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186 --------------
“언제까지 재밌는 자세를 유지해야 할까요?”
분위기를 깨는 마그누스의 물음에 조용히 그녀를 지켜본 루이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손 내리고 일어나.”
“알겠습니다.”
루이스의 지시에 마그누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동은 고분고분하지만, 눈빛에 담겨 있는 감정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야?”
역시 연인답게 루이스가 지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챈 루시엘라.
그녀의 물음에 루이스는 태연하게 답했다.
“에리스의 호위로 누굴 붙일까 생각하다가,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잉여자원이 생각이 나서.”
그의 눈이 똑바로 마그누스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챈 루시엘라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트러블이 발생하면 재해 수준의 사고가 발생할 것 같은데?”
“명령으로 제한을 두면 되지. 어떤 식의 명령이든 간에 마그누스는 그것을 수행할 능력이 되니까.”
“그래도···.”
“공장일 빼곤 막상 시킬 일도 얼마 없으니, 좋은 것 같은데? 굳이 최고의 전력을 놀릴 필요는 없지. 녀석이 호위하면 그만큼 인원을 여유롭게 편성할 수 있으니까.”
루시엘라는 오히려 마그누스의 존재가 걱정이었으나, 루이스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드래곤을 이렇게까지 부리는 존재가 자신의 연인이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마그누스님이 제 호위가 되는 건가요?”
“그래, 외출로 한정되긴 하지만.”
에리스의 물음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그누스를 끌어당겼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그누스님.”
마그누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에리스.
빤히 그녀를 바라보던 마그누스는 퉁명스레 말했다.
“만만하게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어린 인간님. 당신께서 가볍게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상대가···.”
그리고 이젠 트레이드 마크가 된 이상한 말을 내뱉는 마그누스를 향해 루이스가 싸늘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100년쯤 벙어리로 살고 싶어?”
그에 마그누스는 무슨 일이 있었냐며 평범하게 반응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에리스는 마그누스를 신기하단 눈빛으로 올려 보며 요모조모 관찰했다.
루이스는 호기심도 많고 활발한 아이를 그동안 너무 가둬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배려가 부족했네. 아무리 안전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성에만 있으니 답답했겠어.”
“헤헤.”
“파티 가서 친구들 많이 사귀고 승전 기념제 외에 따로 참석하고 싶은 파티나 모임이 있으면 말해.”
“정말요? 보내주시는 거예요?”
“그래.”
에리스의 물음에 루이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파티뿐만 아니라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렴.”
나름 가족을 신경 쓴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자신의 기준에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39. 승전 기념제
루이스 로이드 아르비스 공작.
마드세인 왕국 제1 귀족으로 제국의 야욕을 좌초시킨 영웅이다.
현재 제국 동맹을 찍어 누르면서 미드랜드 최대의 세력으로 떠오른 4개국 동맹의 의장을 맡고 있으며, 20명이 넘는 초인을 휘하에 둔 대륙 최대의 권력자이기도 하다.
그런 인물의 여동생이 왕실 승전기념 파티에 참석한다.
에리스 덴 아르비스의 사교계 데뷔.
이 소식은 왕국을 넘어 순식간에 대륙 전체에 빠르게 퍼졌으며, 귀족은 물론 대국의 왕가까지 관심을 보였다.
아르비스 공작은 마드세인의 여왕과 혼약이 정해져 있고, 꽤 오랫동안 신부로 점찍어온 상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상태다.
그 외 이성 문제에 대해선 완전히 철벽을 두른지라 어떻게 접근할 수가 없었는데, 그의 여동생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니 관심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아르비스 공작은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걸로 유명하다.
만약 그의 여동생을 잡는다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아르비스 공작의 힘을 등에 업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더구나 아르비스 공작에 비해 11살밖에 되지 않은 여자를 상대하는 것은 허들이 낮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아르비스 공작의 보호가 있겠지만, 실수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접근한 것만으로 문제 삼을 이유는 없었으니.
그리고 이성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동성의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이 또한 성공이라 볼 수 있다.
적어도 아르비스 공작이 쳐놓은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로 인해 마드세인 왕실에서 개최하는 승전기념 파티는 귀족들의 엄청난 참석률을 예고했으며, 타국에서도 참석 문의가 쇄도했다.
미드랜드 중부, 크리스비 왕국의 레이크 캐슬.
“그 잘난 외모는 아무래도 이날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군. 너의 유일한 재능이 부디 도움되길 바란다.”
크로스비 국왕은 자신의 둘째 아들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걱정 마시죠. 폐하. 이성에게 접근하는 것이라면 저를 따라올 수 있는 인물은 없습니다.”
그에 크로스비 왕국의 둘째 왕자 네이브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두들겼지만, 국왕은 못마땅하단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로선 별수 없었다.
현재 크로스비 왕국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으니.
인테라 호수를 낀 6개국 중 하나인 크로스비는 대왕국에 준하는 국력을 지닌 중견왕국으로 아크로스 왕국과의 마찰이 매우 잦은 국가였다.
선조 때부터 이어져 온 양국의 불화는 거의 적대 국가라 볼 수 있을 정도.
오랜 세월 쌓여온 감정의 골이 곪고 곪아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지속되어 왔는데, 근래 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아크로스 왕국이 위스워드 제국과 전쟁을 치르던 때.
크로스비의 북부사령관이 무슨 생각인지 아크로스 국경 방면에서 대대적인 공성 훈련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훈련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마찰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크로스 왕국 입장에선 예민한 시기였기에 벌어진 대대적인 공성 훈련에 분노하는 것이 당연했고 이는 곧 외교적 마찰로 벌어졌다.
예전이라면 가볍게 무시했겠지만, 아크로스는 더 이상 자신들이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4개국 동맹의 말석이긴 하나 대륙의 패권을 진 세력에 소속되어 있었고, 위스워드 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더 이상 시선을 그들에게 향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아크로스 내부에사 이김에 눈엣가시와 같은 크로스비를 정리하잔 말이 나오겠는가.
만약 지금 아크로스와 전쟁이 벌어진다면 크로스비는 필패였다.
크로스비 왕국의 주변국은 약소국뿐인지라, 누구도 아크로스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아 했다.
아크로스 왕국이 4개국 동맹 내에서나 쩌리 취급이지, 주변국 입장에선 대량의 기간트를 지닌 군사 강국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크로스비 왕국은 외로운 외교 싸움을 이어갔고, 파국이 멀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절대로 마찰을 일으켜선 안 된다. 성공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포기해.”
이젠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상황에까지 치달았다.
국왕의 당부에 네이브 왕자는 자신이 바보냐는 태도로 가볍게 답했다.
“저도 알거든요? 걱정 마세요.”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좋으련만···.
다른 부분에 대해선 어떤지 몰라도 여자를 다루는 데 있어선 둘째 왕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쓸데없는 재능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라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드세인 왕국의 승전 기념제 당일.
누구보다 화려하고 멋들어진 복장의 네이브 왕자가 크로스비 왕국을 대표해 행사에 참석하였다.
“허어, 여기가 5년 전까지 약소국이던 마드세인 왕국이 맞는가?”
네이브 왕자는 크로스비 왕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 수도 세인을 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듣기로 아르비스 공작령의 세 개 시는 하나하나가 세인에 버금간다고 들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마드세인 왕국의 수도 세인은 그야말로 별천지나 다름이 없었다.
***
“알겠지? 너는 에리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누군가가 해를 끼치려 하면 죽이지 않는 선에서 제압해.”
“네.”
내 당부에 아르비스 공작령의 행사용 기사 정복을 걸친 마그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치 숲의 요정처럼 앙증맞은 녹색 드레스 차림으로 잔뜩 굳어 있는 에리스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브릴 언니도 참석한다고 들었는데 같이 안 가요?”
“이미 부대 동료들이랑 안에 있어.”
에리스가 친구들을 사귀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를 제공한 건 이브릴의 부재가 컸다.
이제 그녀는 아르비스 공작가 소속이기 전에 군인이다.
이번에 62대대의 기갑 1소대의 활약이 매우 뛰어나 이브릴은 군인의 신분으로 파티에 참석했다.
“긴장되니?”
“조, 조금요.”
“걱정 마. 네가 뭘 하든 사람들은 박수치며 좋아해 줄 테니까.”
“그럴까요?”
“그럼, 오라비가 누군데.”
내 자신감 있는 태도에 에리스는 심호흡을 하며, 며칠 사이 꽤나 가까워진 마그누스에게 팔짱을 끼었다.
물론 마그누스는 에리스 알기를 잘 따르는 강아지 정도로 취급했지만, 에리스는 뻣뻣한 녀석의 태도에도 굴하지 않고 저렇게 엉겨 붙었다.
“괜찮을까?”
나로 인해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한 루시엘라가 걱정스레 물었다.
루시엘라가 내게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공식 석상에 참석해서가 아니라 엘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귀를 드러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딱히 감출 필요 없습니다. 누가 감히 제 여자에게 뭐라 하겠습니까?”
“자신감이 너무 과하니까 보기 좀 그런데?”
몸매가 강조되는 남색 이브닝드레스 차림에 오리하르콘 장신구로 귀를 꾸민 루시엘라가 내게 팔짱을 껴왔다.
이젠 내가 그녀보다 1~2cm정도 더 큰 덕분에 눈높이가 맞았다.
정말 다행이다.
“그럼 가볼까요, 아가씨들?”
참고로 부모님은 이번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로 하셨다.
귀족 행사보단 영지민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인지라, 영지 축제에 얼굴을 비친다고 하셨다.
파티장에서 멀지 않은 대기실을 나서니, 복도에 진을 치고 있던 수하들이 다가왔다.
화려한 복장의 인물 20여 명이 주변을 둘러싸니, 벌써 파티장이 된 느낌이다.
“호위하겠습니다.”
그들 모두 후작위와 백작위를 가진 초인들이다.
요즘은 좀처럼 한 번에 모일 일이 없다 보니, 이렇게 보니 정말 든든했다.
“꼰대들 복장하고는?”
“너는 복장이 그게 뭐야? 그냥 벗고 다니지?”
왕립 마법병단의 단장인 스텔라의 비아냥에 근위기사단 단장인 제논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렇게 복도를 거니니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개중엔 루시엘라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엘프가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잠시 후, 우린 파티장 입구에 도착하고, 대마법사와 마스터들이 마치 의전 행사를 하는 것처럼 내 양옆에 늘어섰다.
그리고 나는 파티장 입구를 지키고 선 왕실 집사를 바라보았다.
“아르비스 공작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에 지금까지 이렇게 큰 파티가 있었나 싶을 만큼, 엄청난 인파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
수많은 인파로 바글대는 파티장을 보며 네이브 왕자는 미간을 좁혔다.
이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아르비스 공작의 여동생을 노리고 있을까?
아마 오늘 파티의 최대 관심사는 승전의 영웅들이 아닌, 아르비스 공작의 여동생이 누구에게 관심을 주냐는 것이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며 분위기 파악을 하던 네이브 왕자는 여기저기 가슴에 훈장을 차고 있는 검은 제복 차림의 젊은이들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타밀 백작. 저 검은 제복은 뭐지?”
“기간트 관련 부대의 제복입니다. 금배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은 기간트 오너고 아무것도 없으면 일반 장교입니다.”
“그 말은 군인이란 소린가?”
“그렇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비싼 원단을 사용한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군인의 제복이란 것이 꽤나 신기했다.
군인 중엔 젊은 여성이 적지 않았는데, 의외로 반반한 외모가 많아서 절로 관심이 갔다.
아르비스 공작의 동생이 등장하기 전까지 참아야 하는데, 어느새 그는 유독 눈에 띄는 한 장교에게 향하고 있었다.
“왕자님!”
“잠깐이면 되네.”
금뱃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일반 장교가 분명했다.
“그 이야기 들었어? 요즘 메이슨 왕국에서 언데드 몬스터가 자꾸 출몰한다고 하더라.”
“정말요? 거긴 전쟁지역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소문에 의하면 듀라한을 봤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더라.”
그녀는 부대에서 꽤나 인기가 많은 듯, 또래의 장교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는데, 네이브 왕자는 시덥지 않은 이야기에 어울려 주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오, 여러분이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들이군요?”
잘 생긴의 얼굴에 선한 미소를 가진 사내가 다가오자 여성 장교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다.
그러나 네이브 왕자의 시선을 받은 여성 장교는 태연하게 답했다.
“저는 상황 장교고 전장을 누빈 사람은 이분들입니다.”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
네이브 왕자의 눈썹이 꿈틀댔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에 스치고 지나간 표정이었고 그는 예의 바른 태도로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크로스비 왕국의 2왕자 네이브라고 합니다. 오늘은 마드세인의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죠. 그래서 제국의 야욕을 꺾은 영웅분들께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이브릴 바네트 소위입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라는 신분을 밝히면 당연히 놀라야 정상이다.
실제 주변 장교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정작 그가 바라보던 여성 장교는 그냥 ‘그러냐’는 듯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승전 기념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