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186 --------------
“무, 무슨?”
기세 좋게 다르닐과 함께 나타났던 적들이 크게 당황하는 게 웃겼다.
“뭐긴 망한 거지.”
내 환영 인사와 함께 아군의 마스터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스텔라 경, 아드리안 경.”
“네!”
단순한 호명에도 뭘 원하는지 찰떡같이 알아들은 두 사람은 유유히 날아올라 토벌군을 공격하며 아군 병사들을 도왔다.
“젠장!”
욕설을 내뱉으며 양쪽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힘겹게 막아낸 다르닐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아마 그들 입장에선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아르비스 공작이 성녀를 돕는다는 가정하에 이쪽 초인의 수가 최대 6명 정도라 생각했을 터.
그럼 대주교를 포함한 5명으로 충분히 우릴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초인의 수가 무려 아홉.
덕분에 그들은 스텔라와 아드리안이 병력을 학살하는 것을 보면서도 손을 쓰지 못했다.
나는 난장판이 되어버린 성곽에서 마스터들을 보조하는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설마 대주교도 싸움 잘하는 건 아니죠?”
4:5의 싸움에도 경지의 차이인지, 마스터 팔라딘의 특성 때문인지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아군의 모습에 성녀는 직접 싸울 준비를 하며 답했다.
“못하진 않는데, 마스터에 비할 수준은 아닙니다. 굳이 따지면 중급 뭉크 수준이고 전투보다 보조에 특화된 초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할만하지.
블링크로 대주교의 등 뒤로 이동한 나는 혼전을 틈타 텔레포트로 그를 납치했다.
이런 전투의 정석은 힐러 먼저 잡는 거라 생각한다.
쾅!
주변의 풍경이 바뀌자마자 대주교의 주먹이 날아왔다.
그러나 이미 오토 쉴드로 방비를 하고 있던 나는 아무 피해 없이 기습을 막아내며 바로 반격했다.
피피핏!
“끄아악!”
손에 쥐고 있던 붉은 마력이 수십 개의 가시가 되어 화살처럼 뻗어 나가고, 순식간에 대주교의 전신을 관통했다.
그로 인해 대주교는 마치 핀셋에 고정된 곤충처럼 공중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괜히 대주교라 불리는 것이 아닌지, 그는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필사적으로 세인트 쉴드를 펼쳤다.
실로 대단한 정신력이다.
세인트 쉴드에 붉은 가시들이 가위로 자른 것처럼 끊기고 대주교가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피로 붉게 물든 로브.
하지만 대주교의 상처에서 빛이 나며 벌집이 된 그의 몸에 새살이 돋아나 빈자리를 채웠다.
“역시 성직자는 별로네.”
초인급되는 성직자는 모두 성퀴벌레인 모양이다.
하늘은 날지 못하는지 대주교는 그대로 땅에 처박혔는데,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것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힐끔 시선을 돌려보니, 적군 마스터 네 명이 성녀가 포함된 6명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우리가 유리한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아직까지 성왕 측 마스터에게 이렇다 할 유효타를 주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때 새하얀 광선이 하늘에 떠 있는 나를 향해 맹렬히 뻗어왔다.
성문을 공격했던 대주교의 신성 마법이었다.
“완전 마전사네.”
등 뒤에 지킬 것이 없는지라, 블링크로 공격을 피하며 그의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근거리에서 작렬하는 플레임 블레스터.
그런데 대주교는 노구에 어울리지 않는 짐승 같은 몸놀림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미친!”
설마 이걸 피할 줄이야.
나는 당황했고, 대주교는 자신을 우습게 봐선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순진하시네.”
그러나 상대를 우습게 본건 내가 아닌 바로 그다.
“뭐?”
투투투투툭!
땅속에서 붉은 가시들이 솟구쳐 오른다.
“끄악!”
피할 틈 없이 온몸을 관통당한 대주교가 피를 쏟으며 다시금 사지가 고정되었다.
사냥꾼이 사냥에 성공하면 이런 느낌일까?
한 치의 착오 없이 내 유인에 어울려 주니, 고맙기까지 하다.
“세, 세인트···.”
한번 놔줬는데, 굳이 또 놔줄 필요는 없지.
나는 급히 방어막을 펼치려는 대주교를 향해 손을 휘둘렀고, 바람의 칼날이 방어력이 생성되기 전에 그의 목을 훑었다.
그리고 대주교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부웅.
내가 강한 걸까?
아니면 그가 보조를 전문으로 한 인물이라 그런 걸까.
초인으로 분류했던 대주교와의 전투는 생각 이상으로 빨리 끝났다.
“딱 좋은 상대였네.”
코어의 마력은 참 활용도가 높은 것 같다.
이론이 충분히 현실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근접전에서도 허둥지둥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쾅쾅쾅!
요란한 폭발음에 고개를 돌리니, 스텔라와 아드리안이 신나게 마법을 퍼붓고 있었다.
전황은 제법 팽팽했다.
숫자와 장비에선 성녀군이 압도적으로 밀리지만, 장소의 이점이 있고 두 대마법사가 가볍게 빛의 화살을 막아내며 공격을 퍼부으니, 적들의 피해가 무섭게 쌓여갔다.
“좋아.”
저긴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만족한 나는 성녀를 돕기 위해 움직였다.
오러블레이드가 난무하는 전투 현장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
반쯤 무너져 내린 성곽에서 묘기를 부리듯 6:4의 전투가 이어졌다.
“성녀님!”
“네!”
내 손을 떠난 바람의 검 두 자루가 성녀와 치고받고 있는 마스터에게 날아들었다.
나는 5클래스 마법인 바람의 검을 어검처럼 조종하며 적을 괴롭혔다.
가뜩이나 성녀를 상대로 밀리고 있는데, 다리와 등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에 적은 당황하다가 결국 성녀에게 유효타를 허용했다.
빡!
마스터의 한쪽 팔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고 기회를 노린 바람의 검이 그의 배와 가슴에 박혔다.
“컥!”
그런 마스터를 향해 성곽 밑에 있던 성직자들이 힐을 쏟아부었으나, 이어진 성녀의 주먹에 머리가 부서지며 절명하고 말았다.
마스터 한 명이 쓰러지면서 6:4의 전투가 순식간에 7:3의 전투로 바뀌었다.
전의를 상실한 적들은 도망치기 위해 한곳으로 모였다.
“도망치려면 아까 했어야지.”
“컥!”
그러나 그 과정에 다르닐을 제외한 두 초인의 목이 날아가고.
“빌어먹을···.”
결국 다르닐만이 살아남아 욕설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한 놈을 놓친 게 아쉽긴 하지만···.”
성왕의 초인들을 넷이나 잡아 먹었으니, 이제 전황은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성녀로부터 광역 힐인 은혜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나와 마스터들은 토벌군을 처리하기 위해 바로 몸을 날렸다.
콰콰쾅!
으아아악!
전장에 널리 퍼지는 노랫소리에 마법의 폭음이 연주를 더하고, 적군의 비명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그렇게 전쟁은 초인들의 활약에 힘입어 유례없는 대승으로 끝이 났다.
이날 전투에서 토벌군 전력 약 10만 중 6만을 사살했으며, 3만이 포로가 되고 1만이 전장에서 도주했다.
***
“뭐, 뭐라! 대패? 지금 이타루스의 최정예 군사가 마녀의 잡졸 따위에게 대패를 했단 말이냐?”
“······. 그렇습니다.”
거지꼴로 고개를 숙인 다르닐 후작을 바라보던 성왕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다시 확인했다.
“그러니까, 데이브 후작, 소비드 후작, 자린 후작과 대주교가 죽고, 최정예 병력 약 10만이 전멸했다?”
엄연히 따지면 전멸은 아니지만, 이건 사실상 전멸이나 다름없었다.
“죽여 주십시오.”
쾅!
성왕은 결국 분을 못 참고 성큼성큼 성좌에서 내려와 다르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
머리카락에서 뚜두둑 소리가 났지만, 그는 불평을 내뱉지 못하고 허망한 눈빛으로 답했다.
“반란군의 숨겨진 전력이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대마법사는 셋이었고 마스터는 다섯이었으며 성녀까지 더해지니, 저희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뭐라?”
“현재 성녀 쪽의 초인만 무려 아홉입니다.”
성왕은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거칠게 고개를 내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다르닐 경, 살고 싶어서 짐에게 거짓을 고하는가!”
“치욕을 겪으며 뻔뻔히 사느니,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성녀는 정말 악마와 결탁한 마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왕은 다르닐의 머리를 놓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에 정보부 부장이 다가와 성왕을 부축하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다르닐 후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전쟁은 애초에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이제 성왕에게 남아 있는 초인은 다르닐 후작이 유일했다.
“마녀의 군세는?”
성왕의 물음에 그를 부축한 정보부 부장이 답했다.
“약 5만 정도가 수도를 향해 북상하고 있습니다.”
“5만? 숫자가 더 늘지 않았나?”
“구, 국민들이 마녀의 간언에 속아 넘어가 이번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무장하여···.”
“우리의 전력은 줄었는데, 그들은 늘고 있다?”
“그래 봤자 절반은 잡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
성왕은 성좌 아래의 계단을 차지하고 앉아 머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과로로 지친 가장의 모습과 비슷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성왕과 영주들이 조금 더 국민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사태는 이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생활이 어려운 국민은 더욱 종교에 기대게 만드니, 성녀의 힘을 키워준 것은 여신의 신성함이 아닌, 욕심 많은 성왕과 귀족들의 착취였다.
“수도를 보호해야 한다.”
“현재 수도권의 잔존부대와 주변 영지의 사병을 차출하고 있습니다. 성녀가 수도에 도착할 때면, 15만 정도의 병력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여유만 있다면 충분히 30만 이상의 병력을 끌어모을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시간은 더 이상 성왕의 편이 아니었다.
“병력의 수준은?”
“아무래도 대부분이 일반 보병으로 기병과 중장보병, 성력총수 같은 고급 병력은 다 합쳐도 1만이 채···.”
“기사는?”
“성기사 합쳐도 천오백이 한계일 듯합니다.”
숫자만 많을 뿐이지 전력은 전멸한 10만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성왕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 영지에서 병사도 기사도 철저하게 끌어모아라. 어차피 마녀가 노리는 것은 짐만이 아닌 반대세력의 모든 귀족이니.”
“알겠습니다.”
그 상태로 계단에 앉아 고민에 빠진 성왕의 머릿속에 며칠 전 자신이 무시했던 한 가지 제안을 떠올렸다.
‘원하신다면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안된다는 것은 알지만, 어차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성왕은 칼바도스 제국이란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
쾅! 쾅!
이타루스 성왕국의 수도 포름힐.
“시민들은 동문으로 이동하시오! 그곳은 안전하오!”
이미 수도의 외성은 파괴된 지 오래다.
성녀의 군대는 나를 포함한 대마법사들의 활약으로 큰 피해 없이 수도에 입성했다.
하지만 성왕군이 전투를 시가전으로 몰고 가자 시민들에게 큰 피해가 발생했고, 그에 우리 군은 주춤거리며 크게 애를 먹어야 했다.
싸우랴, 시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랴 모두들 바쁘게 움직였다.
“미친놈들이네. 국민을 미끼로 쓰다니.”
시민이 가운데 끼어 있으면 성녀군은 공격을 못 했으나, 성왕군은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망설이지 않고 공격을 날렸다.
그래도 성녀군에 가세한 성직자의 수가 2천을 넘기고 성녀의 광역버프와 광역힐 덕에 피해를 받으면서도 꾸역꾸역 왕성을 향해 전진했다.
내 혼잣말에 화려한 미스릴 갑옷에 마법검, 미스릴 롱소드로 존재감을 드러낸 블레이크가 맞장구를 쳤다.
어차피 이쪽의 전력은 지난 전투에서 모두 들통난 상태니 굳이 장비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성왕이란 자는 국민을 착취의 대상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혀를 찬 나는 이제 완전히 친해진 성녀측의 크리드 후작을 향해 물었다.
“왕성은 8클래스 이하의 마법에 파괴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성왕을 잡기 위해선 성벽을 넘어 정면을 뚫고 가야 하죠. 그나마 다행히 내성의 문과 창문은 파괴 가능합니다.”
싱글벙글 답하는 그의 모습은 이미 승리에 대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
“그런데 실험은 해보신 건가요? 여신님께서 미드랜드에 관여를 안 하시다 보니, 부여한 축복이 약해질 수도 있잖아요. 아, 딱히 신성 모독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이니까요.”
이타루스에서 마법사를 불러다가 실험해 본 것이 아니니, 크리드 후작도 확실히 답을 못했다.
그런데 내 물음에 답한 것은 크리드 후작이 아닌 성녀였다.
“왕성의 축복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감히 제가 흉내 낼 수 없는 엄청난 신성력에 보호를 받고 있죠.”
이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타루스의 왕성은 최악의 요새였다.
9클래스의 마법으로만 파괴할 수 있다니, 헬파이어가 날아와도 무사하단 뜻이 아닌가?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실험 삼아 한 방 날려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