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점 마법사-76화 (76/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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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히 걱정을 끼치고 말았네요. 폴시스 공작도 내일 방문한다고 했습니다.”

    “하루가 지나서야 사실을 알리다니, 너무 무감각하신 거 아닙니까?”

    부하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성녀가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여 내 상태를 체크 했다고 한다.

    대왕국의 여왕으로서 타국의 귀족을 돌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국의 여왕인 실비아를 들이지 않았으면서 타국의 여왕인 성녀를 들인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이는 내 상태 점검을 위한 일인 만큼 부하들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어요.”

    그녀가 그간 신경 쓴 것을 생각하면 어제 바로 알렸어야 했는데, 부주의했다.

    나는 변명하지 않고 사과를 건넸다.

    “후, 그래도 이렇게 무사한 것을 보니 다행입니다.”

    그녀는 시녀가 내온 차를 들이켜며, 힐끔 루시엘라를 바라보았다.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 수밖에 없는 미모.

    은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성녀도 대단히 아름다웠지만, 루시엘라가 갖고 있는 화려함은 종이 다르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엄청난 미인이네요. 적어도 제가 만나본 분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루시엘라의 인사에 미소 짓던 성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마법으로 귀를 가린 거 맞죠?”

    역시 성녀를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나는 사실대로 밝혔다.

    “그녀는 엘프거든요.”

    “엘프?”

    엘프란 말에 성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성직자들이 마법사 이상으로 싫어하는 존재가 하이랜드의 주민들이었으니.

    그러나 이미 마법사인 나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그녀다.

    성녀는 루시엘라에게서 선조의 실수를 겹쳐보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가이아 교단의 성녀이자, 이타루스 성왕국의 성왕인 아이리 크리우스입니다. 한 번쯤 살면서 엘프를 보고 싶었어요.”

    성녀의 소개에 루시엘라는 크게 놀란 모습을 보였다.

    루시엘라는 제한된 정보 속에 살고 있고, 나도 이것저것 떠드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외부소식과 단절되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현재 정보라면 나의 힘과 아르비스 공작가의 초인 전력 정도?

    어쩌면 내가 병기고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을 수도 있지만, 외부소식에 대해선 거의 아는 게 없다고 봐야 한다.

    “아주 스케일이 커지셨네.”

    피식 웃음을 흘리는 루시엘라.

    나는 이 정돈 보통이란 표정을 지었다.

    “저는 아르비스 공작가에서 1년째 포로 생활 중인 루시엘라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자기소개는 내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나는 성녀가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이랜드의 엘프들이 꿍꿍이를 꾸미고 있어서 그다지 좋은 관계라 보긴 힘들거든요. 어쩌다 보니 엘프를 사로잡게 되었는데, 그게 루시엘라였던 거죠.”

    꿍꿍이란 부분에서 루시엘라가 움찔거렸다.

    “음, 그런데 포로치곤 너무 대우 좋은 거 아닌가요? 제가 생각하기에 아르비스 공작님이라면 상대가 아름다운 여성이어도 필요 없다 싶으면 제거하실 것 같은데.”

    정확하게 나를 파악하고 있는 성녀.

    그런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살짝 불편했다.

    “원래 알던 사이거든요. 아마 모르는 엘프였으면 죽였겠죠.”

    “원래 알던 사이요?”

    인간이 엘프와 친분을 쌓을 일이 어딨겠는가.

    성녀는 부담스런 눈빛으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어릴 때 죽을뻔한 거, 루시엘라님이 구해줬거든요. 아마 그때 방치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가능성이 크죠.”

    “그때 너를 내버려 뒀다면 포로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대신 제가 죽었다면, 루시엘라님은 그 음흉한 인간들에게 잡혀가서 끔찍한 일을 당했겠죠?”

    “······.”

    “루시엘라님도 아르비스 공작님께 목숨을 빚진 건가요?”

    “뭐···.”

    대충 상황을 이해한 성녀가 심각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운명 아닙니까?”

    “네?”

    “그렇지 않나요? 서로 목숨을 빚지고, 종족의 차이가 있음에도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잖아요.”

    나는 웃는 낯으로 손을 내저으며 성녀의 생각을 부정했다.

    “됐어요. 이빨도 들어가지 않는 철벽녀니까.”

    “그 말은 뭔가 시도를 하긴 했다는 거네요?”

    쓸데없이 날카로운 성녀의 물음.

    그에 루시엘라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질리도록 혼인요청을 하긴 했죠.”

    “뭐하러 그런 말을 합니까?”

    내가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자 루시엘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인간과 함께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왜요?”

    성녀의 의문에 루시엘라는 당연하다는 식으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인간과 엘프는 인생 사이클이 완전히 다릅니다. 인간의 평생은 엘프에게 한때에 지나지 않죠. 엘프는 단 한 명의 배우자밖에 얻지 못하는데, 고독함을 안고 살아갈 만큼 루이스에게 깊은 애정이 없습니다.”

    의외로 진지한 그녀의 모습.

    그런데 어째서인지 성녀는 황당하단 반응을 보였다.

    “아르비스 공작님의 수명은 이제 인간보다 엘프에 가까울 텐데요?”

    “음?”

    큰 눈을 끔뻑이는 루시엘라는 내가 천년초를 섭취했단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며 다른 사유를 가져다 붙였다.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의 입장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하프엘프라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차별과 고난의 길을 걷게 될 테니까요.”

    “누가 감히 아르비스 공작님의 아이를 차별한단 말입니까? 어제 칼바도스의 국경성도 헬파이어로 날리고 온 분인데.”

    너무도 당연했던 이유가 더는 당연하지 않다.

    루시엘라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서로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이혼사유 같은 만능의 변명을 가져다 붙이는 루시엘라.

    “성격 차이가 큽니다.”

    “됐어요. 어차피 포기했으니까.”

    내가 빈정 상했다며 혀를 차자 루시엘라는 뒷목을 긁적였다.

    우리의 만남은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못했다.

    더구나 지금은 내게 억류되어있는 상태인데 뭘 바라겠는가.

    루시엘라 입장에서 나를 좋아하기 힘든 게 당연하다.

    “아무리 봐도 인연인데요···.”

    성녀의 그 말에선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여기저기서 혼담 들어 올 거 아냐.”

    “그렇죠. 전부 거절하고 있긴 하지만.”

    “왜?”

    “무슨 생각으로 혼담을 넣는지 알 수가 있어야죠.”

    성녀는 자연스럽게 다과로 나온 한입 쿠키를 입에 밀어 넣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루시엘라님에게 혼인을 청한 겁니까?”

    뜬금없지만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는 내용.

    내가 입을 닫고 뜸을 들이자 루시엘라도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나는 여성에게 약한 것 같다.

    두 여성의 은근한 시선에 어쩔 수 없이 답을 했다.

    “얼굴이 타입인지라.”

    지나치게 솔직한 내 대답에 루시엘라와 성녀는 얼굴을 구겼다.

    *

    나도 귀족이지만, 귀족이란 족속은 믿을 수가 없다.

    전생에 칼바도스가 마드세인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분투한 것은 왕국군뿐.

    대부분의 귀족들은 제 목숨과 재산을 간수하기 위해 영지민과 나라를 버리고 국외로 도망쳐버렸다.

    그러면서 또 욕심은 어찌나 많은지, 내게 귀족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미련한 돼지였다.

    물론 모든 귀족이 그런 것은 아니다.

    개중엔 충신과 영지민을 위하는 귀족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은 전체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부와 권력에 목을 매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카르디아 공작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권력이 줄어들게 되면 분명 수작을 부리는 귀족이 있을 거란 생각에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북부 귀족들이 수작을 벌이고 있어.”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는 아인트 공작을 보니 북부의 귀족들이 골치 아픈 짓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 데요?”

    “녀석들이 칼바도스와 접촉하는 척하면서 재산을 해외 여러 국가로 빼돌렸어.”

    “망명하겠다는 건가요?”

    “보아하니 그 자금을 인질 삼아 우리와 협상을 하려는 것 아닌가 싶네. 그리고 여의치 않으면 그 막대한 재산을 챙겨 망명하겠지.”

    역시나 귀족이란 족속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지구라면 계좌나 해외출입을 막으면 되지만, 이곳은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더구나 이 세계의 재산은 대부분 현물이다 보니, 자금을 옮기기로 마음을 먹으면 텔레포트로 단번에 이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빼돌리기로 마음먹으면 자금 유출은 쉽사리 막을 수가 없었다.

    “잘됐네요. 귀족사회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대로 도망친다면 북부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마드세인 경제 전체에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네.”

    귀족들이 벌여 놓은 온갖 사업, 그들이 버리고 간 영지민과 각종 전략 시설관리.

    그것은 고스란히 왕실의 부담이 될 것이다.

    “아직 그들은 왕국에 남아있는 거죠?”

    “그렇네. 여기저기 숨어있긴 하지만, 위치는 파악하고 있지. 왠지 자기들끼리 통신을 연결해놓고 텔레포트 스크롤을 손에 꼭 쥐고 있을 것 같군”

    그 볼품없는 모습이 상상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나서지요. 북부 귀족들이 숨어있는 장소 좀 알려주세요.”

    가벼운 반응에 아인트 공작은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와 제논 경들이 모두 나선다고 해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 거네. 그럼 괜히 나머지를 놓치게 될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소용없는 짓이니까요.”

    “좋은 수가 있는가?”

    ***

    “자금을 옮기는 것은 예상대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후의 대처겠지요.”

    러스티 백작의 이야기에 통신장비 너머로 프리드 후작의 긍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그럼 예정대로 북부 평화기관의 결성을 왕실에 통보하도록 하겠네.]

    이미 자신들은 왕실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행사력을 취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북부 귀족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중앙에서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강력한 집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들은 북부만을 위한 별도의 정치체계를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왕실에서 용납할 수 없다며 위해를 가하려 한다면 그들은 망설임 없이 위스워드 제국과 칼바도스 제국으로 망명할 생각이다.

    이미 그들의 힘이 되어줄 재산이란 인질은 무사히 국외로 빼돌렸으니,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전 아직도 떨립니다. 아르비스 공작이 다짜고짜 나타나서 공격하는 건 아닐지.]

    단체 통신이다 보니, 두 사람 외에도 많은 귀족들이 통신 장비 앞에서 걱정을 표했다.

    그럴 때마다 러스티 백작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미 저질러 놓고 저런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괜히 분위기만 흐릴 뿐이지.

    “아르비스 공작이 그 정도로 사리분별 못하겠소? 이대로 우리가 타국으로 망명하게 되면 마드세인 왕국의 경제는 대공황을 맞이하게 될 텐데.”

    그리고 어차피 북부의 귀족을 한 번에 잡기란 불가능하다.

    모두들 몸을 사리고 있는 데다가, 누구 한 명이라도 당하면 뒤도 보지 않고 마드세인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괜히 어설프게 건들었다간 돈과 함께 자신들을 놓치게 된다는 것쯤은 아르비스 공작이나 왕실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애써 서로를 위로하며 왕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렇게 왕실의 답변을 기다리길 1시간 지났을 때.

    [마드세인 왕국 행정부에서 알려드립니다.]

    대뜸 러스티 백작이 숨어있는 남부지역 국경도시 전체에 이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 시각 부로 왕국의 전 영토가 텔레포트 금지구역으로 설정이 되며, 출입국 검색이 강화될 예정이오니 불편하시더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해당 조치는 내일 오전 8시까지 지속 되며, 일부 지역은 지연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

    마드세인 왕국에 언제 이런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었던가?

    영지에 남아있는 척, 국경지대에 숨어있던 러스티 백작은 기겁하며 바로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북!

    하지만 그의 몸이 새파란 빛에 휩싸일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비정상적인 좌표로 인해 마법이 캔슬 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모두 들으셨습니까?]

    [왕국 전체에 텔레포트 방해진을 펼치다니 그게 가능합니까?]

    [하늘입니다! 하늘에 뭐가 떠 있어요!]

    [저, 정말 텔레포트가 안 됩니다!]

    [프리드 후작님! 어떻게 합니까!]

    단체 통신은 순식간에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러스티 백작은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똑.

    하지만 노크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노출도가 심한 복장의 여성 마법사가 입구에 기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당신 뭐야? 으악!]

    [프리드 후작님!]

    [제논 백작님? 자, 잠시만요, 이건 뭔가 오해가!]

    그리고 통신장비에서 간헐적으로 울려 퍼지는 비명에 러스티 백작은 식은땀을 삐질 흘려야 했다.

    “안녕. 당신이 러스티 백작 맞지?”

    “바, 밖에 누구 없느냐!”

    그는 자신의 호위들을 찾았으나, 대답 따윈 돌아오지 않았다.

    “다 정리했어.”

    또각. 또각.

    평소라면 어떻게 하면 자빠뜨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을 미인이 다가옴에도 러스티 백작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뭐, 뭐하는 계집이냐!”

    “계집이라니, 나도 이번에 백작위를 받게 될 인물인데.”

    그 말은 자신이 아르비스 공작의 휘하의 초인임을 밝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곳은 분명 아무에게도···.”

    그녀가 코앞까지 접근하자, 진한 꽃내음 함께 엄청난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코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온몸엔 힘이 빠지더니 이내 러스티 백작의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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