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점 마법사-79화 (7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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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일러 하울 준남작은 아르비스 공작가의 가신으로 마드세인 행정 아카데미에서 영입된 행정관이다.

    졸업식날 ‘조금은 평민도 살 수 있을 만한 나라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걸 아르비스 공작이 들으면서 인연을 쌓게 되었다.

    사실 아르비스 공작의 입장에선 원래부터 그를 영입할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타일러는 자신의 발언이 그의 시선을 끌게 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때문에 타일러가 생각하는 아르비스 공작은 굉장한 괴짜였다.

    자신을 영입할 때처럼 가끔은 영문모를 행동을 하는데, 실패 없이 모두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면 당혹스러울 정도다.

    “영주님, 이만 퇴근해보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들어가세요.”

    보통 귀족이라 하면 권위적이고 고지식하다는 이미지가 있으나 주군인 아르비스 공작은 그런 틀을 철저하게 부수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 같았다.

    아래 사람들에게 하대하지 않는 모습이 처음에는 이상했으나, 경우에 따라선 윽박지르는 것보다 존댓말로 조곤조곤 말하는 게 더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덕분에 요즘 여기저기서 아르비스 공작의 말투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또한 그는 ‘혁명의 영주’란 별명답게 융통성이 넘쳤는데,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많은 국민들이 매료되어 버렸다.

    타일러가 말했던 것처럼 어느새 마드세인은 평민이 살만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사람으로 인해 나라의 분위기가 이렇게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가 귀족이 되고 이제 겨우 1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그런 면에서 아르비스 공작은 테일러가 바라던 이상적인 군주라 볼 수 있다.

    평민 출신의 자수성가 귀족이라 그런지 별난 것이 특징이지만 말이다.

    “응? 헉!”

    영주의 집무실을 벗어나 퇴근하던 테일러는 성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이타루스 성왕국의 여왕을 발견하곤 급히 무릎을 꿇었다.

    “혹시 공작님께선 집무실에 계신가요?”

    설마 말을 걸어올 거라고는 예상 못 한 테일러는 놀란 눈으로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고맙습니다.”

    그리고 익숙하게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녀와 호위기사를 보며 가슴을 쓸어 넘겼다.

    설마 국왕과 대화를 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더구나 상대는 대왕국의 여왕이었다.

    뭐 때문에 대왕국의 여왕이나 되는 인물이 타국 귀족의 성을 제집처럼 드나드는지는 모르겠으나, 새삼 엄청난 미인이라 생각하며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집이나 가자.”

    어차피 그쪽은 자신이 관심을 가져선 안 되는 구역임이 분명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엔 흑발 적안의 눈동자를 가진 미남미녀가 느릿느릿 그에게 다가왔다.

    “아르비스 공작님은 집무실에 계신가?”

    “제,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고맙네.”

    성왕국의 여왕처럼 자신에게 영주의 위치를 묻는 그 두 사람은 케일론 왕국 제1 왕위 계승자인 에클로 공작과 그녀의 남편인 8클래스 대마법사 폴시스 공작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멍하니, 영주의 집무실 방향을 바라보던 테일러는 누군가가 뒤에서 찌르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그 의문이 당혹스러움으로 바뀌기까지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테, 테일러 하울 준남작이 여왕폐하를 뵙습니다.”

    바로 이 나라의 여왕이 어째서인지 드레스 위에 갈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아르비스 공작님 어디 계세요?”

    “아마도 집무실에 계실 것 같습니다. 방금 성왕국의 여왕님과 케일론 왕국의 에클로, 폴시스 공작이 방문했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녀가 상큼한 향기를 뿌리며 지나치자, 테일러는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나름 그릇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연이어 아르비스 공작을 찾는 대륙급 인사들의 등장에 새삼 자신의 주군은 격이 다른 존재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 괜히 큰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잠깐 사이 두 배는 지친 느낌이다.

    “뭐,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시겠지.”

    이제 그만 퇴근해야겠다고 생각한 테일러는 어깨를 주무르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여자 기사들을 대동한 루시엘라가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며 그를 지나쳤다.

    자신이 살면서 본 여자 중 가장 아름답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인물.

    루시엘라 또한 영주 집무실 방향으로 향하자, 테일러가 급히 말을 걸었다.

    “지금 영주님 집무실에 실비아 여왕님과 성왕국의 여왕님, 케일론의 공작님들이 와 계세요.”

    그에 걸음을 멈춘 루시엘라가 테일러를 바라보고, 이내 고개를 까딱이곤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깨를 으쓱인 테일러는 오늘따라 영주성의 복도가 길다고 생각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비로소 영주성을 벗어나니, 사람 내음이 물씬 풍기는 아르비스 공작령의 발테르 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드세인 왕국의 깃발과 아르비스 공작령의 가문기가 여기저기서 펄럭이는 대도시.

    크기는 물론 화려함까지 더한 건물들이 뉘엿뉘엿 저무는 태양의 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불과 1년 사이 소도시 발테르는 계획형 대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희망 없는 표정으로 하루 살기 바쁘던 평민들의 얼굴에 활기가 가득하고, 시의 허가를 받은 수 많은 노점들이 열심히 호객행위를 벌였다.

    시끌벅적하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마치 축제를 연상시켰다.

    이런 풍경은 아르비스 공작령이 아니라면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하는 것.

    이 멋진 도시에 자신이 손길이 더해졌다고 생각하니 절로 애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울 준남작님!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울 준남작님! 이것 좀 드시고 가시지요!”

    “아뇨, 괜찮습니다. 집에서 밥 먹을 거라서.”

    아무래도 그가 행정관이기 때문에 영주보다 영지민과 접할 기회가 많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그를 알아본 영지민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외지인들은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영지를 돌아다니며 느끼는 것은 노점이건, 식당이건 할 것 없이, 아르비스 공작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는 점이다.

    누가 시킨 게 아니라 모두 자발적인 행동이었는데, 영주의 성정에 영지민들이 알아서 아르비스 공작을 우상화하고 있었다.

    덕분에 발테르에 한 번이라도 방문한 사람이라면 영주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었다.

    “후···.”

    출퇴근도 일이다.

    테일러는 고급 주택가의 널찍한 정원을 가진 방 8개짜리 저택에 들어섰다.

    그 집은 부단장급의 기사와 팀장급의 마법사, 부장급의 행정관에게 기본으로 지급되는 저택이었다.

    저택뿐만 아니라 가사도우미와 시설관리 직원도 배정되는 데, 정말 말이 안 나오는 복지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수고하셨습니다.”

    젊고 예쁜 영주성의 시녀와 느낌이 다른, 나이 많은 가사도우미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왔다.

    “고마워요, 셀린 부인.”

    그녀는 테일러의 외투를 받아들며 물러났다.

    “아이고 우리 하울 준남작님 오셨네!”

    그때 좋은 때깔의 옷을 입어 귀부인처럼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종종걸음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바로 테일러의 어머니였다.

    “엄마는 왜 집에서까지 그렇게 부르는 거야.”

    “에구구, 우리 귀여운 아들이 너무 잘나서 기분 좋아 그러징.”

    그러면서 20살인 테일러의 엉덩이를 두드렸는데, 그는 익숙한지 헛웃음을 흘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 밥 뭐야?”

    “셀린이랑 같이 요즘 유행한다는 크림 파스타를 해봤어.”

    “크림 파스타?”

    널찍한 식탁에 다가가니, 하얀 크림이 뒤덮인 기괴한 면 요리가 눈에 들어왔다.

    “위스워드 제국에서 유행하는 음식이라더라.”

    말을 잃은 테일러는 물수건에 손을 닦으며 가장 상석에 앉았다.

    행상인을 하시던 아버지는 6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집안의 가장은 바로 그였다.

    옆자리를 보니, 여동생이 어째서인지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그 모습을 기분 나쁘다는 듯이 바라본 테일러는 까칠하게 물었고, 서서히 숙녀의 분위기를 풍기는 여동생이 공손하게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용돈 주시는 날입니다. 사랑하는 오라버니.”

    “벌써?”

    “벌써라니, 원래대로라면 어제였거든? 회식이라며 술 먹고 늦게 들어와서 안 줬잖아!”

    결국 마지 못해 돈주머니를 꺼낸 테일러는 여동생의 손 위에 10실버짜리 대은화 5개를 올려놓았다.

    영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에 비견되는 양이지만, 그래도 준남작의 작위를 가진 고위 행정관인지라 급여에 비하면 큰 금액이 아니었다.

    “아껴 써. 얼마나 힘들게 일해야 그 돈을 버는지 알지?”

    “넵! 알겠습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는 않았다.

    집안의 전 재산을 자신의 교육을 위해 사용했던 만큼, 여동생은 누리지 못한 것이 많았으니.

    “흐흑!”

    그런데 테일러가 여동생에게 돈을 뜯기는 장면을 보면서 갑자기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터뜨렸다.

    “뭐, 뭐야?”

    당황한 테일러는 뭔 일인가 싶어 급히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너무 행복해서. 정말 네가 이리 잘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하여간, 엄마도 참.”

    어머니가 이럴 때마다 뿌듯하면서도 살짝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경우 온전히 실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기보다 운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영주님의 덕이지.”

    그는 진심으로 아르비스 공작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자신은 성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어찌 행정관이 되긴 했겠지만, 이렇게 가족들 모두가 여유를 만끽하며 살 수는 없었을 테니.

    그리고 아르비스 공작 밑에 있다 보면 준남작 작위의 고위 행정관이 아니라, 영지를 가진 세습 귀족이 될 가능성도 있다.

    세습 귀족이 누리는 특권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평민이 어찌 꿈꿀 수 없는 자리다.

    하지만 아르비스 공작은 어느 정도 능력을 보이면 보상을 아까워하지 않는 스타일인지라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어머니를 위로하며 테일러는 다시금 업무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영주님 덕이 크지. 하지만 아비가 남긴 재산을 털어서 널 아카데미에 넣은 사람이 나란 걸 잊지 말아 주렴.”

    언제 울었냐는 듯 손을 내미는 어머니의 모습에 테일러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자.”

    “역시 우리 아들!”

    금화 하나를 어머니에게 건네며 이것 또한 행복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한 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포크를 들었다.

    “느끼해.”

    애석하게도 처음 맛본 이국의 음식은 그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

    29. 압박

    [칼바도스 제국에 카코스 환각초를 유통하던 일당이 체포되어 사형. 그들은 사형 직전까지 입을 모아 아르비스 공작님이 사주했음을 주장했으며, 그로 인해 마드세인에 대한 악성 여론이 들끓고 있음.]

    “결국, 붙잡히고 말았네.”

    아인트 공작이 보내온 현지의 보고 내용을 훑어보곤 종이를 불태웠다.

    빨리 문자 기능이 있는 휴대전화를 개발하든가 해야지, 다 읽은 기밀문서를 불태우는 모습이 은근히 멋지긴 하지만, 실용성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다.

    네나 왕국에서 잡아 와 칼바도스 제국에 풀어 놓은 마약범들이 끈질긴 수사 끝에 잡혔다는 내용.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생각으로 녀석들을 칼바도스에 풀어 놓긴 했지만,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하지만 녀석들은 의외로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며, 6개월에 동안 마약을 대량으로 만들어 판매했고, 북부 3개 영지에 막심한 피해를 주었다.

    더불어 귀족들 사이에 카코스 환각초가 은밀하게 퍼지게 만든 것은 기대 이상의 성과.

    정치적으로 활용할 생각을 못 하고 말 몇 마디 시킨 뒤 바로 죽여버리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짜증 났던 모양이다.

    죽어버린 마약범들에게 잠깐 동안 위로 시간을 가진 나는 바로 그들의 존재감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칼바도스 녀석들이 눈치 보는 게 기분 좋긴 하지만, 너무 얌전하니까 이상한데.”

    마음 같아선 언령의 힘을 믿고 한번 쳐들어가고 싶기도 한데, 저쪽은 샤를로트 공작뿐만 아니라 마르스 공작이란 괴물이 힘을 더해주고 있었다.

    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둘이라면 어떤 변수가 나타날지 모른다.

    지진 않겠지만, 위험한 짓은 삼가는 편이 좋으니, 당분간은 우리도 내부 정비 및 전력 강화 타임을 가져야겠다.

    쾅!

    “아르비스 공작님!”

    “아이리 여왕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나는 노크도 없이 들이닥친 성녀의 성난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그녀는 평범한 귀족이나 성직자가 아닌 여왕인데, 이렇게 자꾸 내 성으로 찾아와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괜히 나 때문에 혼사 막히는 거 아니야?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는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바레스 후작이 저와의 혼인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불필요한 제안이라며 쳐냈다면서요?”

    “네?”

    그런데 정작 먼저 혼인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의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그런 서신을 받은 것 같긴 하다.

    가이아 교단의 성직자는 혼인에 제약이 없다.

    여신을 어머니라 칭하는 만큼 오히려 혼인과 출산을 장려하는 경향이 강한지라 성녀라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희 사이에 그렇게 매정하게 행동하시다니요.”

    나는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손을 크게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왕실이 아닌 일개 귀족이 여왕의 혼담을 전해오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무시한 거예요. 싫다는 게 아니라.”

    지금의 모양새 덕분에 변명과도 같은 대답이 되었지만, 그녀는 화가 누그러졌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진짜요?”

    “그, 그럼요. 요즘 제게 들어오는 혼담이 워낙 많아서 전부 무시하고 있거든요. 그나마 그건 이타루스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답변이라도 한 거죠.”

    어차피 그녀와 내가 이어질 리는 없다.

    그녀는 전략적 선택을 위해 스스로를 팔 인물이 아니었으며, 내 나이를 생각하면 사랑을 느끼긴 힘들 테니.

    “뭐, 그런 거라면. 저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를 차지하고 앉은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알고 보니, 바레스 후작이란 인물이 그녀의 양아버지란다.

    성녀의 결혼 적령기가 끝나가는지라, 당사자와 상의 없이 급이 맞는 내게 찔러 봤다고 한다.

    압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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