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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사용자 이름을 지정해주세요.]
안내 메시지와 함께 내 앞에 주황색의 자판이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자판 입력이라니···.”
나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지금의 로이아스 대륙에도 컴퓨터와 비슷한 개념의 ‘연산 단말’이란 것이 있지만, 그것은 마법을 보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름처럼 연산만을 담당하는 장비였다.
기능으로만 보면 단순 계산기에 가까운 형태.
때문에 복합적인 명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한국의 키보드처럼 다양한 입력 버튼이 있는 것을 보며 새삼 마법 공학도 지구의 전자기계공학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것은 어딜 가나 비슷한 모양이다.
비록 마도시대의 사람이란 인류가 아닌 조금 더 신화적인 존재들이지만 말이다.
이거 어쩌면 현존하는 인간 중에 마도시대 문명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은 사람은 나일 수도 있겠다.
“이게 L발음이고, 이게···.”
마도시대의 언어에 통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이 남긴 마법을 배운 이상 간단히 알파벳 정도는 읽고 쓸 수 있다.
나는 신중하게 한 글자씩 입력했고, 왠지 엔터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가장 큰 버튼을 마지막에 눌렸다.
[루이스 님이 맞습니까?]
“그래.”
다행히 제대로 입력을 한 모양이다.
[출입문을 개방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루이스 님.]
바뀐 인사말과 함께 거대한 문이 스르르 열렸고 새하얀 빛이 시선을 자극했다.
나는 눈을 찡그리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시설 내부의 명도를 조절합니다.]
“······.”
분명 전생에 트리우스 백작가의 차남이 이곳을 탐사했을 때만 해도, 마치 중요한 물건은 도둑맞은 것처럼 유적의 내부가 텅텅 비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여긴 왕국에선 백작을 불러 추궁하기까지 했지만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 못 했고, 결국 유적은 왕실의 선전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직접 유적 내부에 들어와 보니 어쩌면 트리우스 백작가에서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눈 부신 빛이 가시고 눈에 들어온 유적 내부의 풍경 속에 다양한 장비와 물건들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철거인이 나를 내려보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이게 무슨···.”
내가 놀란 표정으로 그것을 바로 보자 눈앞에 이런 팝업창이 떠올랐다.
[그랜달의 코어 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무장을 장착하시겠습니까? YES / NO]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YES 버튼을 터치했고, 철거인이 위치한 바닥에서 무수히 많은 기계 팔이 튀어나와 마치 로봇을 조립하듯 녀석에게 장갑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이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춰가자 나는 표정을 굳혀야 했다.
“어?”
저거다.
전생에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칼바도스 제국의 신병기.
생김새가 약간 다르고 크기도 훨씬 크지만, 분명 ‘기간트’라 불리는 칼바도스의 마도병기와 비슷했다.
전생에 나는 저것에 짓밟혀 최후를 맞이했다.
“트리우스 백작 그 새끼가 칼바도스에 넘긴 거 아냐?”
물론 이런 유적이 칼바도스에도 없으리란 법은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냐면 트리우스 백작의 주장과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너무도 달랐으니 말이다.
칼바도스 제국의 신병기는 이 녀석의 열화판이 분명했다.
“멋지긴 하네.”
잠시 후 그랜달이란 이름을 가진 마도 병기가 온전한 형태를 드러냈다.
녀석은 무장을 갖추면서 크기가 더욱 커졌는데, 막 뽑은 새 차처럼 매끄러운 자태와 멋들어진 외형은 절로 감탄사를 불러일으켰다.
녀석은 분명 나를 죽인 병기와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그것 때문에 무섭진 않았다.
적어도 이 녀석은 나를 공격하진 않을 테니까.
[현재 그랜달의 시스템이 초기화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사용자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사용하는 건데?”
나는 미간을 좁히며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적은 내 물음에 답을 해주었다.
[그랜달의 운영방식은 3가지입니다. 직접 내부에 탑승해 조종하는 방식, 외부에서 마나 컨트롤을 통해 원격 조종을 하는 방식, 자동지원 모드를 통해 독자적 행동권을 부여하여 사용자를 보호하는 방식입니다.]
자동지원 모드라니, 골렘과 같은 건가?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든든한 호위를 얻을 수 있다면 나야 땡큐지.
나는 당연히 사용자 등록을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내 대답에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사용자 등록에 실패했습니다. 사용자 등록을 하시려면 마나 익스퍼트 급의 능력치가 필요합니다.]
먼저 사용자 등록을 할 거냐고 물어놓고 능력치가 딸려 안 된다니.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럴 거면 묻질 말던가.”
그나저나 마나 익스퍼트가 뭐지?
소드 익스퍼트와 비슷한 건가?
“마나 익스퍼트가 마법사로 치면 몇 서클인데?”
[의미 불명. 예시, 서클은 마법 단계를 뜻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녀석에게 등록된 명칭과 지금 사용되는 명칭이 다른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설명을 추가했다.
“마법사가 심장에 만드는 마나 고리 있잖아. 그게 몇 개가 돼야 마나 익스퍼트냐고.”
[확인했습니다. 마나 익스퍼트는 심장에 다섯 개의 고리를 가진 5단계 마법사를 뜻합니다.]
아무래도 마나 익스퍼트란 지금의 고위 마법사와 고위 기사를 뜻하는 모양이다.
결국 지금의 나로선 꿈도 못 꾼다는 소리에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어깨를 으쓱인 나는 그랜달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유적 내부를 살펴보는데, 내 시선에 따라 수많은 팝업이 홀로그램처럼 떠오른다.
[주 화면]
[보조 화면]
[중앙 통제 장치]
[통신 단말]
[보안 단말]
[범용 통신 단말]
[범용 통신 단말]
[보조 전원 장치]
[자판기]
[자판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들어온 출구 옆에 위치한 공간으로 상황실처럼 생긴 곳이었다.
그곳에 다가가 중앙 통제 장치란 것에 손을 대니, 유적의 설계도와 같은 지도가 주 화면에 떠올랐다.
지도만 봐선 유적이 그리 커 보이진 않았다.
내가 위치한 곳이 관리구역과 격납고가 합쳐진 곳이었는데, 그것과 비슷한 구역이 3개가 더 있을 뿐이다.
[그랜달을 격납고에 보관합니다.]
“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뒤쪽에 위치한 그랜달이 땅속으로 딸려 들어갔다.
아무래도 자동 시스템인 것 같다.
[격납고: 그랜달(사용가능), 안타레스(반파 / 수리요망)]
그런데 격납고란 것에 또 다른 뭔가가 들어 있네?
안타레스라는 것을 터치하니, 주화면 지도위로 그랜달보다 육중한 형태의 로봇이 떠올랐다.
[안면 장갑 손실, 우완 손실, 레이더 파괴, 시각 센서 파괴······. (부품 부족 수리 불가)]
하지만 자세히 떠오른 녀석의 상황에 나는 입맛을 다시며 미련 없이 격납고 화면을 닫았다.
[제1구역: 주거시설]
[제2구역: 무기고]
[제3구역: 보관창고(식료품 창고, 보급품 창고, 기밀품 창고)]
그리고 다시 화면에 떠오른 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곳 외에 다른 구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
“대박이네.”
그랜달을 본 순간부터 이곳은 애초에 내가 생각한 곳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많은 권력자들이 발견하길 바라 마지않는 마도시대의 온전한 유적, 즉 보물창고였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보물을 얻게 된 나는 씨익 웃어 보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기고에 향했다.
***
“······.”
루시엘라는 전용 아공간에서 꺼낸 지도를 살피며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지반이 이동한 것 같네.”
지도의 표기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땅의 정령을 소환했다.
“혹시 지하에 거대한 마법 시설이나 공동 없어?”
[탐지 거리 내에 잡히는 이상은 없다.]
“쯧, 아직도 은폐기능이 잘 작동하고 있는 모양이네.”
결국 그녀는 지도를 넓게 펴고 제자리에 앉았다.
“43,000년 전부터 시간에 따른 지반 변화를 조사해줘.”
정령이 계산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중급 이하의 정령은 지극히 1차원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지반의 이동을 하나하나 체크해서 이동 거리를 계산해야 했다.
[알겠다.]
그래도 엘프는 로이아스 대륙에서 유일하게 정령과 정신 교감을 할 수 있는 존재기 때문에, 대화가 아닌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했다.
루시엘라는 로브 깃 부분에 꽂아 놓은 펜을 빼 들며 지도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순서대로 지도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기 시작했는데, 북에서 남으로, Y+축에서 Y-축으로 굉장히 바쁘게 손을 놀렸다.
그렇게 약 1시간에 걸친 계산 끝에, 목표의 현재 위치를 찾아낸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정령을 역소환했다.
“고마워 노움. 고생했어.”
[그대의 부름을 기다리겠다.]
지도를 다시 아공간에 넣은 그녀는 볼펜을 다시 로브 상단에 꽂으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1.3km라 많이도 이동했네.”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쓴 루시엘라는 마법을 사용했다.
“블링크.”
블링크는 시야가 닿는 거리로 공간이동을 하는 마법인데, 엘프의 시력이 매에 비견되는지라, 단번에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근처인데.”
그녀는 혹시나 싶어 탐지 마법을 사용했지만, 역시나 범위 내에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땅을 파서라도 찾아내야 한다는 소린데, 때마침 그녀의 눈에 어린아이가 한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작은 토굴이 눈에 들어왔다.
“위치상으론 맞는 것 같은데?”
루시엘라는 고개를 숙여 그 토굴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토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졌고, 곧 서서 걸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찾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눈앞에 푸른 빛이 반짝이는 웅장한 철문이 나타났다.
[브릴란테 제국 아리아스 방면군 병기고 V1-12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은폐기능이 작동할 때부터 범상치 않았지만, 설마 이렇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유적이 있다니.”
이 유적의 발견은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씨익 웃어 보이며 철문으로 다가갔고, 센서가 부착된 상단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V1-12 신규 사용자 등록.”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규 사용자 등록을 신청합니다. 관리자의 허가 후 입장이 가능합니다.]
“뭐?”
일정 규모 이상의 마도시대 유적이라면 모두 에고의 관리를 받는데, 오랜 기간 사용자가 시설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 기존의 데이터가 초기화되면서 새로운 주인을 찾는다고 들었다.
물론, 데이터가 초기화되는 기간은 모델과 시설마다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마도시대가 막을 내리고 4만 년이 지난 지금이라면 데이터가 100번은 초기화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란 점이다.
“무슨 소리야, 기존 사용자 데이터가 초기화되지 않았다고?”
루시엘라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철문에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정했다.
[현재 데이터 초기화가 예정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언제 데이터가 초기화되는데?”
[10년간 시설의 이용기록이 없으면 메인 서버에 데이터 초기화를 예고하게 됩니다. 예고 기간은 1년이며, 해당 1년이 지나도록 초기화 예고를 중지하지 않을 경우 시설의 관리 기록은 모두 삭제됩니다.]
에고의 설명에 그녀는 뒤통수라도 맞은 것 같은 충격적인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 말은? 최근 10년 안에 신규 사용자가 등록되었다는 뜻이야?”
[해당 질문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이런···.”
대답을 못 한다고 하지만, 그 말 자체가 루시엘라의 생각을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루시엘라는 얼른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살폈다.
스르르륵.
그런데 그녀가 걸어오면서 생긴 발자국이 하나씩 지워지고, 끝내 누군가가 통행한 흔적 자체가 사라졌다.
“젠장, 쓸데없이 주도면밀하긴.”
결국 그녀는 아공간에서 마법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열 수 없다면 뚫어야지.”
루시엘라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맹렬히 자신의 서클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경고, 해당 시설은 7단계 이하의 마법에 대해 100% 방어능력을 지녔으며, 공격을 받을 경우 자위적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행동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못 들어가게 막는다고 해서 그냥 돌아갈 리가 없잖아.”
그녀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지고 동시에 스태프에 투명한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
유적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