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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는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마법사들이 즐기던 보드게임을 바라보았다.
“체스를 아시오? 아직 위스워드엔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체크무늬 판 위에 흑석과 백석으로 만든 멋들어진 말들이 놓여 있다.
“그, 그야.”
킹, 퀸, 비숍, 나이트, 룩, 폰.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것과 너무도 똑같은 게임에 제이드는 당황하며 물었다.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압니까?”
마법사들은 음유시인이 노래를 하다말고 달려와 그런 걸 묻는 게 의아했다.
“제이드, 이게 무슨 짓이야.”
“놔!”
사장이 뒤에서 다가와 말렸음에도 제이드는 사장을 밀치며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이 게임 만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인가요?”
테이블의 체스를 두던 손님들은 모두 고위마법사로 작은 왕국에서라면 충분히 작위를 받을 수 있는 위치다.
제이드가 감히 이런 태도를 보여선 안 되는 상대지만, 마법사들은 그에게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순순히 답을 해주었다.
“체스를 만든 사람은 마드세인 왕국의 아르비스 공작으로 알고 있소.”
“아르비스 공작?”
최고위 작위를 지닌 인물이 거론되자 그는 움찔거렸다.
더구나 아르비스 공작이라니,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다.
“그럴 수밖에, 요즘 한창 대륙을 떠들썩하게 하는 8클래스의 대마법사이니.”
자신과 거리가 먼 천상계의 이야기.
제이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런 제이드를 힐끔 바라본 마법사들은 이내 관심을 끄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8클래스가 확실해?”
“얼마 전에 칼바도스 제국의 국경성을 헬파이어로 날렸다는군.”
“허, 정말? 왜?”
“수련 때문에 공식 석상에 3개월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 사이 칼바도스에서 아르비스 공작이 죽었다는 소문을 냈거든.”
“용케 전쟁이 안 났네.”
사장은 마법사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는 굳어 있는 제이드를 끌고 물러났다.
“이게 무슨 짓이야! 미쳤어?”
사장의 호통에 제이드는 말했다.
“아르비스 공작, 지구인이 분명해.”
“지, 뭐?”
“아르비스 공작이 나와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이 분명하다고! 저 게임은 내 고향에서 하던 게임이니까!”
“그게 뭔 소리야?”
사장은 좀처럼 제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각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제이드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결국 제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장의 어깨를 짚었다.
“안 되겠어.”
“뭐?”
“나 오늘은 쉴게. 머리가 너무 아프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레스토랑에 방문한 손님 중 상당수가 제이드를 보기 위함이었지만, 사장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정상이라 보기 힘들었으니.
“미안.”
짧은 사과와 함께 가게를 나서는 제이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사장은 작게 혀를 찼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런 사장의 태도를 신경 쓰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터덜터덜 자신의 집으로 향하던 제이드가 거칠게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했다.
“착각? 아니, 착각이 아니야. 체스의 디자인과 배치까지 너무 똑같잖아. 우연일 수가 없어.”
자신과 같은 사람이 이 세계에 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르비스 공작이라.”
동향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너무 놀란 나머지, 그 마법사들에게 아르비스 공작에 대해 더 묻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요즘 한창 대륙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8클래스의 마법사···.’
문뜩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린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라면 아리아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제이드는 로이아스 대륙 사람이 아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다름 아닌 지구.
미국에서 태어난 재미교포 2세로, 제법 유명한 가수였다.
그는 공연을 위해 한국으로 향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를 당했는데, 깨어나고 보니 로이아스 대륙이었다.
어쩌다가 이곳에 떨어지게 된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주변에 잡동사니만 쌓여 있을 뿐, 다른 생존자는 없었다.
그나마 운이 좋아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마을을 발견해 개죽음당하는 일은 면했지만, 이곳이 지구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제이드는 절망에 빠져 거의 1년을 폐인처럼 살았다.
그런 제이드가 재기할 수 있던 이유가 현재 그의 연인인 아리아 덕분이다.
아리아를 통해 말을 깨우치고, 로이아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또한 심장병에 걸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면서, 삶에 대한 집착에 발버둥 치는 그녀의 모습이 제이드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리아는 부모가 병으로 죽고 본인 또한 심장병에 걸려 쇠약한 몸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너그러운 마을 사람들이라 해도 아리아를 피할 수밖에 없었고 의지할 곳 없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빠지는 것은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지만, 한사람으로 인해 마음을 위로받고 행복이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제이드는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행복과 반비례해 시간이 지날수록 아리아의 상태는 서서히 나빠졌고, 그녀의 치료를 위해 도시로 거처를 옮기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아리아, 나왔어.”
집에 돌아온 제이드는 아리아의 간병인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안방에 들어서니 침대에 누워 있던 아리아가 웃으며 자신을 반겨 주었다.
“오늘은 빨리 왔네?”
뺨은 홀쭉하고 탐스럽던 금발은 색을 잃고 푸석푸석했다.
그럼에도 하루의 피로를 날리는 아리아의 미소는 제이드에게 그녀를 치료하고 말겠다는 일념을 심어주었다.
“나 아리아를 치료할 방법을 찾은 것 같아.”
제이드의 말에 아리아는 해실 웃으며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
삶에 대한 집착이 서서히 약해지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제이드가 내뱉은 말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아니, 치료할 수 있어. 내가 꼭 건강한 모습으로 돌려줄게.”
강력한 의지가 느껴지는 그의 눈빛에 아리아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어젯밤 실비아에게 건네받은 고서적을 탐독하던 나는 한 대목에서 고민했다.
[다르니스 천공성은 브릴란테 제국의 보고로 드래곤의 공격에 대비하여 다른 차원에 숨어있다. 그런 천공성을 호출하기 위해선 열쇠와 ‘엘프의 피’가 필요하다.]
엘프의 피만이라면 어떻게든 구할 순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성엔 이미 엘프가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소환 방법은 열쇠에 피를 묻힌 엘프가 해당 주문을 외우면 된다. (주문 중략) 천공성은 소환자가 명령권을 가지며, 명령권의 양도는 불가능하다.]
천공성을 손에 넣기 위해선 피만이 아닌 엘프 본인의 협조가 필요한데, 그 엘프가 천공성의 명령권을 갖게 되므로 절대로 다른 생각을 해선 안 된다는 뜻이 아닌가.
루시엘라에겐 친밀감을 느끼고 관계도 많이 개선 되었지만, 천공성 정도 되는 마도시대의 유물을 보고도 내게 협조할지는 미지수다.
엘프들은 인간을 위협적인 존재라 느끼고 있고, 마도시대의 유물 획득에 굉장히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왠지 개인보단 종족의 목표와 안위를 우선으로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의 언약을 활용하여 제한을 걸면 되긴 하는데, 루시엘라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해줄 이유가 없었다.
“끙···.”
고민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내 조상 중에 엘프가 있는 것 같다고 루시엘라가 말했지? 내 피도 먹힐까?”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내서 단검에 묻혀 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을 외워 봤는데.
“······.”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괜한 생쇼에 무안해진 나는 책을 덮으며 고민했다.
엘프 하나 잡아다가 세뇌해야 하나?
루시엘라가 아닌 다른 엘프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머릿속을 휘저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데미안이 있지.
엘프 마을에 조용히 처박혀서 내게 정보를 팔고 있는 그 녀석이라면 가능하려나?
아니면 녀석을 이용해 엘프 하나를 끌어들이는 것도 방법이다.
루시엘라가 내 생각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입장이 반대였다면 엘프도 같은 짓을 하지 않을까?
로이아스 대륙의 엘프는 이야기 속에서처럼 고고하진 않았다.
오히려 인간에 가까운 현실적인 종족.
불필요한 욕심을 부리진 않아도 정한 목표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데미안을 이용해서 엘프 하나 잡아 와야겠군.”
결국. 지금의 상황에 맞춰 현실적인 판단을 할 뿐이다.
딱 봐도 마도제국의 보고라는 칭호가 달려있고, 가장 구하기 힘든 키를 갖고 있는데 지켜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똑똑.
“뭐해?”
데미안과 연결된 퍼밀리어에게 지시를 내리려던 찰나.
공교롭게 루시엘라가 나를 찾아왔다.
눈을 껌벅거린 나는 당당하게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는 루시엘라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엘프 하나 납치할 계획 새우고 있었어요.”
그리고 뜬금없는 내 이야기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갖고 싶은 게 있는데, 엘프의 힘이 필요해서요.”
“그럼 나한테 말하면 되지.”
왜 그런 걸로 쓸데없는 계획을 세우느냐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게 마도시대 유적인데도요?”
“어?”
루시엘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눈치챘잖아요. 제가 마도시대 유물이나 유적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엘프들의 칼바도스의 습격 사건 때, 기간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었다.
또한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내 능력을 보면 어떤 식이든 마도제국와 연관이 있음을 모를 수가 없다.
“엘프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면 보통의 유적이 아니겠네.”
“글쎄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째려보았다.
“그리고 잡아 온 엘프는 쓰고 버리는 말이겠고.”
“그렇게 되겠죠.”
너무도 솔직한 대답에 루시엘라는 앓는 소리를 냈다.
“잘도 내 앞에서 그런 소릴 하는구나?”
“루시엘라의 눈치 볼 필요 있나요?”
차가운 반응에 루시엘라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나는 슬쩍 떠보듯 말했다.
“이런 제 행동이 싫으면 루시엘라가 도와주시던가요.”
데미안을 활용해 엘프를 빼내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런 방법을 활용하면 유일한 엘프 정보책이 사라지게 된다.
역시 가장 이상적인 것은 루시엘라가 나서주는 거지만 이 경우 마나의 언약이 필수였다.
루시엘라는 내게 물었다.
“만약 우리 입장이 반대였다면 너는 네 동족을 위해 나설 거야?”
“아뇨, 가족이 아닌 이상 그럴 이유는 없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솔직히 우리도 각자의 개성이 있거든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상대에게 개입하지 않아.”
역시 인간들에게 흔히 알려진 엘프의 이미지와 현실은 달랐다.
“그 말은 제가 다른 엘프를 납치한다고 해서 루시엘라가 분노하면서 ‘가만두지 않겠다!’란 식으로 나올 이유는 없다는 뜻이군요.”
“뭐, 그렇지.”
결론은 내 마음대로 하란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뭐 좋아. 이번 일은 내가 할게. 네가 얻는 유적이 뭔지 알아야겠어.”
아무래도 자신이라도 내가 유적을 손에 넣는 것을 알아 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 봤자 그녀가 내 수중에 있는 이상 뭔가를 알게 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나야 수고를 덜어서 좋지만.
“만약을 위해서 추가로 마나의 언약을 해야 할 겁니다.”
“그래.”
이거 너무 쉽게 해결이 돼서 앞선 고민이 우스워졌다.
똑똑.
“영주님, 저 테일러입니다.”
“들어오세요.”
언제나처럼 부하가 집무실에 들어오자, 루시엘라는 자리를 피했다.
아무래도 자기 나름의 배려인 모양이다.
집무실에 들어선 테일러는 옥상정원으로 향하는 루시엘라의 뒷모습을 힐끔 바라보곤 관심을 끊었다.
역시 자기 관리가 가장 잘 되는 행정관다웠다.
“영주성 행정처에서 영주님과 동향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동향? 노라 마을 사람인가요?”
“아니요, 노라 마을 사람은 아닙니다.”
“엥?”
“그가 영주님께서 어느 문구를 보면 전부 이해할 거라면서 메모를 건네줬는데, 무시할 수가 없어서 가져왔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종이에 적힌 메시지를 읽은 순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PLEASE, HELP ME!]
거기엔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문자가 적혀있었다.
지구 출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