 이상함을 느꼈던 불쾌한 기운.
이 세계엔 그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족 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왜 그러세요?”
나를 중심으로 투명한 마력이 수증기처럼 피어오르고 이어서, 붉은 기운이 주변을 잠식해갔다.
“꺄아아악!”
시끄러운 여성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나는 환영을 부수기 위해 마력을 한껏 담아 소리쳤다.
“무너져라!”
파앗!
내가 서 있던 광화문 광장 바닥이 가루가 되고, 평범한 허공에 균열이 생겼다.
“무슨?”
하지만 그 균열은 순식간에 복구가 되었는데, 내 언령에도 환영은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지 이거?
단순한 환영이 아니야?
나는 당황하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내 주변은 이상 현상으로 혼란에 빠졌다.
[마력 감지! 마력 감지! 광화문 광장에서 1등급 이상의 마력이 감지되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선 조속히 피난해주시기 바랍니다. 해당 상황은 훈련이 아닌 실제 상황입니다. 시민 여러분께선 조속히 피난해주시기 바랍니다.]
“뭐야 이건?”
배경은 분명 내가 알던 대한민국이 맞는데,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사방에 설치된 전광판에 해당 내용과 함께 방송이 울려 퍼지고, 시민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개중엔 도망치지 않고 골목에 숨어 스마트폰을 꺼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이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 환영은 환영.
나는 결코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건 마족의 능력이 아니라, 유적의 힘이라 봐야 할 것 같다.
성녀를 비롯한 일행도 이 이상한 공격에 당했을까?
모두 어이없이 당할 위인들은 아니지만, 이런 곳에서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다.
“텔레포트는? 젠장, 좌표가 안 잡히는군.”
나는 계속 언령으로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통하지 않았다.
마치 진짜 다른 세계에 떨어지기라도 한 듯 완전히 격리된 느낌이다.
“움직이지 마라!”
경보음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경찰과 군인이 출동했다.
역시 이건 환상이 분명하다.
왜냐면 굼뜨기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공무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신속하게 움직일 리 없으니.
대충 둘러보니, 옥상에서도 거대한 저격총으로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해당 마물을 위험지수 1급으로 지정.]
“누구보고 마물이라는 거야.”
나는 광화문 광장이 너무 시끄러워져서 일단 조용한 곳으로 이동해야겠단 생각에 몸을 허공에 띄웠다.
“쏴라! 절대로 놓치면 안 돼! 1급 마물을 놓치면 재앙이다!”
타타타타탕!
그런데 내가 몸을 띄움과 동시에 사방에서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
심어 개중에 그레네이드 탄과 대전차 미사일까지 섞여 있어 시선을 어지럽혔는데, 그 무엇도 내가 펼쳐 놓은 결계를 뚫지 못했다.
총탄들은 요란하기만 할 뿐 별거 아니었다.
“젠장, 베리어가 너무 견고해!”
“빌어먹을 왜 하필 서울 한복판에 1등급 마물이.”
괴물 취급받는 게 불쾌하긴 하지만, 만약 이곳이 진짜 지구였어도 이상한 힘을 쓰는 나를 위협적으로 생각할 만했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한국과 조금 다른 것 같단 느낌이 들었지만, 굳이 이 장단에 맞춰줄 이유는 없었다.
“사격중지!”
그렇게 총탄을 맞아가며 고도를 높여가던 나는 갑자기 사격이 멈추자 의문을 표했다.
“어딜!”
그런데 그때.
머리 위를 날던 헬기에서 웬 창을 꼬나쥔 사내와 거대한 방패를 쥔 사내가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
이게 웬 미친놈들인가 싶어서 당황했는데,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이어진 상황이었다.
파지지직!
사내가 손에 쥔 창에 푸른빛의 전격이 튀며 내가 두른 배리어를 파고드는 것 아니겠는가.
당연히 배리어를 강화하면서 더 이상 창이 파고들진 않았지만, 헬파이어조차 막을 수 있는 배리어가 뚫릴 뻔했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다.
“젠장.”
창을 쥔 녀석이 짧게 욕설을 내뱉으며 물러나자, 거대한 방패를 쥔 사내가 배리어를 후려쳤다.
“큭!”
이번에도 베리어엔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관성에 의해 땅으로 떨어져 내렸고, 반중력 마법을 활용해 천천히 착지했다.
이거 꽤나 어처구니 환상이 아닐 수 없다.
모름지기 정신 공격이라면 내가 그리워하던 풍경을 넣어야 할 텐데, 어째 괴리감만 심해지니 말이다.
“이렇게 잘생긴 마물은 처음이네.”
“방심하지 마, 온전한 인간 형태의 마물은 하나같이 강하니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한국어로 물었다.
“당신들은 뭐죠?”
내 물음에 그들은 더없이 눈을 크게 떴다.
어찌나 심하게 놀랐는지 뒷걸음질을 쳤다.
“뭐, 뭐야?”
“마물이 말을?”
“인간인데요?”
내 대답에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귀에 착용하고 있는 이어폰을 만지작거렸다.
“단순히 동업자인데, 경보 잘못 울린 거 아냐?”
[겉모습에 속지 마. CCTV로 확인했는데 일반 마물이랑 등장 이팩트가 같았어. 그냥 특수 마물이라 생각해.]
“하지만, 공격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이미 위에선 사살 명령이 내려왔어. 1등급 마물의 코어는 귀중하다고.]
뭔가 했더니, 통신 장비였다.
그들은 마지못해 다시 무기를 꼬나쥐었고,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들은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다.”
머지않아 그들과 비슷한 복장의 인물들이 몰려왔다.
다들 금속재질을 덧댄 레더아머를 걸치고 있었는데, 색감이 어찌나 화려한지 비슷한 복장을 하더라도 로이아스에선 절대로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만약 그들이 정체불명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코스프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같이 내게 적의를 보이는 사람들.
그저 원래 장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인 나도 짜증 날 만큼의 악당취급이었다.
“공격해!”
빌딩 옥상에서 날아든 총탄을 신호로, 사방에서 코스츔 플레이어들이 달려들었다.
아니, 복장만 봐선 나도 이들과 비슷하려나.
***
쿠우웅!
비스트 드래곤이란 이름의 거대한 샤벨타이거가 쓰러진다.
그에 성녀와 마그누스를 비롯한 일행들의 시선이 뒤쪽에 서 있던 적발의 청년에게 향했다.
“대체 아르비스 공작님께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성녀가 분노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테라시아가 성녀의 팔을 낚아챘다.
“아직 안전이 확인되지 않았다. 조심하도록.”
“하지만 공작님이!”
비스트 드래곤을 쓰러뜨린 강력한 파티.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크게 동요했다.
그 이유는 방금까지 함께였던, 루이스가 문을 연 순간 증발하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인간이라면 무사합니다.”
적발의 청년이 말하자 테라시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한걸음 나섰다.
“아르비스 공작을 사라지게 만든 수단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안 되는군. 드래곤인 나조차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요. 실제로 써본 건 저도 처음이니까요.”
그러면서 히죽 웃음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 다시금 성녀가 발끈했지만, 폴시스 공작과 에클로 공작이 그녀를 말렸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작전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구나. 이렇게 마족을 눈앞에 두고도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그들에게 지금의 상황은 마족이 루이스를 인질로 잡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평범한 인간 한 명쯤은 무시하겠지만, 그의 존재는 마드세인 왕국을 넘어 미드랜드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절대 없어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테라시아는 루이스를 굉장히 높게 평가했는데, 어쩌면 그가 제2의 마도제국을 건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신 마도제국을 건설한다면 4만 년 전과 달리, 함께할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었다.
“그가 무사한 건 확실하겠지?”
“아마도요.”
“어찌하면 그를 돌려줄 생각인가?”
“일단 평화적으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목숨을 구걸 할 줄 알았는데, 대화라니.
마족과 대화만큼 불필요한 시간도 없을 것 같지만, 테라시아는 일단 그와 어울리기로 마음먹었다.
“부디 우리를 화나게 하는 내용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지금은 애써 참고 있으나, 언제든 너를 죽여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오래전부터 드래곤 분들과 대화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족은 무조건 사살하고 보는 성향 때문에 이야기를 시도할 생각도 못 했죠.”
테라시아의 냉정한 말에 적발의 마족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비스트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요?”
“아니, 여기서 하지.”
딱.
테라시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음식이 가득 놓인 기다란 식탁과 의자들이 놓였다.
피 냄새 풍기는 곳에 놓인 음식이라니, 식욕이 싹 달아나는 풍경이다.
그러나 지금은 배나 채우자는 게 아니었다.
결국, 마족은 마지 못해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함께 앉으시죠. 중간계의 다른 분들도 같이 듣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무도 마족의 이야기를 신뢰하진 않지만, 이종족들은 테라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 앉았다.
“저는 억압의 마왕 데이라님의 심복인 카르엘 공작이라 합니다.”
“꽤나 거물이시군.”
감정 없는 테라시아의 반응은 질질 끌지 말고 어서 요점만 말하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여러분은 이 유적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계십니까?”
“대뜸 그 이야기부터 시작인가?”
“괜한 물음이 아니니 어울려주셨으면 합니다.”
“신화시대의 유적이며 비스트 드래곤이 잠들어 있다는 것 정도다.”
오히려 마족들이 이 시설에 대해 잘 아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이상했지만, 테라시아는 그저 이 유적이 신화시대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신화시대는 마족과 천족이 쉽게 중간계에 들락날락하던 시절이니.
“이 유적이 신화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맞지만, 용도가 변경된 것은 약 4만 년 전입니다.”
“뭐?”
4만 년 전이면 마도시대 막바지를 뜻한다.
테라시아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태도로 턱을 까딱였고, 마족 카르엘은 식탁에 놓인 물로 목을 축였다.
“이 유적의 이름은 차원의 미궁. 이 세상에서 도망치기 위해 만들어진 탈출구입니다.”
“이 세상에서 도망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가이아가 창조한 세상이 붕괴하기 전에 새로운 이주처를 찾아 떠나는 방주인 셈이죠.”
세상이 붕괴한다는 부분에서 다들 이해되지 않는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그들은 말을 잃었다.
“지금 마계는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족은 절반이나 죽어 나갔고 영광스런 이블플래닛도 현재진행형으로 증발하고 있죠.”
놀랍긴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모두의 눈빛에 의심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마족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신용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믿음이 안 가시겠죠.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천계는 이미 예전에 멸망했다는 사실을.”
“뭐?”
서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