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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마법사-85화 (8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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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꾹 닫은 루시엘라가 손에 힘을 주자 새하얀 피부 위로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어서 그녀가 작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뒤에 대기한 병력에 사인을 보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전투 준비에 들어가고 마스터와 대마법사들이 내 뒤에 줄지어 섰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고 루시엘라의 하늘색 머리와 새하얀 로브 자락이 펄럭인다.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주문을 외우는 그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지만, 나는 천공성의 등장을 기다리며 하늘만 바라보았다.

이어서 루시엘라의 주문이 끝나고, 긴장감을 떨치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뭐지?”

하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도 당황하고 루시엘라도 당황하고, 모든 사람이 당황했다.

설마 책에서 말하는 엘프가 지금의 분류로 하이엘프에 속하는 존재인 걸까?

만약 하이엘프의 피가 필요하다면 일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하이엘프라면 여왕과 소수의 장로뿐이었으니.

“주군!”

“네?”

거칠게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당황한 스텔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스스스.

항상 내 허리춤에 걸려 있던 단검이 허공에 떠오르며, 루시엘라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루시엘라의 손바닥을 적신 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루시엘라의 상처 부위를 통해 많은 피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힐!”

출혈의 양이 상당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즉시 루시엘라의 상처를 치료했다.

설마 필요로 하는 피가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본다느니 하는 생각 따윈 없었다.

잠깐 사이 상당한 피를 빼앗긴 루시엘라가 창백해진 얼굴로 털썩 주저앉고, 나는 얼른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고마워, 스스로 치료할 수가 없더라고.”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루시엘라에게 리저렉션을 사용했다.

안색이 돌아온 그녀는 창피한지 괜히 얼굴을 붉혔지만, 허공에 떠오른 단검이 이상 징후를 보인 탓에 마른 침을 삼켜야 했다.

끈적한 기운과 비릿한 혈향을 풍기는 단검.

그 모습은 지금까지 보아온 멋들어진 마도시대의 유적이나 유물과 다른 흑마법을 연상시켰다.

핏!

이어서 붉은 기운이 한데 뭉쳐지더니 새빨간 섬광이 되어 하늘로 수직으로 상승했다.

고고고고!

그리고 지진이라도 난 듯, 주변의 모든 것이 요동쳤다.

“천공성···.”

마치 기간트가 아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처럼 허공에 거대한 문이 열리더니, 아르비스 영주성보다 거대한 천공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

현재 엘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 문제는 바로 마도제국의 기술력 복원이다.

그들은 선조들이 남긴 자료를 활용하여 미드랜드에 남아있는 마도제국의 유적을 찾아 나섰고, 결과적으로 적지 않은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엘프들은 미드랜드에 존재하는 마도제국의 유물이 후손인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했기에 필요하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인간을 죽이고 강탈했다.

그 과정에 죄책감 따윈 없었으며, 오히려 인간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했다.

“폐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엘프 퀸은 함께 차를 마시던 마법청 청장의 뜬금없는 물음에 의문을 표했다.

“무엇이 말인가?”

“현재 돌아가는 정세 말입니다.”

자세히 이야기해보라는 여왕의 모습에 청장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저희가 열심히 과거의 문헌을 수집하고 정보를 정리하며 유적을 찾아 나섰음에도 온전한 형태로 손에 넣은 것은 병기고와 보급고 두 개뿐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인간들의 손에 넘어간 유적들을 떠올리면 너무 공교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들의 자료를 바탕으로 유적을 찾아다니다 보면 당연히 당첨보단 꽝이 많았다.

그리고 당첨이라 하더라도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얻을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그의 말대로 인간들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중요 유물과 유적을 떠올리면 뭔가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칼바도스 제국의 손에 넘어간 기간트, 마드세인이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병기고, 정확하게 종류가 파악되지 않은 케일론 왕국의 유물까지. 마치 우리의 손을 피해 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

“그 전까지 인간들이 자잘한 유물이나 파괴된 유적들을 얻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렇게 제대로 기능하는 유적을 연달아 손에 넣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놓친 정박장도 인간들의 손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지.”

덕분에 인간들과의 기술력 차이를 벌이긴커녕 더욱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기술력으로 미드랜드를 압도하여 혹시 모를 인간의 확장에 대비하는 것.

그때가 되면 굳이 미드랜드에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안위엔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또한, 엘프들은 굳이 미드랜드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은 없었다.

필요 이상으로 설치다간 자칫 드래곤들이 개입할 빌미를 줄 수 있으니.

물론 감시는 계속 진행할 것이고 자신들의 안위에 위협이 된다면 적절히 제재할 순 있지만 그게 미드랜드 진출의 명분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인간들의 성장은 너무도 위협적이었다.

아직은 하이랜드가 우위에 있지만, 이미 기간트 양산이 가능한 국가가 두 곳이나 존재하지 않는가.

더구나 위스워드와 칼바도스가 동맹을 맺으면서 인간 국가들의 기술경쟁은 점점 불이 붙을 것이다.

“그래도 이걸 누군가의 계략으로 치부할 순 없다. 그저 공교롭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지.”

“그렇지만 드래곤들도 너무 잠잠하지 않습니까? 그들도 인간이 필요 이상의 힘을 얻는 건 원치 않을 텐데요.”

엘프들은 선조들이 무엇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알기에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어떨까?

만약 그만한 힘을 손에 넣는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외부로 힘을 표출하려 할 터.

그건 지금까지 보인 인간들의 성향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음···.”

“드래곤들의 힘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마도제국과의 전쟁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니까요. 차라리 조기에 나서서 인간들을 제한했다면, 저희도 이렇게 기술발전에 열을 낼 필요도 없겠죠.”

“드래곤들의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성룡급 드래곤 3마리나 에이션트 드래곤 1마리만 나서도 현재 하이랜드를 멸망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 말은 즉, 미드랜드 역시 마찬가지란 소리.

차라리 드래곤들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주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인간 쪽으로 좋게 돌아가는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유적을 대륙 곳곳에 적절히 나눠 기술발전에 열을 올리게끔 경쟁을 시키고, 드래곤들이 나서지 못하게 제한한다?

여신 가이아가 나서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다.

당연히 여신이 그럴 이유도 없지만 말이다.

마법청장은 자신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지금의 정세는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지이잉.

그런데 그때.

엘프 여왕의 목걸이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요?”

마법청장의 물음에 굳은 표정의 엘프 여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수가···.”

“네?”

“지금 성에 있는 장로가 누구인가.”

“행정청장과 기술청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장 데려오도록.”

영문을 모르는 마법청장이 주춤거리자 여왕은 드물게 성을 내며 소리쳤다.

“어서!”

“아, 알겠습니다!”

그가 황급히 집무실을 벗어나자 홀로 남은 여왕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어찌 브릴란테의 보고가···.”

***

나는 하늘에 뜬 새하얀 성을 보며 긴장했다.

설마 다짜고짜 공격하진 않겠지?

재앙의 성이란 칭호와 많은 피를 흘리게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느끼지 못했다.

“루시엘라, 성을 가까이 이동시킬 수 있어요?”

“해볼게.”

내 물음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앞에 부유하는 단검을 움켜쥐었다.

잠시 후, 다르니스 천공성이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구구구구.

어떤 원리로 허공에 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거대한 천공성이 지상과 가까워지자 다시금 지진이라도 난 듯 주변이 심하게 요동쳤다.

“안 되겠네요. 저희가 올라가 보죠.”

“응.”

천공성은 머리 위, 100미터 지점에 떠 있었다.

나는 루시엘라와 초인들, 마도시대 기간트를 배정받은 최상급 익스퍼트 3명을 데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도시대 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색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성은 바닥에 거대한 추진체 같은 것이 붙어있었으며, 벽면은 창문 하나 없이 매끈했다.

별다른 방해 없이 천공성의 첨탑을 딛고 섰는데, 어디에도 내부로 들어가는 출구가 보이지 않아 난감했다.

“루시엘라, 출입문 어딨어요?”

“찾아볼게.”

지금의 루시엘라는 마나의 언약으로 내 지시 없이는 천공성에 어떤 명령도 내릴 수 없는 상태다.

그녀는 별다른 불만 없이 충실하게 내 말을 따랐다.

루시엘라가 붉은 기운을 풀풀 풍기는 단검을 쥔 채 눈을 감자, 천공성 중간에 위치한 성체가 파란빛으로 물들었다.

표시가 좀 과하긴 하지만 출입구의 위치를 알았으니 그곳으로 이동했다.

“뭔가 무시무시한 등장과 달리 평화로운 느낌인데요?”

외부의 모든 게 새하얀 금속으로 만들어져서인지, 마치 성역에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도 제국은 참 이 금속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안에 뭐가 있을지 기대가 되는군요.”

마치 유원지에 온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헤르만의 얼굴에 스텔라가 웩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다르니스 천공성이 마도제국의 보고라 불리는 만큼, 지금까지와 비교되지 않는 물건들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나도 내색을 안 할 뿐, 마음은 굉장히 설렜다.

파란색으로 빛나는 건물로 다가가자 검은색의 커다란 문이 생성되고, 그 안쪽으로 조명들이 일제히 켜지면서 우리의 방문을 환영했다.

하지만 우리는 유적 안으로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주군!”

“알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머리 위에서 헬파이어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쾅!

나는 즉시 언령을 사용해 헬파이어를 방어해냈다.

설마, 다른 누군가가 난입해올 줄이야.

외딴 섬을 소환장소로 잡은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여러모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루시엘라, 천공성에 방어능력 있죠?”

“있어.”

“저희 외에 침입자들을 배제하세요.”

“알았어.”

어차피 이곳은 마도시대의 정수가 깃든 유적.

자체 방어능력은 정박장을 상회 하는 수준일 게 분명하다.

타이밍은 제법 좋았지만, 침입자들의 행동은 결국 불나방이나 다름이 없었다.

“뭐, 뭐지? 황가의 문장 소유자는 공격 대상으로 지정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루시엘라의 대답은 내 기대를 가볍게 짓밟았다.

그리고 그때.

“!!!!!”

하늘에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키에에에에엑!

고막에 파고들어 전신을 저릿하게 만드는 강력한 피어.

하늘이 온통 불꽃으로 뒤덮이고.

진홍색의 거대한 피닉스가 날개를 펼치자 불의 비가 쏟아졌다.

“이프리트···.”

몸을 덜덜 떨며 내뱉은 루시엘라의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이프리트란 불의 정령왕을 뜻하는 이름이니.

9클래스, 그랜드 마스터에 비견되는 능력의 발현이었다.

“빌어먹을!”

이거 일이 아주 이상하게 돌아간다.

초인이라 일컬어지는 마스터와 대마법사조차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루시엘라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불규칙한 호흡을 이어갔다.

나는 코어의 마력을 한껏 끌어올리며 이프리트를 노려보며 외쳤다.

“꺼져라!”

파앗!

내 의지가 담긴 언령에 거대한 피닉스의 머리가 거칠게 뒤로 꺾였다.

동시에 하늘을 뒤덮은 불이 사라지고, 피어의 압박에서 해방된 동료들이 몸을 일으켰다.

기이한 방향으로 고개가 꺾였던 이프리트가 광포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하늘에서 4명의 남녀가 내려왔다.

천공성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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