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186 --------------
나는 청혈초를 바라는 그의 용건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청혈초를요?”
그의 말대로 나는 대량의 청혈초를 보유하고 있다.
마드세인에서 생산되는 청혈초를 독점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청혈초의 가격이 워낙 싼지라 주변 국가에서도 거의 쓸어 담다시피 사들이고 있다.
덕분에 청혈초의 가격이 살짝 오르고 토르말린 사태를 기억하는 몇몇 상인들이 나를 따라 청혈초를 비축했지만, 나만큼 많은 양을 보유한 사람은 전무 했다.
내가 청혈초를 비축해둔 이유는 추후 몸값이 기하급수적으로 뜬다는 점도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해 준비해둔 것이다.
전생에 미드랜드 동부를 중심으로 무서운 역병이 성행했다.
그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국가가 케일론을 비롯한 중동부의 국가였으며, 서서히 이웃 국가로 퍼지면서 미드랜드를 혼란에 빠트렸다.
칼바도스와 마드세인은 케일론에서 멀기 때문에 이상이 없었지만, 그때 죽은 사람의 수가 수억에 달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역병의 유일한 치료제가 되는 것이 바로 청혈초다.
내가 아무리 이기적이어도 사람의 목숨으로 장사할 생각은 없다.
당연히 내 돈을 쓴 것이니 공짜로 주진 않겠지만, 적어도 상인들이 죽어가는 사람을 상대로 장난질을 치는 일이 없도록 시세를 조율할 수 있을 정도의 청혈초를 보유하기로 한 것이다.
나름 미래를 아는 자로서의 책임감이라고 할까?
나와 정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지만, 선의에 따른 조치라 할 수 있다.
“네, 값싼 청혈초를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런데 케일론 왕국에서 시작되는 역병은 지금으로부터 5년 뒤에 발생한다.
때문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웃는 낯으로 소탈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폴시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가 청혈초를 대량 보유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시지 않는다면 팔 수 없습니다.”
그에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던 폴시스 공작이 의아하단 반응을 보였다.
“만약이요?”
“네, 만약입니다.”
떠보려 하지 말고, 먼저 이유를 밝히라는 내 반응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리모트랜드와 인접한 영지들로부터 역병이 돌고 있습니다. 그 역병의 치료제가 청혈초고요.”
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전생보다 무려 5년이나 빠르잖아.
“음.”
나로 인해 마드세인과 주변 국가의 미래가 틀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케일론처럼 지금까지 관계가 없던 국가의 미래가 이리 틀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와 케일론이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
이것도 나비효과 같은 걸까?
따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르비스 공작님?”
“아, 아아. 아닙니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팔아야죠. 어느 정도의 물량을 원하십니까?”
저쪽은 다급한데 딴생각을 하며 여유 부릴 틈은 없었다.
애초에 역병을 위해 모아둔 물량인 만큼 판매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갖고 계신 모든 물량을 구입하고 싶습니다만.”
내가 얼마나 갖고 있을지 알고.
“그건 조금 힘들 것 같군요. 일단 판매 한도는 3할로 하겠습니다. 더 필요하시면 그때 추가로 구입하는 것으로 하죠. 3할만 해도 엄청난 물량입니다.”
폴시스 공작은 자신의 부인인 에클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일단 상품 보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아름다운 그녀였다.
“그게 낫겠지.”
마치 친구처럼 부부가 편하게 대화하는 것을 보니, 단순히 정략혼으로 만난 사이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물건을 보러 가시겠습니까?”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고, 내 뒤로 콘스탄틴과 블레이크, 제논이 섰다.
“텔레포트 사용하겠습니다.”
“네.”
우린 바로 장소를 옮겼다.
주변의 풍경이 화려한 영주성의 응접실에서 영지 외곽의 창고로 바뀌었다.
“텔레포트의 캐스팅 공식이 굉장히 심플하군요.”
잠깐 사이 내 캐스팅 과정을 본 폴시스 공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내가 익힌 마법은 대부분 마도 시대의 것을 기초로 하고 있기에 현재 미드랜드에 퍼져 있는 마법과는 조금 공식이 달랐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충 얼버무렸고, 그들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내 뒤에 위치한 거대한 창고를 바라보았다.
내가 손님 둘과 마스터 셋을 이끌고 창고로 다가가자, 창고 관리자가 뛰어나와 반겨주었다.
끼이익!
관리자에 의해 육중한 창고의 문이 열리고 약초 특유의 향이 전신을 뒤덮었다.
“대단하네요.”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말린 청혈초로 되어있는 작은 산.
폴시스 공작이 잘 말린 청혈초 하나를 짚어 뜯어보았다.
그러자 푸른 가루가 묻어 나왔는데, 상태가 아주 좋다는 것을 뜻했다.
“관리에 굉장히 신경을 쓰셨군요.”
“청혈초에서 가장 중요한 게 청혈이니까요.”
“좋습니다. 이 정도 물량이 얼마나 더 있습니까?”
나는 그에게 웃으며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쳤다.
“음, 양이 부족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기본으로 생각하는 단위와 그가 기본으로 생각하는 단위가 다른 모양이다.
“5배가 아니라 50배입니다. 제가 팔겠다고 한 게 이 창고 15개분이고요.”
추가설명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두 사람은 이내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겠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가격과 조건일 것이다.
“아르비스 공작!”
그렇게 가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던 때, 아인트 공작이 헤르만과 함께 텔레포트로 나타나 급히 달려왔다.
“이쪽은 마드세인 왕국의 재상인 아인트 공작이라 합니다.”
나는 아인트 공작을 두 사람에게 소개했고, 두 사람은 갑작스런 재상의 등장에 의아하단 반응을 보이면서도 자기소개를 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잠깐만 아르비스 공작을 빌리겠습니다.”
“네?”
아인트 공작은 급히 양해를 구하고는 나를 끌고 두 사람에게서 떨어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그는 슬쩍 폴시스 공작과 에끌로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소리 차단 좀 해주게.”
무슨 중요한 내용인지는 몰라도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럴 리가 없기에 나는 순순히 마법으로 소음을 차단했다.
“방금 정보부를 통해 놀라운 내용을 보고받고 자네에게 알리려던 차였지. 그런데 그 정보가 케일론 왕국과 관련된 것이네.”
“혹시 역병을 말하는 거면···.”
“아니, 그게 아니야.”
아인트 공작은 진지하게 말했다.
“자네 일전에 내게 마도시대 유적과 기술에 관한 정보 수집을 부탁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더불어 아인트 공작에겐 기간트와 유적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공개했는데, 이는 칼바도스의 기간트 기술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케일론에서 기간트를 제작해 실전 배치하고 있다는군.”
“······.”
나는 헛바람을 삼키며 케일론 왕국의 두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네. 내가 뭐하러 이런 고생을 하겠나.”
기간트를 복원해 실전 배치까지 해냈다는 뜻은 그들도 유적을 손에 넣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은 천재가 아니라 트레이닝 캡슐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두 사람은 내 복장과 부하들의 복장을 보고 우리의 상황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결국, 나 또한 그들의 상황을 알게 되었으니 비슷한 입장이겠지만 자칫 큰 도움이 될만한 패를 아무렇지 않게 놓아 줄 뻔했다.
나는 아인트 공작에게 고맙다고 전하며 다시 두 공작에게 다가갔다.
“원하신다면 청혈초는 선의의 증표로 그냥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 이야기에 폴시스 공작과 에클로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에 이유 없는 공짜는 없으니까.
“대신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좋은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기색을 봐선 그들도 내가 유적을 보유하고 있음을 눈치챈 게 분명하다.
나는 마도제국 양식의 팔찌를 가리키며 웃었다.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내 너스레에 폴시스 공작과 에클로 공작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
“케일론 왕국인가···. 솔직히 하이랜드의 엘프들을 당황하게 했다는 점만 보면 굉장히 마음에 드는데 말이야.”
리모트랜드는 로이아스 대륙에서 가장 높은 몬스터 밀집도를 자랑하는 땅으로 악마의 숲과 회색 산맥을 끼고 있는 대륙 최대의 금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보통 리모트랜드하면 드래곤들의 땅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드넓은 리모트랜드 전체가 드래곤의 영역은 아니었다.
그곳은 하이랜드처럼 여러 세력이 존재했다.
그레이오크와 블랙오크를 중심으로 이뤄진 ‘오르드’.
라이칸스로프, 웨어울프의 ‘칸트’, 블루리자드맨들의 ‘드라크’까지 복수의 원시적인 몬스터 국가들이 존재했다.
그동안 리모트랜드 몬스터의 지능이 꾸준히 상승하면서 국가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들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미드랜드의 국가는 케일론 왕국이 유일했다.
회색의 피부와 은발을 가진 미녀의 말에 남성 엘프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말씀이 심하군요! 그럴 거면 뭐하러 우리의 손을 잡은 것입니까!”
그에 은발의 여성은 키득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리모트랜드는 다 좋은데, 똥 냄새나는 몬스터들이 문명인인 척하는 게 꼴불견이라서 말이야.”
은발 여성의 이야기에 엘프는 혀를 차며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솔직히 이 결정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여왕폐하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이번 일이 마무리가 잘 된다면 여러분을 하이랜드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고고한척하긴, 리모트랜드의 드래곤이 무서워 우리에게 손을 내민 거면서.”
“다크엘프가 무례하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지도자께서도 이리···.”
척.
끝까지 말꼬리를 잡는 은발여성의 태도에 엘프는 해선 안되는 말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그의 목에 새하얀 검신이 놓이고, 다크엘프라 칭해진 여성은 차갑게 말했다.
“우린 실버엘프다. 너희는 우리의 선조가 마도제국을 배신했다고 하여 다크엘프라 낮춰 부르지만, 패배자인 너희와 달리 끝까지 가이아님을 따른 우리는 역사의 승리자다.”
그녀는 8클래스의 대마법사이자, 그랜드마스터를 사정권에 둔 검사이기도 하다.
“무례하다고 칭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한 번만 더 우릴 다크엘프라 부른다면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
마음만 먹는다면 미드랜드의 소왕국은 홀로 괴멸시킬 수 있는 능력.
하이랜드의 엘프란 이유만으로 이죽거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그 또한 8클래스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로 하이랜드의 10대 장로 중 한 명이었지만, 진정한 마검사인 그녀를 상대로 힘자랑하는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의 사과에 언제 살기를 뿌렸다는 듯 검을 거둔 여성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방금 말실수로 하이랜드와의 관계가 끝날 뻔했어. 그랬다면 엘프퀸이 어떤 표정으로 자네를 맞이했을까?”
엘프의 장로는 그녀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이 자신을 실버엘프라 칭한다 해도 세상 모든 종족이 다크엘프라 부르는데 어쩌겠는가.
상대가 다크엘프라 부를 때마다 검을 뽑으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기세를 꺾기 위해 꼬투리를 잡은 것이란 걸 알지만, 다크엘프의 장로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자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 하나하나가 자신과 다름없는 강자였으니.
다크엘프는 종족의 특성상, 출산율이 굉장히 낮다.
그래서 전체 인구수는 엘프의 100분의 1수준밖에 되지 않지만, 마스터와 대마법사의 수는 엘프와 동등한 정예종족이었다.
“좋아, 좋아. 이제야 태도가 마음에 드는군.”
“······.”
같은 여왕이란 칭호를 갖고 있지만, 엘프퀸과 다크엘프퀸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엘프퀸이 고고하고 성스런 느낌이라면 다크엘프퀸은 거침없고 익살스런 분위기를 풍겼다.
“그나저나 사타니스균의 확산속도가 너무 느린데.”
다크엘프 퀸은 아공간에서 수정구를 꺼내 안을 살폈다.
수정구 안에는 케일론 왕국의 지도가 담겨 있는데, 리모트 랜드부터 시작해 붉은 기운이 아주 천천히 번져 나가고 있었다.
“케일론 녀석들이 대처를 잘하고 있는 모양인데?”
“전염균으로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타니스균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몰라서 그래. 강력한 살상력뿐만 아니라, 오염구역 내의 해독초까지 스스로 제거를 하거든. 한번 확산되면 잡기 힘들어. 정제된 해독약을 국민전체에 뿌리지 않는 이상 말이야.”
인간이 얼마만큼 죽건 상관은 없지만, 파괴적이고 거리낌 없는 다크엘프의 성향과 안 맞는 모습이다.
차라리 다크엘프가 케일론에 쳐들어가는 편이 훨씬 빠르게 일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엘프장로는 왜 굳이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이냐며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엘프 장로, 케일론 왕국에 대해 얼마나 알아?”
“인간 국가 중 4번째 국력을 지녔으며, 마도공학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 정도일까요.”
“그렇겠지. 케일론 왕국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아마 우리일 테니. 녀석들을 만만히 보아선 안 돼. 항상 힘을 숨겨두는 음흉한 녀석들이거든.”
“네?”
“나는 최소한의 피해로 목적을 달성할 생각이다. 그러니 조바심 내지 마.”
다크엘프 퀸의 조심스런 반응에 엘프 장로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
케일론 왕국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