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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마법사-54화 (5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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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비아 공주는 아인트 공작에게 이 사태에 대한 함구를 약속받고, 페일 왕태자의 계획도 전달받았다.

    하지만 아인트 공작의 도움은 그것으로 끝이다.

    결국 페일 왕태자는 공주의 손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당장 왕성엔 그녀를 위해 움직여줄 병력이 없었다.

    기밀유지를 위해 항상 데리고 다니던 호위기사도 떼어 놓은 공주는 자신의 힘이 되어 줄 사람을 찾아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충성.”

    “안에 계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똑똑!

    그리고 왕성의 별관에 위치한 고위대신 집무실에 도착한 그녀는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끼익!

    문은 대답 없이 바로 열렸다.

    마치 집무실 입구를 꽉 채운 듯한 거구의 사내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는데, 그에게선 짙은 알콜 냄새가 났다.

    “공주 전하?”

    그는 군 총사령관인 제노아드 공작.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비아 공주는 이미 제노아드 공작의 집무실로 반쯤 들어선 상태였다.

    그녀가 쏙 몸을 밀고 들어오자, 공작은 머리를 긁적이며 헛기침을 했다.

    “제 집무실에 어찌 혼자 찾아오셨습니까? 사적으로 공주 전하와 이야기를 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요.”

    공주는 아인트 공작 때처럼 제노아드 공작의 집무실을 스윽 살펴봤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술병.

    아르비스 공작의 등장과 왕권의 추락으로 제노아드 공작은 더 이상 그녀가 알던 이 나라의 기둥이 아니었다.

    “제노아드 공작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도움이요?”

    제노아드 공작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게 있냐며 껄껄 웃었다.

    “아르비스 공작이 공주 전하를 꽤나 아낀다고 들었습니다. 차라리 그에게 부탁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이 일은 그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분의 도움을 받게 되면 마드세인 왕가의 입장은 더 비참해질 거예요.”

    미간을 좁힌 제노아드 공작은 공주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소파에 털썩 몸을 묻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왕태자가 로엘 제국을 끌어들여 아르비스 공작을 공격하려 합니다.”

    “허···.”

    어처구니없다는 그의 반응에 공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페일 왕태자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한 대가는 혼자서 짊어지지 않겠죠.”

    “아인트 공작이라면 이미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인트 공작님껜 함구를 약속받았습니다.”

    그제야 공주의 목덜미에 난 생채기를 알아챈 제노아드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아인트 공작은 말로 설득한다고 통할 인물이 아니다.

    왠지 공주가 어떤 식으로 그를 설득했을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폐하께선 이 일을 알고 계십니까?”

    “아뇨. 제가 계획하고 직접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째서 폐하께 알리지 않은 겁니까?”

    “폐하께선 이미 마음이 꺾이셨습니다. 그런 분에게 자식까지 죽이라 할 순 없어요.”

    공주가 원래 이런 당찬 성격이었나?

    제노아드 공작은 작은 체구의 공주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제가 해결해야 합니다. 제가 해결을 해야 가장 뒤탈이 적어요.”

    “그렇군요.”

    실비아 공주는 제노아드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마드세인 왕가를 지킬 겁니다. 그러니 부디 제노아드 공작님께서 저의 검이 되주셨으면 합니다.”

    *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던 왕태자가 집사에게 물었다.

    “몇 시인가.”

    “22시 30분입니다.”

    왕태자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마누스 경.”

    “네, 전하.”

    그리고 두 사람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전하, 어딜 가시는지요. 산책하실 생각이라면 호위를···.”

    “됐다. 호위는 마누스 경만으로 충분하니. 자네들도 물러나게.”

    “알겠습니다.”

    호위뿐만 아니라, 시종까지 모두 물린 왕태자는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바이탈 캐슬의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비스 공작이란 인물이 꼬마란 이야기가 있던데.”

    “신체나이가 12~13세 정도밖에 안 된다죠?”

    “그럼 숫총각일 가능성도 있겠군.”

    왕태자가 불쌍하단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자, 옆에 있던 마누스도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만약 그가 제거된다면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 나눠본 인생이 될 터.

    이 얼마나 잔인하단 말인가.

    “남 걱정하실 때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

    왕성 복도 갈림길에서 불쑥 나타난 공주가 무표정하게 말을 건네왔다.

    “실비아?”

    그런데 왕태자는 그녀가 내뱉은 대사보다, 그녀의 복장에 관심을 보였다.

    가슴골이 깊게 파인 이브닝드레스를 걸치고 머리카락을 말아 올려 목을 훤히 드러낸 상태.

    어린 여동생에게서 처음 보는 성숙미에 그는 당황하긴커녕 만족스런 시선을 던졌다.

    “혹시나 했는데, 형제인 저를 여자로 보시는 겁니까?”

    “하하, 그럼 네가 여자지 남자란 말이냐?”

    실비아는 불쾌하단 감정을 감추지 않고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지금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그에 왕태자는 미간을 좁혀야 했다.

    “알 것 없다.”

    그리고 왕태자는 공주의 어깨를 짚으며 지나쳤다.

    “나중에 함께 와인이나 하자꾸나. 오빠가 술을 알려 주마.

    그러나 이어진 공주의 말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혹시 로엘 제국의 지원군을 만나러 가시는 길이 아닌지요?”

    “무, 무슨 말이냐.”

    실비아 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본인이 감시를 받을 거라고 생각 못 하십니까.”

    “누가 감히 왕태자를 감시한단 말이냐!”

    “힘도 없는 왕권의 태자를 누가 무서워하겠습니까?”

    “뭐라?”

    그런 공주의 등 뒤로 제노아드 공작이 걸어왔다.

    “아무리 봐도 그 멍청함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로엘 제국에서 뭔가에 홀리신 것 아닌지요.”

    “미친 게냐? 무슨 망발을!”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오라버니의 이 모습이 진심이라면 슬플 것 같습니다.”

    이어서 제노아드 공작이 공주의 옆에 나란히 서자 왕태자는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제노아드 공작, 자넨 무슨 일로?”

    하지만 제노아드 공작은 왕태자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공주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로엘 제국의 기사는 사지를 끊고, 오라버니는···. 고통 없이 보내주세요.”

    “명을 받듭니다.”

    제노아드 공작이 검을 뽑아 들고, 그것에 오러블레이드가 피어났다.

    기겁한 왕태자는 도움을 요청하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왜, 왜 이러는 것이냐! 어찌 왕태자에게 검을 들이미는 게야!”

    “아르비스 공작 전하께 대항하려 하셨으니까요.”

    왕태자의 외침에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어서 기사와 병사들도 달려왔지만, 아무도 제노아드 공작의 일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

    “예고도 없이 전체 귀족회의라뇨?”

    나는 왕실에서 알려온 공지에 의문을 표하며 아인트 공작에게 연락을 넣었다.

    [오면 알 것이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군.]

    “꼭 가야 하나요?”

    [그렇지, 일단은 어명이니.]

    황당하다.

    국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갑자기 오늘 왕성에서 전체 귀족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니 영주와 주요공직자들은 무조건 참석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것도 어명으로.

    더구나 귀족회의가 열리는 시간은 한 시간 후라고 하니, 아마 공지를 받은 귀족들 모두가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은까?

    “알았어요. 갈게요.”

    아인트 공작의 반응도 뭔가 이상했지만, 그래도 어명으로 내려온 지시를 무시하긴 그렇다.

    아무리 내가 왕권을 쥐고 흔드는 존재라 해도 지킬 것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나.

    그게 싫으면 직접 국왕을 하면 되는 거고.

    나는 콘스탄틴에 호위병력을 꾸리도록 지시했다.

    당연히 그 인원은 제논을 포함해 세습 작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구성이 되었다.

    인원이 모이자 나는 바로 왕성으로 텔레포트를 실시했다.

    주변의 풍경이 거대한 도시의 성탑으로 바뀌고 구시렁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귀족들을 보니, 이 나라에 귀족이 이리도 많았나 싶을 정도였다.

    “오! 아르비스 공작전하,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네, 반갑습니다.”

    내가 걸음을 옮기자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이젠 익숙해진 광경이지만, 나와 친분을 쌓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생에 귀족은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하늘 위의 존재였는데.

    그렇게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바이탈 캐슬 대 회의장으로 향했다.

    대 회의장은 국회의사당을 확대한 것 같은 모습이다.

    약소국인 마드세인 왕국의 규모가 이 정도인데, 제국의 귀족 회의장은 어떤 모습일까?

    가장 상석에 화려한 왕좌가 위치하고 그보다 한단 아래에 공작의 자리로 보이는 의자 네 개가 놓여 있다.

    그런데 왕좌 옆으로 호화로운 의자가 하나 더 놓여 있었는데, 아무래도 왕태자가 참석할 예정인 모양이다.

    처음 왕태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의외로 잠잠하다.

    사리분별을 하는 건지, 아니면 국왕에게 경고를 들은 건지는 몰라도 앞으로도 계속 조용히 사는 것이 그를 위한 것이다.

    “오, 오셨습니까?”

    카르디아 공작이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제노아드 공작과 아인트 공작은 아직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국왕과 함께 입장할 예정인 것 같다.

    [정숙해 주십시오.]

    잠시 후, 체르닐 자작이 음성 확대 아티팩트를 이용해 귀족들의 시선을 끌었다.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금일 국왕폐하로부터 중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회의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대한 발표?

    나도 모르는 중대한 내용이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중대한 발표란 것에 회의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지고, 체르닐 자작이 책상을 톡톡 두들기며 정숙을 요구했다.

    [국왕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왕좌와 가까운 회의실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응?”

    그런데 국왕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 왕태자가 아닌, 실비아 공주가 아닌가?

    그런 두 사람의 뒤를 아인트 공작과 제노아드 공작이 따르고 있었는데, 나와 눈을 마주친 아인트 공작은 면목 없다며 사과하는 제스쳐를 보내왔다.

    이게 뭔 상황이래?

    이어서 여지없이 국왕이 왕좌에 앉고 공주가 왕태자의 자리로 보이는 곳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사회에 맞춰 국왕에게 인사를 건넨 귀족들이 착석했다.

    [오늘 짐이 귀족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중대한 발표를 하기 위함이다.]

    평소보다 안색이 더 안 좋은 국왕을 보니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던 것 아닐까 싶다.

    아인트 공작이 옆자리에 앉자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나는 조용히 국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짐은 이만 왕좌에서 물러나려 한다.]

    양위?

    예고 없던 양위 소식에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고, 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이제 막 옆자리에 앉은 아인트 공작을 노려보았다.

    “나,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끝까지 들어보게나.”

    크게 손을 내젓는 아인트 공작의 모습에 일단 상황파악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나를 대신해 이 나라를 다스릴 다음 대 국왕을 실비아 공주로 정했으니, 새로운 여왕에게 충성을 다해 주길 바란다.]

    “허···.”

    웅성거림이 급격히 커지는 회장.

    내 시선을 느꼈는지 새하얀 웨딩드레스 같은 복장의 공주가 예쁜 미소를 지었다.

    [이의 있습니다! 양위를 하신다면 마땅히 페일 왕태자 전하를 후계자로 삼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백작의 외침에 국왕은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에 공주가 직접 답했다.

    [페일 왕태자는 이제 없습니다. 그는 로엘 제국을 끌어들여, 이 나라의 기둥인 아르비스 공작님을 공격하려 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나서서 처형했습니다. 원하신다면 증거를 공개하도록 하죠.]

    !!!!!!

    [현재 정당한 후계자는 저입니다. 왕위에 대한 이견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아인트 공작이 내게만 들리게 부연 설명을 더했다.

    “이 소식이 자네에게 알려지면 왕가에 피바람이 불 거라며, 공주가 직접 나섰네. 그녀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 함구를 요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했어. 정말 미안하네.”

    “······.”

    “그리고 폐하께 해당 사실을 알리면서 국가 통치에 의욕이 없다면 양위를 해달라고 요구했지. 공주는 자네와 함께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싶다고 하더군.”

    실비아가?

    내가 아는 그 연약한 공주님이 그랬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나라에 여왕이 즉위한 유례가 없습니다.]

    [너무 급히 정한 것은 아닌지. 여왕은 좀···.]

    귀족들이 반발도 당연하다.

    이 세계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면 여자는 누군가의 위에 설 수가 없다.

    그들 입장에서 실비아는 아무 능력이 없는 여인으로 왕가를 위해 다른 나라에 팔려가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였다.

    나는 실비아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순진한 줄만 알았는데, 자신의 형제까지 죽일 수 있는 냉철함과 행동력을 갖고 있었다니.

    “큭!”

    그리고 동시에 이 상황이 굉장히 재밌게 느껴졌다.

    작게 웃음을 흘리던 나는 아티팩트 없이 직접 목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좋지 않습니까? 저는 찬성입니다.”

    그에 회의장은 순식간에 침묵에 물들었다.

    이능 적성 검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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