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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마법사-93화 (9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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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교육이란 단어에 실소를 흘린 아인트 공작은 슬쩍 내 등 뒤로 펼쳐진 옥상정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슬슬 마음을 정할 때가 되지 않았나? 늦어서 좋을 것이 없네.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옥상정원에는 하늘하늘한 베이지색의 드레스를 입은 루시엘라가 거닐고 있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루시엘라, 실비아 여왕과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려 했어요.”

    “그것참 기쁜 소식이군. 그동안 자네가 너무 어렵게 생각한 거야. 귀족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글쎄요. 저는 별로 당연하다고 생각을 안 해서···.”

    “자네로 인해 속썩이는 아랫사람들도 생각해줘야지. 이제 아르비스 공작이란 인물은 마드세인 그 자체일세.”

    나의 존재가 곧 나라라는 말.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하지만 마냥 기분 좋게 웃을 수가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라도 결정을 내려 다행이구먼. 모름지기 영웅에겐 미인이 따르는 법이니.”

    “실비아 여왕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지금 제 마음은 루시엘라에게 가 있는데.”

    “폐하는 그걸 알면서도 자네에게 혼인을 청한 거네. 그것이 그녀의 바람이고 최선의 선택이지. 앞으로 자네가 폐하를 행복하게 해주면 되는 것 아니겠나.”

    나는 현재 루시엘라와 사귀고 있다.

    그것도 그냥 사귀는 것이 아니라 혼인을 계획하고 있는 깊은 관계.

    나와 루시엘라의 관계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인데, 얼마 전 실비아 여왕으로부터 공식적인 혼담 요청이 들어와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미 수년 전에 그녀와의 혼담을 쳐낸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지금은 예전처럼 쉽게 그녀를 쳐낼 수가 없었다.

    실비아는 이 나라의 여왕으로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정세를 읽는 안목도 좋아 국왕의 자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위엄.

    뒤에 내가 버티고 있기에 허수아비란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누구도 실비아를 무시 못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때문이지 그녀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실비아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몇 없다 보니, 점점 나에 대한 의존이 심해졌다.

    더불어 나를 의존하는 만큼 그녀는 여유를 잃어갔고, 결국 이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만약 내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게 된다면, 실비아도 언젠가 무너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어도 그녀를 매우 좋아하는 나로선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자네도 폐하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지 않나.”

    “좋아하죠. 남자라면 모두가 좋아할 만한 사랑스런 분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게 연애감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자네 정도 위치에 오른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지. 권력엔 그만큼 책임도 따르는 법이니.”

    아인트 공작은 내가 실비아 여왕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극히 맞는 말인지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혼자 잘난 맛에 살겠다면 그냥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되네. 하지만 그것도 모진 사람이나 가능한 행동이지. 자넨 어차피 실비아 여왕을 못 쳐내.”

    누구보다 내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는 아인트 공작.

    “반박을 못 하는 게 왠지 짜증 나네요.”

    아인트 공작은 너털한 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루시엘라님에겐 말했겠지?”

    “물론이죠.”

    “뭐라던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상관없대요.”

    “그게 끝인가? 시샘 같은 것도 없고?”

    “실비아 여왕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는 데다가, 인간의 수명은 찰나와 같으니 끝끝내 제 옆에 남을 인물은 자신뿐이라더군요. ”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러게 말이에요.”

    “그럼 문제 될 것 없지. 괜히 불편해할 필요 있는가? 자네를 남편으로 얻게 된다면 그동안 폐하를 압박하던 많은 것들이 해소될 것이네. 폐하께서도 심리적인 안정을 가질 테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행복이란 감정도 있으면 좋겠네요.”

    “그건 자네 하기 나름이지.”

    이어서 칼바도스와 위스워드 제국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인트 공작은 돌아갔고, 루시엘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나는 루시엘라에게 이브릴의 소식을 전했다.

    “이브릴이 북부 최전선에 배치되었다네.”

    이브릴은 내게 딸이자 동생과 같은 아이지만 개인적으론 루시엘라의 제자이기도 했다.

    “본인은 잘 지내고?”

    “부대 사령관과 트러블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한번 가보려고.”

    루시엘라도 이브릴이 걱정되는지 눈을 크게 떴다.

    “같이 갈래?”

    “그래도 돼?”

    ***

    34. 국경지대

    4개국 동맹과 제국 동맹의 군사력은 비등하다고 평가되지만, 실상은 4개국 동맹이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지리적 이점 때문인데, 제국 동맹의 한 축인 로엘 제국이 남부 국가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쟁 발발 시 두 제국을 지원하는 게 쉽지 않았다.

    반면 칼바도스 제국은 마드세인, 이타루스 2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위스워드 제국은 케일론, 이타루스, 아크로스, 3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그래서 양 진영 간의 대전쟁이 발발하게 된다면, 불리한 것은 제국 동맹이지 4개국 동맹이 아니었다.

    때문에 위스워드와 칼바도스 제국은 4개국 동맹의 도발에도 이전처럼 강압적으로 받아치지 못했다.

    마드세인 왕국 북부군 2군단 소속 62기갑대대.

    요즘 국경 지역의 도발로 칼바도스의 신경을 긁는 가장 악명 높은 부대라면 62기갑대대를 꼽을 수 있다.

    간을 집에 두고 왔다고 칭해질 만큼 대범하게 영토침범을 하고, 국경지대에서 기간트 기동훈련을 하는 등 도발에 도가 튼 부대였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칼바도스 제국 남부군의 시선을 끌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

    더불어 칼바도스에게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비록 자존심 강한 칼바도스가 잘 참고 있어서 사태가 커지는 경우는 없었지만, 만약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북부 전역에 포진하고 있는 10개의 기갑 부대가 순식간에 칼바도스를 타격할 수 있다.

    현재 마드세인이 보유하고 있는 200대의 기간트 중, 180대가 북부에 포진한 상태인데, 그 창끝이 62기갑대대였다.

    “야, 이번에 온 상황장교 중에 엄청난 미인이 있다고 하던데?”

    파일럿으로 키워진 적성 아카데미 출신의 기갑 1소대원 10명이 격납고에 나란히 앉아 기간트의 상태를 체크하며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젊은 남성이 많다 보니,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에 소대의 유일한 여성인 소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어? 저깄다. 저 여자야.”

    그리고 때마침 등장해 주는 화제의 주인공에 소대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가고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부대를 둘러보는 여성장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허···.”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

    신임 장교는 미모도 미모지만 남성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훌륭한 몸매를 겸비하고 있었다.

    “저래 보여도 15살이래.”

    “그렇게 어려?”

    더구나 자신들보다도 어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하나같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등장하기 전까지 자신들이 부대내에서 가장 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네? 왜 선임 장교가 붙지 않고 병사가 안내 하는 거야?”

    “그러게?”

    살짝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었지만, 잠시 후 그녀가 다가오자 그것을 잊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1소대를 보조하게 될 상황 장교 이브릴 바네트 소위입니다.”

    계급은 같은 소위지만 그들은 기사 작위를 가진 장교였으며, 먼저 전입해 온 선임들이었기에 이브릴은 깍듯하게 경례를 올렸다.

    그에 소대원들은 순박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럼 앞으로 통신으로 바네트 소위의 브리핑을 들을 수 있는 겁니까?”

    “네? 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오!”

    “목소리가 아름다우십니다!”

    이브릴은 뭔가 좀 이상하지만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귀족 출신이세요?”

    적성학교 출신의 장교들은 대부분이 평민 출신이다.

    비록 지금은 기사 작위를 갖고 있지만, 아무래도 환경이 특수하다 보니, 여전히 귀족을 어려워했다.

    “아뇨, 평민 출신의 고아입니다.”

    “너는 왜 그런 걸 물어?”

    “아닙니다. 평범한 질문에 제가 너무 솔직하게 답을 한 거죠.”

    그러면서 딱딱해 보이던 표정에 미소가 걸리자 남성 소대원들은 하나같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후 소대원들의 소개가 이어지고 시시한 농담이 오갔다.

    영양가 없는 대화에도 이브릴은 진지하게 반응했고, 그 모습은 소대원들에게 더욱 깊은 호감을 심어주었다.

    덕분에 대화를 나눈 10분여의 시간 동안 1소대원들과 이브릴은 꽤 친해질 수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경례를 올리며 격납고를 나서자 그들은 호들갑을 떨어댔다.

    “천사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지.”

    “나도.”

    “미친놈들.”

    유일한 여성 소대원인 소리아는 동료들의 낯선 모습에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다음날.

    부대에 이브릴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바네트 소위가 군단장을 꼬시려다가 실패해 최전방으로 보내진 것이다.’

    당연히 이런 소식은 1소대원들의 귀에도 들려왔고 그들은 하나같이 의아하단 반응을 보였다.

    “잠깐 보긴 했지만, 그런 스타일로는 안 느껴지던데.”

    “그러게.”

    “그것 때문에 대대장과 고위 장교들이 바네트 소위를 노골적으로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대.”

    원래 호감을 품은 상대에게 안 좋은 이야기가 들려오면 편들고 싶어지는 법.

    1소대원들은 그녀에 대해 잘 모름에도 무심코 소문이 잘못된 것이라 치부하며, 그녀를 두둔했다.

    “감사합니다만 너무 신경 써주실 필요 없습니다. 괜히 여러분만 곤란해질 테니까요. 어차피 뜬 소문이니 금방 수그러들 겁니다.”

    하지만 이브릴의 바람대로 소문이 잦아드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지나갈 때면 병사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자기들끼리 웃고, 고위 장교 중엔 어린 게 더럽게 산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럿이 매도하니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건 쉽네.”

    그녀를 만나고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1소대원들은 지금의 상황이 너무 불쾌하게 느껴졌다.

    가장 분개한 사람은 의외로 여성 소대원인 소리아였는데, 그녀는 소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대장에게 항의하자고 제안했다.

    비록 자신들의 계급은 소위에 지나지 않지만, 기사 작위를 가진 데다가 기간트의 오너였으니, 항의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란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호의는 괜히 일을 크게 만들 필요 없다는 이브릴의 거절에 가로막혔다.

    “바네트 소위는 강한 사람이야.”

    “내가 보기엔 고집이 너무 세.”

    “힘든 건 본인일 텐데.”

    도와주곤 싶지만 정작 본인이 거절하니 1소대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 ‘의외’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처럼 가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곤 하는데, 그날이 바로 그랬다.

    임무가 끝나고 복귀 신고를 위해 본부로 향하던 기갑 1소대원들은 어수선해진 대대 분위기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아르비스 공작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대대장님께서 장교들을 모두 집합시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어서 대대장실로 가보세요.”

    행정 부사관의 이야기에 그들은 기겁하며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대대장실 앞에는 이미 많은 수의 장교들이 도착한 상태.

    하지만 그중에 바네트 소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네트 소위는 어딨습니까?”

    “대대장님께서 대기를 지시하셨네.”

    “네? 왜요?”

    “왜긴, 왜야. 혹시라도 공작 전하에게 이상한 말을 할까 봐 그러지.”

    2소대 상황 장교의 이야기에 1소대원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때마침 이어진 입실 명령에 그들은 부랴부랴 복장을 점검하곤 대대장실에 들어서야 했다.

    “충성!”

    쓸데없이 넓은 대대장실은 무려 40명에 다다르는 장교들이 입실하고도 공간이 넉넉았다.

    눈치껏 오와 열을 맞춰 자리를 잡은 장교들은 그제야 대대장이 열심히 손을 비비고 있는 금발 청안의 청년을 볼 수 있었다.

    “저희 부대의 장교들입니다. 부디 훈화 한 말씀 남겨주시지요. 평생의 영광일 겁니다.”

    “그래서 불러 모은 겁니까?”

    아르비스 공작의 별것 아닌 물음에 괜히 모두가 긴장하고, 대대장은 더욱 빠르게 손을 비볐다.

    보통 귀족들은 이런 훈화를 위장한 잘난척을 좋아하는데, 적어도 그건 아르비스 공작과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뭐, 좋습니다. 마침 이 부대 장교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온 것이니.”

    “그, 그렇습니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용무.

    자신들의 부대에 아르비스 공작이 만나러 올 만한 사람이 있나 싶어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장교들을 살펴보던 아르비스 공작의 미간이 좁혀졌다.

    뭔가 쎄한 느낌.

    “이브 없는데?”

    그때, 아르비스 공작의 바로 옆에서 하늘색의 머리카락과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닌 절세의 미녀가 나타났다.

    감히 접해본 적 없는 절대미.

    아르비스 공작 정도라면 저런 여인을 데리고 있는 것도 이해되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미인의 등장은 대대장실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렸다.

    “실례했습니다. 제 약혼녀인데, 외모가 너무 튀어서 마법으로 숨어있었거든요.”

    그건 튀는 수준의 외모가 아니었다.

    장교들은 괜히 실수를 저지를까, 그녀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제가 만나러 온 장교는 없네요.”

    “네?”

    이어진 아르비스 공작의 말은 대대장 실의 분위기를 충격을 넘어 공포로 물들이기 충분했다.

    “이브릴 바네트 소위라고 이 부대에 배치되지 않았나요?”

    “바, 바네트 소위라면···.”

    “제 양녀나 마찬가지인 아이인데, 폐 끼치는 걸 싫어해서 저의 이름을 잘 안 팔거든요.”

    대대장을 포함해 많은 장교들이 비틀거리고, 1소대원들은 헛바람을 삼켰다.

    국경지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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