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점 마법사-86화 (86/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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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면면을 살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엘프.”

    슬쩍 고개를 돌리니 본래의 컨디션을 찾은 루시엘라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엘프들의 시선은 그녀가 아닌 나에게 집중된 상태.

    머리에 작은 왕관을 쓴 18살 정도 돼 보이는 여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인간 주제에 놀랍군. 대체 무슨 힘이지?”

    한껏 위에서 내려보는 시선.

    나는 그녀가 이프리트를 소환한 인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뭐,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지만.

    그나저나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고 정령왕까지 소환하는 것을 보면, 그녀가 엘프 여왕이라 보는 것이 맞을까?

    “저는 누군가를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요? 어떻게 오셨죠?”

    그에 피식 웃음을 흘린, 엘프 여왕이 말했다.

    “설마 천공성이 소환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이거 수고를 덜어줘서 고맙다고 해야겠군.”

    “누가 보면 이 성이 여러분 건 줄 알겠습니다.”

    “이 천공성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이 남겨준 하이랜드의 자산이지.”

    “현재 이 성의 소유권은 제게 있습니다. 그만들 돌아가시죠.”

    언령과 막대한 마력을 손에 넣은 지금이라면 9클래스 마법사와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론이 그렇다고 해서 실전도 같으리란 보장은 없다.

    역시 9클래스와 동급으로 치부되는 정령왕을 상대하는 것은 부담될 수밖에 없는 일.

    더구나 그녀 뒤에 있는 두 명의 8클래스 대마법사와 한 명의 상급 소드마스터로 부하들이 상대하기엔 쉽지 않은 상대들이었다.

    “이젠 아니지. 이 성은 결코 인간들에게 넘겨 줄 수 없다.”

    단호한 그녀의 반응에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죽을 텐데요?”

    엘프 여왕은 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냈다.

    “이걸로 대답이 됐겠지.”

    그녀가 그대로 구슬을 쪼개자 공간 좌표가 엉망이 되었다.

    도주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텔레포트 방해진을 펼친 것이다.

    그녀의 행동에 나는 혀를 차며 팔목에 찬 휴대용 단말에 지시를 내렸다.

    “해당 좌표 공간이동 방해 기능실시.”

    [해당 좌표 내 저공 위성의 공간이동 방해기능을 실행합니다.]

    “그쪽이야말로 불리해지면 마법 해제하고 도망칠 생각 마시죠.”

    공간이동 방해엔 공간이동 방해로 답했다.

    이프리트의 존재를 믿는지 의기양양하던 그녀의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정령왕을 보고도 싸울 생각인가?”

    나도 정령왕 소환자와 싸우게 될 날이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필요하다면 싸워야지.

    애초에 얌전히 보내줄 스타일도 아닌 것 같은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에게 패하신다면 여러분은 다크엘프의 전철을 밟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들이 긴장하길 바라며 내뱉은 대사였다.

    “······그렇군, 네 녀석이었나? 케일론 왕국의 힘만으로 다크엘프 정예를 물리쳤다는 게 납득이 안 됐는데.”

    하지만 어째 경각심만 심어주고 말았다.

    역시 심리전은 나랑 안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더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지.”

    더는 전투를 물릴 방법이 없었다.

    나는 분위기가 바뀐 엘프들을 보며 코어의 마력을 끌어 올렸다.

    “위성 아끼지 말고 쓰세요.”

    “네.”

    내 지시에 보조 단말을 지닌 헤르만과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이 수는 적지만, 전력상으론 우리보다 우위에 있다.

    하지만 이곳은 다크엘프 여왕을 잡을 때처럼 철저히 우리를 위한 홈그라운드.

    전투에 큰 도움이 되는 장치들을 많이 마련해 둔 상태이기 때문에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힐끔 루시엘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인물 중 가장 약했기에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엘프가 끼어 있군.”

    여왕은 귀신같이 로브를 뒤집어쓴 루시엘라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생각해보면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 가장 난처한 입장에 놓인 인물은 그녀일 것이다.

    “하긴, 엘프가 있어야 이 성을 소환할 수 있으니···. 배신자인가?”

    “제 포로입니다.”

    “포로치곤, 상당히 대우가 좋아 보이는데?”

    “신경 끄시죠.”

    엘프 여왕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루시엘라의 존재를 무시하며 허공에 손을 들었다.

    그에 거대한 피닉스의 형태를 한 이프리트의 크기가 서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섬으로 피해 계세요.”

    내 지시에 루시엘라는 멈칫했다.

    “왜 그래요?”

    “아냐.”

    하지만 그녀는 곧 나의 지시에 따라 도망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루시엘라의 반응까지 일일이 신경 쓸 순 없었다.

    나는 작은 우주를 이루고 있는 코어의 마력을 끌어올려 전신을 감쌌고, 대마법사와 마스터들도 태세를 갖췄다.

    바닥에 검붉은 문이 열리며, 마도시대 기간트 3대가 튀어나왔다.

    그랜달과 이카로스, 드래곤의 레어에서 얻은 샤벨타이거까지.

    함께 자리했던 최상급 익스퍼트의 오너들이 기간트에 탑승하면서 우리의 전투 준비는 끝이 났다.

    그리고 이어진 눈치싸움.

    내가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자, 엘프 여왕이 앞으로 나섰다.

    “느껴지는 기운은 8클래스 같은데, 일반적인 마법사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군.”

    머리 위로 진홍빛의 구슬을 다발로 띄운 그녀를 보며 나도 양손에 구슬처럼 압축한 헬파이어를 만들었다.

    “아르비스란 이름이었지?”

    아까 다크엘프의 이야기로 케일론과 관계있는 사람이라고 밝혀졌기 때문인지, 어렵지 않게 내 이름을 유추해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내 외모가 아르비스 공작 그 자체긴 했지만 말이다.

    “설마 전투 전에 이름 밝히고 싸워야 합니까? 먼저 헬파이어 날려 놓고?”

    내 이죽거림에 엘프 여왕은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말이 길었어.”

    하지만 매혹적인 미소와 별개로 이프리트가 아가리를 쭉 벌리며 날개를 펼쳤다.

    “힘의 차이를 보여주지.”

    이프리트가 날개를 펄럭이자 화염 폭풍과 함께 진홍빛의 구슬들이 날아들었다.

    나는 오히려 그 공격을 향해 나아가며 외쳤다.

    “비켜!”

    그에 정령왕의 공격이 나를 맞추지 못하고 양옆을 스쳐 지나갔다.

    뻥 뚫린 정면.

    나는 응축된 헬파이어를 날렸다.

    키엑!

    그러나 이프리트가 응축된 헬파이어를 집어삼켰다.

    헬파이어는 그대로 이프리트의 몸속에서 폭발이 일으켰지만, 역시 같은 불속성의 상위체라 그런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원래부터 예상하고 있던 부분.

    응축된 헬파이어는 견제공격이라 큰 기대를 안 했다.

    “죽어!”

    9클래스의 죽음을 명령하는 ‘파워 워드 킬’을 흉내 낸 공격.

    내 언령에 엘프 여왕의 고개가 뒤로 제쳐졌지만, 입술을 타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릴 뿐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역시, 그녀 정도 되는 인물에겐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놀랍군.”

    엘프 여왕이 입가의 피를 훔치며 눈을 가늘게 뜨자, 그녀를 뒤덮은 이프리트의 불꽃이 확산하며 나를 덮쳤다.

    쿵! 쿵!

    그러나 나를 감싼 붉은 마력이 가시가 되어 불꽃을 꿰뚫고는 여왕을 향해 맹렬히 날아갔다.

    “도무지 공격 패턴을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군.”

    붉은 가시가 그녀에게 닿기 직전.

    이프리트가 날개로 여왕을 감쌌다.

    쾅! 쾅!

    이프리트의 몸체는 내구도가 다른 모양이다.

    가시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왔다.

    파아앗!

    그리고 여왕을 보호하던 이프리트가 아가리를 벌리자 집채만 한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피하기엔 너무 가까웠고, 브레스의 범위도 컸다.

    나는 즉시 코어 마력을 쏟아부어 거대한 검을 만들어 휘둘렀다.

    붉은 검기가 채찍처럼 늘어나며 브레스와 충돌했다.

    “베어라.”

    내 언령에 붉은 검기가 더욱 덩치를 키우더니, 결국 브레스를 갈라버렸다.

    키에에에엑!

    이프리트의 소름 끼치는 비명이 대기를 뒤흔들었다.

    ***

    리모트 랜드.

    “더러운 몬스터 새끼들!”

    다크엘프들은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오크, 라이칸스로프들을 상대하며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질렀다.

    한 놈을 죽이면 다른 녀석이 빈자리를 채우고, 또 한 놈을 죽이면 다른 녀석이 빈자리를 채운다.

    그야말로 육탄 쓰나미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소모전을 앞세운 전투가 지속되다 보니, 숫자가 적은 다크엘프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오랜 세월 일궈온 영역의 3할을 빼앗기고 말았다.

    척박한 리모트 랜드에서 선조들이 기틀을 닦은 영역을 빼앗긴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몬스터 국가의 침공은 현재진행형이었기에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뒈져, 뒈져라!”

    기간트 같은 고급 마도병기는 없지만, 여기저기서 오러블레이드와 대마법이 작렬하는 만큼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공방전.

    하나하나가 인간의 제국에 버금가는 전력을 지닌 오크와 라이칸스로프의 국가를 상대하면서도, 여왕을 비롯한 주력을 잃은 다크엘프의 저력이 대단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병력을 다음 요새로 물리도록 하죠.”

    신임 여왕인 카밀리아의 지시에 다크엘크 최강의 전사 타르니스 장로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후퇴를 위한 깃발을 올리려던 찰나.

    전신을 저릿하게 만드는 위압감에 여왕과 장로는 눈을 크게 뜨며 하늘을 올려 보았다.

    흐릿한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하고,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인위적이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욕설, 포효로 가득했던 전장은 서서히 침묵에 물들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고개를 들었다.

    후우욱! 후우욱! 후우욱!

    와이번이나 드레이크 등 피막 날개를 가진 몬스터 특유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어째 소리가 대기 전체를 울릴 만큼 크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바람이 전신을 짓눌렀다.

    키아아아아악!

    서서히 먹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육신.

    그리고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포효가 울려 퍼지자 전장의 모든 병사가 정신을 잃고 풀썩 쓰러졌다.

    [시끄러운 녀석들이군.]

    마스터조차 힘겹게 바닥에 몸을 붙이고 있는 와중에 머릿속에 파고드는 차가운 음성이 카밀리아와 타르니스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붉은 비늘을 갑옷처럼 두른 거체는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잠시 후, 기절했던 병사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하자 전장은 곧 아비규환이 되었다.

    “어쩌면 저희에겐 다행일 수도 있겠습니다.”

    타르니스 장로의 말에 떨림이 멈추지 않는 자신의 손을 움켜쥔 카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무서운 정전 사유군요.”

    *

    32. 드래곤

    천공성을 재앙의 성이라 부르는 진정한 이유.

    그것은 바로 천공성이 나타나는 곳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콰콰콰!

    키에에에엑!

    이프리트의 불꽃이 하늘을 뒤덮고, 루이스의 손짓에 붉게 물든 하늘이 갈라진다.

    루이스와 엘프 여왕의 전투는 그야말로 급이 달랐다.

    엘프 여왕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이랜드 최강으로 분류되는 인물.

    그런 존재와 대등하게 전투를 이어가는 인간이 있다니 엘프 입장에선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전투로 대기는 끊임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어찌 인간이···.”

    엘븐 킹덤의 장로 중 한 명인 마법청장 오스카는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엘프 여왕과 루이스의 전투는 말할 것도 없고, 장로들을 막아서는 적의 전력 또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

    3대의 기간트만 해도 귀찮은데 12명의 초인은 무장이 잘 되어 있었으며 특히 오러에 속성을 부여하는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의 존재는 굉장히 거슬렸다.

    휘익!

    “오스카 장로!”

    “알고 있네!”

    그리고 수시로 하늘에서 날아오는 자폭위성의 존재는 큰 위협이었다.

    콰아아아앙!

    다른 장로와 힘을 합쳐 헬파이어 자폭위성을 막아낸 오스카 장로는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천공성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너무 급히 움직였다.

    최소한 장로 몇을 더 모아오던가, 7클래스 대마법사와 마스터들을 소집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만약을 이야기해봤자 뒤늦은 후회일 뿐이다.

    솔직히 자신도 처음엔 정령왕 계약자인 엘프여왕이 직접 나섰으니, 드래곤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위기는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은 용호상박.

    여왕과 루이스의 전투에 따라 결과가 정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허공에 핏빛의 거대한 기운과 이프리트의 불꽃이 충돌하고 그로 인한 충격파와 파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쿵! 쿵! 쿵!

    두 사람의 전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파괴력을 더해갔는데, 덩달아 주변에 미치는 영향도 커졌다.

    서걱.

    콰아아앙.

    그러다가 눈먼 공격이 날아들면 모두가 기겁하며 피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충돌할 때마다 발생하는 파편은 하나하나가 대마법에 비견되었다.

    덕분에 여왕과 루이스의 전투가 치열해져 갈수록 장로와 루이스의 부하들은 쉽게 부딪히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쾅!

    다시금 붉은 마력 덩어리와 이프리트의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자리를 피하던 오스카 장로는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어?”

    이프리트의 존재로 엄청난 열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구름의 양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파아아악!

    여왕과 루이스의 기운을 짓누르는 불의 파도가 짙은 구름을 뚫고 밀려왔다.

    드래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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