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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아르비스 공작의 등장에 마그누스가 다시금 다크엘프 퀸을 끌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테라시아가 그녀를 보호했다.
“못난 동족을 대신해 사과토록 하지.”
“아, 아닙니다.”
테라시아의 사과에 다크엘프 퀸 카밀리아가 얼떨떨하단 반응을 보였다.
“테라시아!”
마그누스가 크게 분노하며 소리치자 테라시아는 차갑게 말했다.
“이들은 네 장난감이 아니다. 드래곤과 함께 한 시대를 싸워온 종족이자 전우지.”
“네 녀석, 동족을 버리려는 것이냐?”
“어차피 우리에게 100년은 찰나와 같은 시간이다. 아르비스 공작 곁에서 다른 세계를 지켜보며, 계몽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아르비스 공작은 두 드래곤의 집안싸움을 조용히 팔짱을 낀 채 지켜보았다.
“이, 이익!”
마그누스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테라시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아르비스 공작에게 부탁이 있네.”
테라시아의 부름에 아르비스 공작은 말하라는 듯 턱을 까닥였다.
“실버 엘프에 대한 공격은 이것으로 끝내주었으면 하는군.”
그녀의 부탁에 그는 너무도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물론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책임과 보상을 져야 할 것입니다.”
아르비스 공작은 테라시아의 부탁에 답을 하면서도 시선은 똑바로 카밀리아에게 향했다.
“대신 무리한 요구는 말아 주었으면 한다.”
“어떤 거요?”
“여왕을 원한다든지.”
“필요 없거든요? 하지만 금전적, 물질적 보상은 가혹하게 뜯어낼 겁니다. 이번 전쟁은 완전한 저희의 승리니까요.”
리모트랜드에서의 전쟁은 미드랜드 국가들에게 있어서도 큰 부담이다.
어차피 이 땅을 점령한다고 해서 관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보상을 최대한 받아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보상에 대해선 내가 보태기로 하지.”
“그래주시면 저희야 고맙죠.”
일이 깔끔하게 해결돼서 좋긴 하지만, 아르비스 공작은 그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마그누스는 제 노예가 됩니다. 그건 아무렇지 않은 겁니까?”
“자업자득 아니겠나.”
직접 나서서 정리하려는 태도를 보이면서, 정작 동족에겐 냉정한 듯한 테라시아.
“그러다가 제가 마그누스와 함께 테라시아님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아르비스 공작의 날카로운 물음에도 그녀는 어깨를 으쓱일 뿐, 별다른 위기감을 표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네.”
간단한 답변이지만, 아르비스 공작은 그게 허풍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깨를 으쓱인 아르비스 공작은 카밀리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에 다크엘프 퀸 카밀리아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마그누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만 끝내거라.”
결국, 카밀리아는 테라시아의 권유에 패배를 인정했다.
“항복하겠습니다.”
“이 자식들이!”
카밀리아의 선언과 동시에 마그누스의 가슴에서 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왔다.
“아아악!”
그리고 그 기운은 사슬이 되어 그를 구속했는데, 그 사슬이 아르비스 공작과 연결되었다.
“이럴 순 없어!”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는 마그누스는 당장에라도 도망칠 것처럼 행동했지만, 붉은 사슬이 더욱 그를 옥죄며 제지했다.
“큭!”
“이미 용언은 발동되었으니 거부할 수 없다. 이는 네 경솔함에 낳은 대가. 앞으로 용언을 함부로 남발하지 말거라.”
이어서 사슬 형태의 기운은 사라졌지만, 아르비스 공작은 테이밍 마법처럼 마그누스와의 연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마그누스는 자네의 충실한 종일세.”
테라시아의 확답에 마그누스는 더욱 지랄발광했다.
“마그누스를 어떻게 부릴지는 자유지만, 이왕이면 어느 정도 대우를 해주었으면 하네.”
그래도 동족에 대한 마지막 정일까?
냉정해 보이는 그녀의 이야기에 아르비스 공작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하는 거 봐서요.”
“드래곤이 한낱 인간 따위와 어울리겠는가! 100년만 지나면 미드랜드를 갈아엎어 주지!”
“그런데 말하는 꼬라지 보니까, 교육이 필요하겠네요.”
테라시아는 쓴웃음을 흘렸다.
“야.”
아르비스 공작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마그누스를 내려보며 히죽 웃었다.
“너 앞으로 그 병신같은 말투 쓰지 말고, 존댓말 써라.”
“무슨! 어찌 제가 미개한 분들에게!”
“크흡!‘
표정과 달리 마그누스의 말투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덕분에 아르비스 공작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마그누스는 바뀐 말투에 얼굴을 붉히며, 더욱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는 위대한 드래곤입니다! 하등종족인 여러분에게 이런 대우를 받아선 안 되는···.”
“입 좀 다물어.”
다시금 이어진 지시에 다크엘프의 왕성은 침묵으로 물들었다.
아르비스 공작은 더없이 만족한 모습으로 테라시아를 바라보았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드래곤과 척을 질 생각은 없습니다. 불가항력이란 거 아시죠?”
“물론.”
“좋아요, 그럼 이 일로 인한 뒤탈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끄덕.
아르비스 공작은 통신으로 전쟁을 멈추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다크엘프 여왕을 향해 물었다.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저를 제한하던 것은 없어졌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그 말은 즉, 언제라도 다크엘프를 사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
“그동안은 여기저기 눈치를 보느라 힘을 절제해왔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다를 겁니다.”
카밀리아는 눈앞의 젊은 인간에 대해 잘 알진 못해도, 그가 드래곤을 앞에 두고도 위축될 이유가 없는 강자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앞으로 지켜볼 겁니다.”
“알겠습니다.”
드래곤 수준은 아니어도, 다크엘프는 꽤나 고위 종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종족의 여왕인 그녀가 인간 앞에 힘을 못 쓰는 것은 굴욕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워낙 사태가 사태인지라 그런 것까지 따질 여유가 없었다.
물론 여유가 있어도, 제법 현실주의자인 카밀리아가 쓸데없는 망발을 던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전쟁 보상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죠.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쉬고 싶네요.”
아르비스 공작은 테라시아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마그누스의 팔을 잡아끌며 워프 게이트 속으로 사라졌다.
단순한 힘의 싸움으로 끌고 가며 게릴라전을 펼쳤다면 마그누스가 원하는 혼란을 인간 세계에 심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그누스는 더 큰 피해를 위해 과욕을 부렸고, 그로 인해 발생한 위기감은 오히려 전쟁을 조기 종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미드랜드와 리모트랜드를 시끄럽게 만든 전쟁은 4개국 동맹의 승리로 끝이 났다.
***
38. 노예 2호
“현재 본국에서 점령 중인 로투스, 타마드, 가레드 세 개 지방 외에 소겔과 모르도 지방까지 넘겨받았으면 합니다.”
아인트 공작의 주장에 함께 자리한 정보부의 에두아르 백작의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종전을 합의한 상황에서 두 개 지방을 더 내놓으라니요. 오히려 저흰 현재 점령 중인 영지의 반환을 요청하려던 차입니다.”
종전 협상을 위해 마드세인에선 아인트 공작이, 칼바도스에선 에두아르 백작이 전권 대사로 선임되었다.
드래곤의 개입을 비롯해 여러모로 비밀이 많은 전쟁이었던지라 협상에 임할 인원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현재 두 사람은 마드세인 왕국이 점령하고 있는 가레드 후작령에서 마주하고 있었는데, 상황상 패전국인 칼바도스 제국이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아인트 공작과 조금이라도 덜 빼앗기기 위한 에두와르 백작의 눈치 싸움.
아인트 공작은 여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우리가 점령지를 돌려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애초에 이번 전쟁 자체가 드래곤의 농간에 의한 것. 평범한 전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벌인 전쟁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에두와르 백작이 협상에서 크게 지르고 있긴 하지만, 어차피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확률은 전무했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반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조금이라도 상대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당연히 그의 의도는 아인트 공작도 알고 있는바.
지극히 유리한 입장에서 상대방의 장단에 맞춰줄 이유가 없었다.
“자꾸 이런 식이면 협상할 의지가 없다고 보겠습니다.”
아인트 공작이 튕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을 하자, 에두와르 백작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아아, 왜 이러십니까?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이죠. 서로 의견을 조율하며 진행하는 것이 협상 아니겠습니까?”
그의 행동은 협상전에서 졌다는 것을 밝힌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인트 공작은 애써 웃음을 삼키며 굳은 모습을 연출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겔과 모르도 지방의 복속입니다.”
점령지역은 이미 자신들의 것이라는 듯 언급도 안 했다.
하지만 에두와르 백작은 조용히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 두 개 지방에 소속된 영지가 무려 7개입니다. 다짜고짜 그걸 내놓으라고 하셔도 곤란합니다. 어찌 국민들을 팔아넘기겠습니까?”
아인트 공작은 그건 너희 사정이라고 생각했으나, 너무 강경하게 나간다면 상대가 돌발 행동을 할 수 있는 만큼, 이번엔 잘 타일렀다.
“어차피 전쟁이 이렇게 끝나는 것만으로 칼바도스가 이득입니다. 종전 자체가 저희가 많이 양보한 것이죠.”
“그럼 차라리 영지 대신, 아직 개발되지 않은 평야와 숲, 산으로 대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영토의 면적은 더 많이 떼어 드리죠.”
“땅만 갖고 있으면 뭐합니까? 그걸 쓸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지.”
“대신 배상금을 조금 더 올려 드리겠습니다.”
“배상금은 배상금대로, 영토는 영토대로 따로 협상합니다.”
“이건 어떻겠습니까? 소겔에 마나석 광산과 철광석 광산이 껴있는 보르주 산맥을 넘겨 드리죠.”
때론 언성을 높이고, 때론 부드럽게 말하며 두 사람은 진중하게 협상을 이어갔다.
결국, 영토 문제는 1시간여가 지나서야 마무리가 되는데, 에두와르 백작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앞으로 이 땅은 마드세인 왕국의 것입니다.”
그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상황이 너무 기운 상태에서 벌어진 협상인지라, 아인트 공작의 주장을 넘어서지 못했다.
마드세인 왕국은 칼바도스 제국 남부의 5개 지방을 손에 넣게 되었다.
5개 지방은 소속 영지만 30개가 훌쩍 넘는 거대한 땅이었으며, 이는 마드세인 왕국 4할 정도에 해당하는 크기였다.
마드세인이 영토만큼은 꽤나 큰 국가였기에 4할만 해도 웬만한 소왕국보다 거대한 땅이었다.
“그럼 이제, 배상금에 대한 협상을 시작할까요?”
협상이란 것도 오가는 맛이 있어야 할만하지, 일방적으로 뜯기는 입장에선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에두아르 백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기간트, 마력포대, 위성 등 각종 군사 장비와 산업 전반에 사용되는 동력제품에 라디오, 냉장고 등 생활용품까지, 마법 물품은 이 세상에 없어선 안 되는 문명과 산업의 기본이 되는 기술이다.
마드세인 왕국은 몇 년 사이 나라와 국민의 경제력이 급상승하면서 마법물품의 수요가 급증했다.
나는 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마법사를 대거 고용한 공장을 설립하고, 유물의 제작 기능을 쉬지 않고 돌리는 등 많은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했는데, 이번에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마드세인 왕국 제일의 아티팩트 제작 공장.
나는 웃는 얼굴로 달려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공장 책임자를 향해 물었다.
“뭐, 문제없죠?”
“쉴새 없이 밀려드는 업무로 바쁜 것 빼면 문제는 없습니다.”
열심히 손을 비비며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공장의 책임자는 다름 아닌, 왕립 마탑주이던 카르디아 공작이었다.
왕립 마탑주의 자리는 아드리안에게 넘기고, 그는 아티팩트 제작 공장의 공장장이 되었다.
물론 공장장이라고 해서 업무 지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나서서 제작도 하고 있다.
아무래도 대마법사의 업무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에 노예인 그를 거리낌 없이 부려먹고 있었다.
이곳에서 주로 생산되는 물품은 기간트를 비롯해 군사용품 관련 장비가 많았다.
나라를 쥐고 흔들던 한 축의 몰락이라 할 수 있는 현장이지만, 나는 그다지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업무시간이 딱 정해져 있고, 휴일도 잘 챙겨주는지라 오히려 음모를 꾸미는 등 다른 뻘짓을 하는 것보단 훨씬 건전하지 않을까 싶다.
“바쁘신 분께서 이곳엔 어쩐 일로···?”
카르디아 공작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뒤에 멀뚱히 서 있는 푸른 머리의 여성을 잡아끌었다.
“새로운 인력을 데려 왔습니다. 아마 숨통 좀 트일 거예요.”
“헙!”
눈이 번쩍 뜨일 미녀의 등장에 그는 헛바람을 삼켰다.
“비루하신 인간분께서 그리 바라보시니, 위액이 역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이상한 말투에 카르디아 공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예 2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