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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마법사-17화 (1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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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우스 백작가는 5세기 동안 큰 위협 없이 영지를 운영해온 나름 전통있는 대귀족이다.

    대귀족 중에 크게 튀지도 않고, 특별한 것이 없음에도 가문을 이어올 수 있던 까닭은 왕국에서도 최고라 손꼽히는 곡창지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 백작령은 마드세인 왕국의 최대 밀 생산지로 국내 총생산량의 2할을 홀로 담당해 한해 밀값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문이었다.

    덕분에 제철소나 아티팩트 공장처럼 그럴싸한 산업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음에도 오랜 세월 대귀족의 직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얼마라고요?”

    “총 2,205,120골드입니다.”

    역시 오랜 세월 대귀족으로 가문을 유지해왔기 때문일까?

    모든 장부를 정리해 현금 보유량을 확인한 나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220만 골드라니, 무려 대한민국으로 치면 22조에 달하는 금액이 아닌가?

    영주란 존재가 해당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였다.

    “영지 한해 운영비가 얼만데요?”

    “약 2만 골드 정도입니다. 이 중 1만 골드는 군대를 포함해 영주님을 위해 일하는 자들의 임금이옵고, 나머지는 대부분 유지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약 120년 동안 수입이 없어도 영지를 운영할 수 있는 엄청난 자금.

    얼마 전 카이도 남작령의 탄광마을로 보내버린 다리우스 백작의 가족에게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좀 쥐어서 보내주는 거였는데.

    가지고 있는 거 탈탈 털어서 맨몸으로 쫓아낸 백작의 가족을 떠올린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어쩌겠어.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니.”

    “네···?”

    죽인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지 행정관을 보며 나는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서류를 움켜쥔 행정관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어째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더 쌓여만 가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영지에서 상회도 운영 중이라면서요?”

    “그, 그렇습니다. 다리우스 상회는 영지에서 생산한 곡물을 주로 다루고 있사온데, 상회의 규모는 직원 850명, 자본금 7만 골드, 한 해 매출 10만 골드로 왕국 10대 상단 중 한 곳입니다.”

    하긴 왕국 최대의 곡물을 생산하는 이곳의 밀만 다뤄도 충분히 10대 상단에 들만했다.

    자신이 추수한 밀을 가지고 자신이 만든 상회로 판매한다.

    심플 하면서도 효과적인 수익구조 아닌가.

    백작가의 엄청난 재산이 납득이 된다.

    다리우스 백작가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이 모은 재산은 내가 알뜰히 써줄 생각이다.

    당연히 돈이 많다고 영주민들의 세금을 없애는 바보 같은 짓은 안 하겠지만 말이다.

    “지금 영지 세율과 한해 세수입은 어떻게 됩니까?”

    “영지 세율은 현재 60%이며, 한해 세수입은 약 2만3천 골드입니다.”

    한해 세수입 2만3천 골드, 한해 영지운영비 2만 골드.

    이렇게 따지면 얼마 되지 않는 금액 같지만, 기본적으로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땅은 모두 영주의 땅이며 수확한 곡물도 영주의 것이다.

    그리고 농부는 수확한 곡물에서 일정 비율을 급여로 받게 되는데, 여기서 또 세금으로 6할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얻은 세금이 2만 3천 골드였고, 농부들이 피땀 흘려 수확한 곡물은 애초의 영주의 것이니 세금이 아닌 영주의 개인 자산으로 분류가 된다.

    영주의 재산이나 다름없는 영지민은 토지를 소유할 수가 없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농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세금 비율은 30%로 낮추죠.”

    “네?”

    행정관이 놀란 표정을 짓자, 나는 그게 뭐가 놀랍냐며 말했다.

    “영지의 주민이면 세금을 내는 건 당연하지만, 60%는 너무했죠. 솔직히 저는 30%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이 정도로 하고 나중에 상황 봐서 더 줄일지, 고정할지를 정하도록 하죠.”

    무조건 영지민에게서 세금을 많이 뜯는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라 생각한다.

    세율에 비해 세수입이 많은 것도 아닌데, 차라리 경제권을 부여해 자금이 돌 게 만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차피 이 시대엔 복지라는 것 자체가 없는데, 내 땅에 산다는 이유로 고세율의 착취를 하는 건 푼돈에 목을 매는 1차원적인 사고방식 같다.

    “아, 알겠습니다. 아직 다리우스 백작령은 카이도 남작령으로 분류가 되기 때문에 세율 변경은 정식 영주가 되시고 나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의 말을 수긍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탁상시계를 집어 현재 시각을 살폈다.

    [14:20]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요. 지금 바로 수행원을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세금 이야기 이후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행정관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게 된 나는 아공간에 넣어둔 장비들을 꺼냈다.

    어차피 안티매직 로브(5단계 이하 마법 완전방어)는 영주성에서 입을 필요가 없는지라 평소엔 유적에서 가져온 검은색의 가벼운 활동복 차림으로 생활했다.

    순백의 바탕에 은색실로 대마법 방어진이 수 놓인 안티매직 로브는 어떤 의복보다도 화려한 멋을 갖고 있다.

    거기에 미스릴로 만들어진 써클릿과 팔찌, 반지들이 더해지니, 왕성에 가도 꿇리지 않는 고급스러움이 완성되었다.

    “그럼, 슬슬 가볼까.”

    오늘이 바로 국왕의 초대로 작위를 받으러 왕성에 가는 날이다.

    오후 3시에 작위식이 거행된다고 했으니, 이제 슬슬 출발하면 될 것 같다.

    내가 서재를 나서자, 잘 차려입은 다리우스 백작의 기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출발하죠. 행정관과 집사는 물러나세요.”

    내 말에 두 사람을 포함해 시녀들은 얼른 거리를 벌렸고, 나는 미리 허가를 받은 좌표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텔레포트는 바로 순간 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이동 예정 지역의 이상 여부를 확인하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어서 사고가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팟!

    푸른빛이 가시고 시야가 바뀐다.

    내가 이동한 곳은 웅장한 왕성을 옆에 둔 어느 망루였는데, 발아래 펼쳐진 수도의 풍경에 감탄사를 토했다.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보면 이런 느낌이었나?

    비록 마드세인이 대국이라 할 순 없지만, 역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국가여서 그런지 수도의 규모는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도시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10층이 넘는 건물도 많고, 여기저기 랜드마크처럼 자리 잡은 화려한 관청은 각 구획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하늘엔 감시용인지 비공선이 떠다니고, 다른 도시에선 한 대 구경하기 힘든 마력차가 전용도로를 달리니, 내가 살던 노라 마을과 도저히 같은 세계로 보이지 않았다.

    “멋지네.”

    변경 영지의 농부들은 겨울이 생존의 시험대와 마찬가지고 열심히 일하고도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은데, 이곳은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어 보인다.

    “마드세인 왕국의 심장 바이탈 캐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체르닐 자작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를 마중 온 사람은 그나마 얼굴을 아는 체르닐 자작이었다.

    “작위식 전에 대마법사님을 뵙길 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날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어중이떠중이를 위해 국왕의 보좌관이 이런 말을 할 리 없겠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를 따라 왕성을 구경하며 응접실로 보이는 곳에 들어갔는데, 그곳엔 세 명의 중년인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이들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마드세인 왕국을 지탱하는 세 기둥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루이스라고 합니다.”

    나와 같은 7개의 서클을 가진 인물이 왕립 마탑주 카르디아 공작일 것이고, 엄청난 오러를 품고 있는 인물이 국군 총사령관 제노아드 공작일 거다.

    마지막으로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인물은 재상 아인트 공작일 터.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가 멤버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체를 못 알아채는 게 바보였다.

    내 인사에 카르디아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제노아드 공작은 감탄사를 토했다.

    “놀랍군, 심장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대마법사가 분명한데. 외형 어디에서도 마법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

    “이게 저의 실제 모습이니까요.”

    “그래 보이는군.”

    제노아드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악수를 건네왔다.

    “반갑네, 마드세인 왕국의 미래를 비출 등불이여. 나는 제노아드 공작이라 하네.”

    거창한 호칭이 오글거렸지만, 이어진 아인트 공작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아 멋쩍은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어서 나와 같은 포지션의 카르디아 공작과 악수를 하는데, 갑자기 그의 심장에서 느껴지는 마력에 어리둥절할 표정을 지어야 했다.

    “카, 카르디아 공작. 무슨 짓인가!”

    제노아드 공작의 호통에 카르디아 공작은 히죽 웃으며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뭘, 선배로서 그의 수준을 알고 싶을 뿐이네.”

    “아무리 그래도 일면식이 없는 사람에게 이러는 건 무례가 아닌가!”

    보아하니 제노아드 공작은 내게 호의적이고, 아인트 공작은 중립적, 카르디아 공작은 적대적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왕성에서 접근해올 때가 됐는데 왜 그렇게 늦나 했더니, 카르디아 공작님 때문이었나 봅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카드디아 공작이 하는 건 ‘서클 프레셔’라고 자신보다 낮은 경지의 마법사를 제압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는 어지간히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서클 프레셔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기운을 튕겨냈고, 놀란 표정을 짓는 카르디아 공작의 손을 풀었다.

    “제 수준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선배님.”

    “큭.”

    얼굴을 붉히며 인상을 쓰는 카르디아 공작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여야 했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카르디아 공작의 ‘서클 프레셔’가 내게 완벽하게 밀렸기 때문이다.

    “하하하, 자자! 진정하고 다들 앉지.”

    제노아드 공작은 뭐가 그리 좋은지 호탕하게 웃으며 내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장비들이 범상치 않군.”

    평범한 인간임에도 눈썰미 좋은 아인트 공작이 나를 훑어보며 물었다.

    “스승님께 물려받은 아티팩트입니다. 새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굉장히 오래된 것들이죠.”

    “스승님이라···. 혹시 어떤 분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자네를 특수한 방법으로 수련을 시켰다고 들었네만.”

    “죄송합니다. 은거를 선택한 분이라.”

    “부디 스승이란 인물이 적국의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카르디아 공작, 자네 계속 애처럼 굴 건가?”

    “쯧!”

    나로 인해 자신의 세력이 줄어드는 걸 걱정하는 걸까?

    계속 시비를 거는 카르디아 공작의 모습에 실소를 흘린 나는 별수 없이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여러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군요. 저도 소란을 피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괜히 의심받는 것도 싫고요.”

    내 행동에 의문을 표하는 세 명의 공작.

    나는 마나 서클을 활성화하며 말했다.

    [마나에 고한다. 내 이름은 루이스. 마드세인 왕국 소속으로 다른 세력의 첩자가 아니다. 나는 마드세인 왕국의 혼란을 원치 않으며, 누구에게도 타인을 해하고 배신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

    허공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동시에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온 붉은 마나가 내 전신을 감싸다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이변에 긴장했던 세 공작이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

    내가 한 행동은 마나의 언약라는 것이다.

    마법사가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목숨을 건 맹세를 할 때 사용되는 마법의 말.

    만약 마나의 언약에 거짓을 고하거나, 맹세를 어길경우 마법사는 서클이 붕괴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조작할 수 없는 이 세계의 법칙 중 하나였다.

    “됐죠?”

    내가 이래도 불만이냐는 표정으로 카르디아 공작을 바라보자 그는 어버버 말을 잃었고, 제노아드 공작과 아인트 공작은 박수를 치며 내게 다가왔다.

    “면목이 없군, 카르디아 공작을 대신해 내가 사과하지.”

    “의심을 지워줘서 고맙네!”

    마나의 언약으로 두 공작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 모양이다.

    다만 카르디아 공작은 구석에 얌전히 찌그러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와는 친해질 일은 영영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작위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인트 공작, 제노아드 공작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드디어 작위식의 시간이 되었다.

    요란한 팡파르가 울리고, 나는 레드카펫 양옆으로 줄지어 선 귀족들을 지나쳐 왕좌를 향해 다가갔다.

    왕좌 앞에는 한 중년인이 얼굴 한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보고 있었는데, 전생의 선전 포스터에서 익히 본 얼굴이다.

    그가 바로 ‘카르가 데 로이드 마드세인 2세’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 나라의 국왕이었다.

    아무래도 마나의 언약에 대해 들었는지,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호의로 가득했다.

    내 마나의 언약은 첩자가 아니라고만 했지,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 나라가 많이 힘들긴 한 모양이다.

    난 마드세인에서 이것저것 챙기고 정 아니다 싶으면 전쟁 나기 전에 뜰 생각인데.

    내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나와 내 가족의 인생이지, 애국심이 아니다.

    전생에 폭탄 아티팩트를 목에 걸고 원치않은 전장에 나선 사람에게 애국심이 있을 리가 있는가.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왕은 온갖 미사어구로 나를 포장하며 선언했다.

    “대마법사 루이스에게 ‘아르비스’란 성과 함께 후작의 작위를 하사하며! 다리우스 백작령의 신임 영주임을 인정한다.”

    아르비스가 내 성이 되는 건가.

    ‘라인하트’나 ‘호크아이’같은 임팩트 있는 성에 비해 약한 느낌이지만, 부드러운 발음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제 내 풀네임은 ‘루이스 로이드 아르비스’가 되는데, 미들네임 ‘로이드’는 영주임을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왕의 말을 끝까지 들은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 이유는 바로 국왕이 작위 이외에 하사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마법사인 이상 후작의 작위쯤은 받아야 수지에 맞고, 작위를 받는다면 당연히 영지가 하사 되어야 하는데, 다리우스 백작령은 이미 내 힘으로 얻은 사유지였다.

    솔직히 영지를 하나 더 내려야 하는 거 아닌가?

    어째 대마법사를 너무 날로 먹으려는 느낌이다.

    내가 표정이 좋지 않자 국왕이 조용히 말했다.

    “추가 선물은 따로 이야기하세.”

    언제 그랬냐는 듯 인상을 편 나는 국왕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귀족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짧은 작위식이 끝이 났다.

    봉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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