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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역시 엘프여도 그 점이 의문이겠지?
당연히 나 같아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꼬맹이가 홀로 여행이라니.
더구나 그녀는 5클래스 이상의 마법사이기 때문에 내가 2클래스의 마법사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여러모로 수상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그냥 사실을 말하되 전부를 밝히지 않기로 했다.
“제 발전을 위해서요.”
예상치 못한 대답일까?
그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부모님은?”
“아마 집에 계시겠죠.”
“부모님이 이런 여행을 허락했어?”
“그래서 가출을···.”
내가 생각해도 가관인데, 그녀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엘프라고 해서 기본적인 사고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지, 결국 그녀는 내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무모해.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어.”
“그럼, 어쩔 수 없죠.”
이미 두 차례에 걸친 죽음을 기억하고 있기에 죽음이란 것도 그렇게 무섭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빌빌거리며 추하게 살다가 가는 게 더 무섭지.
내 반응에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죽음이 무섭지 않아?”
“저도 당연히 죽긴 싫죠. 그런데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루시엘라는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참 이상해. 분명 어린아이인데, 이상하게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거든. 말투며 사고방식도 어린아이 같지 않고.”
“적어도 은인께 거짓말은 안 했습니다.”
“그래, 거짓말‘은’ 안 했지.”
말에 가시가 있다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 보다.
같은 문장임에도 어느 부분을 강조 하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대체 너 정체가 뭐야?”
“정체라뇨···.”
나는 애써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그녀의 진지한 눈빛에 입을 닫아야 했다.
나를 향한 그녀의 행동에는 충고와 걱정이 배어 있었지만,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실적 판단 때문에 계획을 접을 생각은 전혀 없다.
더구나 처음 본 인물에게 내 본모습을 밝힐 이유 또한 없다.
덕분에 따뜻했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고, 자리에 불편함을 느낀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가장 값비싼 물품인 볼펜과 금화를 꺼내 그녀에게 보답으로 건넸다.
“그리고 변변치 않은 겁니다만, 제가 갖고 있는 물건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입니다. 구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니 받아 주세요.”
금화와 볼펜이라니, 묘하게 어울리는 조합이 아닌가.
그녀는 내 작은 손위로 놓여 있는 두 개의 물건을 바라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됐다. 내가 괜한 말을 했어.”
짧게 혀를 찬 그녀는 볼펜만 챙기고는 그것을 브로치처럼 로브 상단에 걸었다.
“만약 엘프에게 도움을 받는 일이 있다면, 돈은 내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불쾌해하거든. 그에 반해 이 볼펜처럼 실용적인 물건은 반감 없이 받을 수 있지.”
그녀가 마법을 해제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다시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지 말고 더 쉬고 가. 어차피 또 무리할 것 같은데.”
작게 한숨을 쉰 나는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 공간의 주인인 그녀의 말을 거부할 순 없었다.
그 후 루시엘라는 더 이상 껄끄러운 설교는 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몇 살이냐’, ‘마법은 누구에게 배웠냐’, ‘목적지는 어디냐’ 등 많은 것을 캐물었다.
엘프가 미의 종족이라 들었는데, 뜻밖에 수다의 종족인 걸까?
“트리우스 백작령? 나도 그쪽이 방향인데 함께 가면 되겠네.”
“네?”
올해로 150살(인간으로 치면 20살)인 루시엘라의 오지랖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 엘프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예전에 읽은 신학서엔 엘프가 엄청 배타적인 종족으로 설명이 되어 있었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가볍게 말했다.
“넌 굉장히 위태로워 보이거든. 그냥 순순히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어때?”
첫인상과 느낌이 너무 다르다.
더구나 청순함의 끝을 달리는 듯한 그녀의 미모와 어울리지 않는 호쾌함.
결국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다른 인간에겐 그러지 마세요. 인간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거든요.”
“엘프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뭐긴, 오지랖 겁나 넓은 종족이지.
나는 이왕 그녀의 호의를 받기로 한 거 편하게 가방에서 침낭을 꺼냈다.
이김에 잠이나 더 자둬야겠다.
“루시엘라님도 주무세요.”
“괜찮아.”
두 눈을 감고 있으면 더 이상 날 곤란하게 하진 않겠지.
나는 피로가 많이 풀렸음에도 애써 잠을 청했다.
“그나저나 명언이네. 인간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나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
4. 유적
로이아스 대륙의 면적은 지구의 모든 대륙을 하나로 합친 것보다 크지 않을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내가 속한 ‘마드세인 왕국’이 대륙에서 손꼽히는 대국이 아님에도, 그 영토가 매우 광활했기 때문이다.
겨우 영지 두 개를 지나왔을 뿐인데 한 달이 넘게 걸리다니, 질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이 페이스면 충분히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보로 이동하고도 남을 거리다.
지금까지 지나온 곳이 큰 영지도 아니고, 마드세인 왕국에 존재하는 영지가 70여 개에 달하니, 실제 국토의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더구나 전생에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칼바도스 제국은 이런 마드세인 왕국보다 족히 열 배는 더 큰데, 칼바도스 제국에 비견되는 제국이 2개가 더 있고, 그 절반 정도의 크기인 대왕국이 5개나 존재한다.
그리고 로이아스 대륙에 존재하는 국가의 수가 30개가 넘음을 생각하면 내가 왜 지구의 전 대륙을 합치느니 마니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더구나 영지 두 개를 지나오는 과정은 목숨이 오락가락할 만큼 위험했지만, 나는 가출 33일 만에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트리우스 백작령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루시엘라 덕에 뇌물 없이 손쉽게 트리우스 백작령에 입성한 나는 호의를 가득 담아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는 지금 안면인식장애 마법을 사용한 상태인데,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나에게만 제대로 인지되었다.
“네 수련 장소가 여깄다는 거지?”
루시엘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 오늘은 하루 쉬고 내일 목적지로 이동하려고요.”
“그렇구나.”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인간들이 마법사를 육성하기 위해 만든 기관 같은데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 오해를 풀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그녀를 만날 일이 더는 없을 테니 말이다.
“루시엘라님은 어디로 가세요?”
“나는 영지 외곽으로 움직일 거야. 앞으로 도시에 들어올 이유가 없으니, 지금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게 마지막이겠지.”
사실 내 목적지도 도심이 아닌, 외곽이지만 그녀도 나도 서로의 목적은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나는 수련을 위해 트리우스를 찾은 것이고, 그녀는 이 근처의 무언가를 찾으러 왔다고만 밝혔다.
“그럼 저 때문에 괜히 돌아온 거네요?”
“신경 쓰지 마. 내가 그리 정한 거니까.”
루시엘라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쓱쓱 쓰다듬었다.
“몸조심하렴. 그리고 이왕이면 눈 속에 가득한 욕심 좀 죽이고.”
내 착각일까?
어째 그녀가 아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넉살 좋게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욕심은 어떻게 안 될 것 같아요. 그게 지금 절 움직이는 원동력이거든요.”
“7살 주제에 말은···. 왠지 네가 어른이 되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 될 것 같다.”
솔직히 부정은 못 하겠다.
“몸조심하렴.”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검은색 로브로 전신을 가린 그녀는 점차 시야에서 멀어졌는데, 지금까지 친밀하게 굴었던 행동이 거짓인 것처럼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이번 인생에서 첫 번째 동료라 할 수 있겠다.
비록 함께한 시간이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니까.
아마 평생 루시엘라를 잊지 못할 거다.
그녀는 은인이기도 했지만, 또 엄청난 존재감을 지닌 미인이기도 했으니.
“연예인은 그냥 씹어 먹는 수준이었는데.”
사람들이 미인한테 괜히 엘프란 칭호를 붙이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마음씨까지 고왔으니, 모든 남자가 꿈에 그리는 이상형이 아닐까?
“내 할 일이나 하자.”
그래 봤자 그림의 떡.
나는 아름다운 엘프를 머릿속에서 지우고는 잡화점으로 향했다.
거기서 몬스터 사냥을 통해 얻은 전리품을 처리하고 여관에서 하루 휴식을 취한 다음 유적을 향해 이동할 생각이다.
*
다음날.
어제 잡화점에서 오크를 죽여 얻은 마정석과 슬라임의 핵, 고블린에게서 얻은 여러 광물을 판 나는 15실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잡화점 주인이 내가 어린애라고 가격을 후려친 것 같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150만원에 해당하는 거금인지라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 돈으로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식료품을 왕창 산 나는 바로 도시를 벗어났고 기억을 더듬으며 유적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나서야 늑대 굴로밖에 보이지 않는 곳을 통해 유적의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브릴란테 제국 아리아스 방면군 병기고 V1-12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나를 반겨주고, 푸른 빛의 마나가 LED처럼 반짝이는 철제문은 형상기억 마법이 걸려 있는지 수만 년이 지났음에도 녹 하나 없이 말끔했다.
마치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웅장한 모습이 지하 공터에 펼쳐져 있었다.
“와···.”
일찍이 본적 없는 광경.
아마 누구라도 감탄사를 터뜨릴 것이다.
[모든 사용자 기록이 초기화되었습니다. 신규 등록을 하시겠습니까?]
“그래.”
[스캔을 실시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이잉.
가이아 교단 신학서에 의하면 마도 시대가 막을 내린 이유가 신의 영역에 도전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에 격노한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가 드래곤을 움직여 마도 제국을 공격했고, 마도 제국이 전쟁에 패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마도 제국의 저력은 드래곤들의 예측을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드래곤들이 비록 전쟁에 승리하긴 했어도 멸종 직전의 피해를 받았고, 이후 리모트랜드에 처박혀 수만 년 동안 장기 요양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신실한 가이아 교단의 신자들은 무조건 마도제국을 악의 축이라며 어리석은 문명으로 매도하지만, 나처럼 교단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마도제국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신이 나설 정도인가.’ 라며 놀라움을 표할 수밖에 없다.
덕분에 마도 시대란 역사 자체를 신비롭게 여기는 인간들이 매우 많았고, 미드랜드의 권력자들은 하나같이 마도 제국의 유물이 발견되면 온갖 더러운 수를 쓰면서까지 손에 넣기 위해 애를 썼다.
마도 제국의 유물은 로또나 다름없다.
발견만 하면 아무리 쓸모없는 물건이라 해도 귀족들에게 비싸게 거래가 되었으니.
그리고 만약 이처럼 거대한 유적이 발견되거나, 사용 가능한 마법 물품이 발견된다면, 기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 가치는 국가를 초월하기도 한다.
그래서 만약 힘없는 약소국에서 감당하기 힘든 유적이 발견된다면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나라가 찢기거나 멸망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당하는 처지에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왜일까?
지금의 나는 그 권력자들의 집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 말이다.
유적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