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점 마법사-53화 (5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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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태자 페일 복귀하였습니다.”

    마드세인 왕국의 국왕은 아들의 인사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 크게 반기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왕태자가 자신의 수행원을 소개했다.

    “폐하, 이쪽은 로엘 제국의 황제폐하께서 두 국가의 우의를 위해 제 개인 호위로 임명해준, 기사 마누스 경입니다.”

    “로엘의 황제께서 기사를 내려주었다?”

    “네, 그러하옵니다.”

    그에 지금까지 의욕 없어 보이던 국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본국에도 왕태자를 호위할 기사는 많다. 그런데 굳이 로엘 제국의 기사를 마드세인까지 데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갑작스레 바뀐 분위기에 태자는 당황했지만, 이내 웃는 얼굴로 답했다.

    “말 그대로 우의를 위해서입니다. 로엘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마드세인의 발전상을 인상 깊게 보고 계시다며 호의를 보이셨습니다. 더불어 많은 공동 사업도 제안해주셨지요.”

    로엘제국과 마드세인 왕국은 지도상에서 미드랜드의 끝과 끝에 위치한 가장 먼 국가다.

    그런 국가에서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여 뭘 어쩌겠다는 건가.

    국왕은 왕태자의 태도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태자는 로엘 제국의 사람이 되어 돌아왔군.”

    “그런 게 아닙니다. 로엘 제국이 대국으로써 본받을 것은 많지만, 제가 마드세인 왕국의 태자라는 사실을 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

    국왕은 지쳤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다.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지. 마누스 경이라 했나? 자네는 한동안 손님으로 맞이하겠네. 처우는 나중에 정하도록 하지.”

    “처우를 정한다니요? 그는 로엘 제국과 마드세인 왕국의 우의를 증명하는 존재입니다.”

    “왕태자는 그만 돌아가도록.”

    “폐하?”

    그에 마누스란 이름의 기사가 미간을 꿈틀거렸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결국 왕태자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왕태자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

    “오라버니?”

    “오오, 실비아.”

    행정성에서 오늘의 업무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실비아 공주는 익숙한 얼굴의 남성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그에 왕태자 페일은 크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우리 실비아는 더 아름다워졌구나.”

    “돌아오신다는 게 오늘이었군요? 죄송해요, 마중을 나가야 했는데 제가 요즘 바쁘게 지내서.”

    왕태자는 실비아 공주의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웃어 보였다.

    “솔직히 조금은 서운했다. 마중을 나온 사람이 체르닐 자작뿐이어서 말이다.”

    실비아 공주는 지나치게 애정표현을 하는 왕태자의 행동이 부담스러웠지만 미안함에 불평을 못하고 어색하게 웃음만 흘렸다.

    “그런데 바쁘다니,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나라의 소식을 전해오던 아인트 공작과 카르디아 공작이 요즘 도통 연락을 안 해오더구나, 그들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게냐?”

    실비아 공주는 문뜩 걱정이 밀려왔다.

    괜히 자신의 오라비가 변화한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날뛰는 것은 아닐지.

    “저 행정부 세납 과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공주인 네가? 왜?”

    생각지도 못한 소식인지, 그는 황당하단 반응을 보였고 실비아 공주는 자신의 오라비와 자세히 이야기를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 그러지 말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는 거 어떠세요?”

    “뭐, 좋다.”

    왕태자는 기사 마누스를 이끌고 공주를 따라 개인 응접실로 향했다.

    “그냥 네 방이면 되지 않겠냐? 굳이 응접실로 자리를 마련하다니.”

    공주의 시선이 마누스 경에게 향했다.

    “저도 이제 숙녀랍니다. 손님도 계시는데, 함부로 방문을 열 순 없죠.”

    “그러냐?”

    1년여 만에 본 왕태자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가끔 자신을 훑어보는 눈길에서 불쾌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째서 네가 행정업무를 보는 것이냐?”

    “아르비스 공작께서 그리 제안해 주셨으니까요.”

    “아르비스 공작? 아아, 마드세인 4번째 공작이라는 대마법사 말이냐?”

    공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라버니께서 마드세인의 현 상황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요?”

    “뭐,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알고 있다. 왕국에 새로운 마스터와 대마법사가 탄생했으며, 둘이 하나의 세력을 이뤘다고. 새로운 대마법사인 아르비스 공작이 사업 수완이 좋아 나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지?”

    역시 그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한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인물이 아르비스 공작 옆에 딱 붙어있었다.

    바로 아인트 공작말이다.

    아인트 공작과 그를 따르는 전통 귀족파는 왕태자의 주축 세력이었지만, 이젠 입장이 바뀌었다.

    분명 아인트 공작은 왕태자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실비아 공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 나라는 더 이상 저희 마드세인 가문의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왕태자는 그게 무슨 망발이냐는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요즘 왕국에는 이런 말이 심심치 않게 돌고 있죠. 백성 위에 국왕, 국왕 위에 아르비스 공작이 있다고요.”

    “뭐라!?”

    공주는 가감 없이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했다.

    그가 괜한 짓 못 하게끔.

    왕태자는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기에 공주는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것 같아 안도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왕태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로 답했다.

    “그간 고생이 많았구나. 지친 듯한 폐하의 모습도 이해가 된다. 이젠 이 오라비가 있으니 안심하렴.”

    “예?”

    어째 반응이 이상하다.

    실비아 공주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로엘 제국에서 유학하고, 황태자 전하와 친분을 쌓게 된 것이 이를 위함이던 모양이다.”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공주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말했다.

    “자, 잠시만요! 오라버니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절대로 그와 대적해선 안 됩니다. 왕가가 흔들릴 뿐이에요!”

    “칼바도스의 샤를로트 공작과 초인 7명을 물리쳐?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을 어찌 믿겠느냐. 너와 폐하께선 지금 그의 정보 공작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믿기 어려운 건 압니다. 그럼 일단 조사부터 하세요. 사실 여부부터 확인하셔야 합니다.”

    “허, 참···.”

    왕태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라버니?”

    “이 오라비를 화나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너의 행동은 나를 무시하고 욕보이는 것이니.”

    아무래도 왕태자는 로엘 제국에 살면서 아집만 늘어서 온 것 같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실비아 공주는 다급하게 일어나 애원하듯 그의 팔을 잡았다.

    “오, 오라버니. 부디 이성적인 판단을 해주세요. 그래요, 만약 제가 한 말 중 상당수가 아르비스 공작의 정보조작에 의한 거짓이라 해도, 그와 대항하면 이 나라는 파탄에 접어들 겁니다. 그렇게 되면 칼바도스의 먹이가 될 뿐이에요.”

    하지만 끝내 왕태자는 혀를 차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덕분에 엉덩방아를 찐 실비아 공주는 놀라서 그를 올려보았다.

    “실비아. 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한동안 쉬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아인트 공작에겐 내가 전하마.”

    “오라버니!”

    그리고 왕태자가 매정하게 응접실을 나서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

    “허, 쓸데없는 짓을···.”

    아인트 공작은 왕성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에서 왕태자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페일 왕태자 행동 보고서]

    -21일 오후 2시 10분, 로엘 제국의 황태자와 장거리 통신.

    내용: 아르비스 공작을 제거하기 위한 대마법사 두 명과 마스터 두 명에 대한 지원 요청.

    로엘 제국에선 아르비스 공작에 대한 소문에 파견을 꺼렸으나, 페일 왕태자가 해당 소문은 정보 조작에 따른 거짓이란 주장과 아르비스 공작가의 재산 중 절반을 대가로 걸어 허가를 받아냄.

    22일 오후 11시에 로엘제국의 병력 지원예정.

    접선 장소는 페일 왕태자가······.

    가능성을 열어 두긴 했지만, 설마 이 나라로 돌아오자마자 아르비스 공작과 대적하려 할 줄이야.

    공주가 절대 허튼짓하지 말라고 경고도 한 것 같은데,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수작을 부리다니 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세간에 퍼진 소문보다 더하면 더 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것이 아르비스 공작이건만···.

    왕태자의 행동은 왕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음으로 몰고 갈 최악의 선택이었다.

    조금은 똑똑한 줄 알았지만, 역시 천성이 그른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뭐, 아르비스 공작을 왕좌에 앉힐 좋은 구실이긴 하지.”

    그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 생각하며 바로 아르비스 공작에게 보고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악당이 된 느낌이군. 아르비스 공작도 그 이야기를 자주 하던데.”

    이왕이면 음모를 당하는 편보다 꾸미는 편이 낫지.

    그게 아인트 공작의 지론이었다.

    똑똑!

    아르비스 공작령과 연결된 텔레포트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아인트 공작은 예고 없던 노크 소리에 의문을 표했다.

    “누군가?”

    “저 실비아입니다.”

    그리고 찾아온 인물이 공주란 것을 알게 된 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베이지색에 검은 프릴이 들어간 드레스를 입은 공주는 단아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집무실에 들어왔다.

    “공주 전하께서 이곳엔 어쩐 일로···.”

    아인트 공작의 물음에 집무실을 스윽 둘러보면서 공주는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종이를 발견하며 작게 침음을 흘렸다.

    “아르비스 공작님께 페일 오라버니의 잘못을 알리러 가실 생각입니까?”

    예상치 못한 물음에 그는 크게 놀랐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공주는 조신하게 치마를 접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고, 공주 전하?”

    아인트 공작은 당황해서 그녀를 일으키려 했지만, 함부로 공주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어 쩔쩔맸다.

    근래 들어 자신을 이렇게 당황시키는 사람이 아르비스 공작 외에 또 있던가?

    “부디 이번 사태를 왕가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공주는 맑은 눈망울로 아인트 공작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페일 왕태자의 처리 말입니다.”

    얌전한 태도와 순진해 보이는 눈빛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아인트 공작은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연기를 이어갔다.

    “왕태자 전하의 처리라니.”

    “처리라는 표현이 애매모호 했나요? 꼭 제거라는 단어를 써야 이해하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통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챙.

    그러나 아인트 공작은 공주가 품에서 꺼내는 작은 단도로 인해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하지만 그 단도는 아인트 공작에게 향하지 않고, 공주 자신의 목덜미로 향했다.

    “공주님!”

    아인트 공작을 바라보는 공주의 눈빛엔 굳은 결심이 담겨 있었다.

    “아인트 공작께서 아르비스 공작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제 고집에 어울려 주셨으면 합니다. 죽는 것은 한사람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이, 일단 그것부터 내려놓으시죠.”

    “아인트 공작님께서 오라버니의 잘못을 고한다면 저희 왕가 사람은 모두 제거되겠죠. 아니, 어쩌면 저 하나 정돈 가엽게 여겨 살려주실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 가족이 모두 떠나고 저 혼자 무슨 낯으로 살겠습니까? 저도 결국 가족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공주는 지금의 상황과 그로 인해 발생할 결과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아인트 공작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공주는 손에 힘을 주었고, 그녀의 단검이 목덜미에 파고들며 새빨간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매한가지.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이뿐입니다.”

    아르비스 공작은 공주에게 꽤나 마음을 쓰고 있다.

    수시로 안부를 묻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

    때문에 페일 왕태자로 인해 아르비스 공작이 왕가에 분노하여 심판 검을 뽑아들어도 그녀는 살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분께선 저를 가엽게 여기고 계시죠. 그런데 제가 만약 이곳에서 죽는다면 아르비스 공작님께서 어찌 생각하실까요?”

    “······.”

    실비아 공주를 향한 아르비스 공작의 연민.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무기였다.

    *

    국왕 위의 공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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