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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의 능력을 맹신하지도 않고 나름 주제 파악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빌름에 도착할 때까지의 경험을 교훈 삼아 트리우스 백작령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마나는 물론 체력관리에도 신경을 썼다.
괜히 혼자 급하게 굴다가 체력고갈로 뻗어 비명횡사하면 이 고생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서 이동 중간에 낮잠 타임도 만들고 조금 힘들다 싶으면 무조건 휴식을 취했다.
이런 노력이 통했는지, 빌름을 나서고 10일이 지나서까지 이전처럼 체력적으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새로 마련한 장비들의 영향도 있겠지만, 이대로라면 큰 문제 없이 백작령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뜻대로만 흘러가던가?
언제나 그렇듯 일이 잘 풀린다 싶을 때,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그건 정확히 가출을 하고 22일째 되던 날에 발생한 일이다.
찌리리리리!
미친 듯이 울리는 알람 마법.
“뭐, 뭐야?”
평소처럼 땅굴에 침낭을 깔고 잠을 청하던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주변을 탐색했다.
그리고 발견된 다수의 마법 반응에 깊게 생각할 것 없이 방어 마법을 사용했다.
“쉴드!”
1평 남짓한 공간의 벽을 뚫은 투명한 촉수가 쉴드를 거칠게 두들겼다.
콰쾅!
땅속으로 유유히 다가와 공격을 퍼부은 마법체의 정체는 바로 슬라임.
지상에서 만나면 매직 미사일 한 방으로 처리할 수 있는 손쉬운 녀석이지만, 땅속에 스며든 슬라임을 상대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힘겨웠다.
고생 끝에 슬라임을 처치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비한 마나의 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
무엇보다 땅속에서도 몬스터가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 그래. 처음 발생한 돌발상황이잖아? 앞으로 대비를 잘하면 문제없을 거야.”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한 나였으나, 애석하게도 트리우스 백작령에 가까워질수록 슬라임의 출연빈도가 점점 높아졌다.
그래서 나는 결국 땅굴을 포기하고 바위나 나무 위에서 쪽잠을 청해야 했다.
슬라임의 등장에 그동안 잘 지켜온 페이스가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이다.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는 누적되었고, 점점 줄어드는 휴식 시간만큼 나는 빠르게 지쳐갔다.
‘역시 7살의 몸으로 이런 모험은 무리였던 걸까?’
‘차라리 회귀의 이점이 덜하더라도 몇 년을 기다리는 게 나았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을 후회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는 이를 악물고 전생의 보잘것없던 삶과 이 고난을 이겨냈을 경우 얻게 될 달콤한 이득을 비교하며 정신력으로 피로를 이겨냈다.
내가 트리우스 백작령을 첫 번째 목표로 잡은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트리우스 백작가의 차남이 3년 만에 3단계나 클래스를 올린 만큼, 나도 빨리 자신의 힘을 키워야 뒷일이 쉬워질 테니까.
그래서 트리우스 백작령의 유적이 5년 뒤에나 발견이 됨에도 나의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이다.
“빌어먹을 오크 새끼들.”
하지만 내 정신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 몸은 결국 7살의 어린아이. 무리한 강행군에 탈이 나는 게 당연했다.
목적지인 트리우스 백작령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나는 오크 3마리와 조우했다.
오크들과 어떻게 싸웠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빠르게 해치우긴 했지만, 결국 신체가 그동안의 과부하를 이기지 못해 기능을 정지시키는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나고 말았다.
털썩.
빌어먹을 하루 이틀만 더 가면 백작령인데, 이게 무슨 참사란 말인가.
“정신··· 차려. 움직여···.”
나는 이를 악물며 굳어버린 신체에 계속 명령을 내렸으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체가 된 오크 옆에 가만히 쓰러져 있는 건 짐승들에게 고기를 상납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디그.”
선택지가 없음을 깨달은 나는 마지막 정신력을 짜내 몸을 숨기기 위한 땅굴을 팠다.
부디 기절해 있는 동안 슬라임이 다가오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안심하고 쉬렴.”
예고 없이 들려온 따뜻한 목소리.
더불어 내가 위치한 곳은 땅속일 텐데,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뭔가 싶어 의문을 표했지만, 이내 사고가 완전히 정지하면서 필름이 끊어졌다.
*
[칼바도스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하늘이 내려준 선물! 트리우스 백작령에서 마도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다!]
‘헤에, 던전인가?’
‘야, 선전 신문 따윌 뭐하러 보냐?’
‘왜 재미만 있는데. 트리우스 백작가 차남이 유적의 힘으로 3년 만에 3서클에서 6서클이 되었다잖아.’
‘어차피 그게 끝이잖아. 알고 보니, 텅 빈 던전이라더만.’
‘그게 무슨 말이야?’
‘마법학 선생님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미 중요한 물건은 도굴당한 것처럼 비어 있었데. 분명 유적의 용도는 병기고인데 말이야.’
‘그래?’
‘생각해봐라, 그러니까 이렇게 선전용으로 뿌리는 거 아니겠어? 진짜 중요한 유적이었으면 나라에서 꽁꽁 숨겼겠지.’
‘아···.’
‘아무튼 그 덕분에 트리우스 백작이 왕실의 조사를 받고 있데. 아무래도 트리우스 백작이 내용물을 빼돌린 거 아닌가 의심받고 있는 모양이야.’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네. 그런데 너 목동의 자식치곤 머리가 제법 돌아간다?’
‘뭐래? 농부의 자식이.’
그건 전생에 마법을 배우기 위해 입학한 군사학교에서 친해진 동기와 나눈 이야기다.
그때 보았던 선전용 신문에는 트리우스 백작가의 유적 위치와 입구 그림도 실려 있었는데, 정상적이라면 굳이 돈 되는 마도시대 유적을 일반에 공개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나는 정규 마법사로 활동하던 백작가 차남이 3년 만에 6서클이 된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라 여겼다.
하지만 제대로 된 유적의 가치는 한 명의 고위 마법사를 얻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나야 차남이 수련에 사용한 트레이닝캡슐이란 것을 얻으면 그만이지만, 그곳이 원래 병기고란 설정을 가진 만큼 어떤 물건이 들어 있을지 궁금하긴 했다.
“으윽.”
뭐지?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손발은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전신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압박은 죽기 직전에 경험했던 고통 못지않았다.
“잠시만 기다리렴.”
하지만 괴로움도 잠시.
따뜻한 기운과 함께 나를 괴롭히던 통증이 서서히 가시고, 바닥까지 떨어졌던 체력이 조금씩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신체가 내 명령을 듣기 시작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너무도 부드러워 보이는 하늘색 실타래와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의 보석 두 개였다.
“정신이 드니?”
너무도 맑고 따뜻한 음성.
그녀가 생명의 은인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은 나는 눈을 비벼 흐릿한 초점을 맞추고는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절 도와준 은인···.”
하지만 나는 말을 길게 잇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난생처음 접해보는 절대미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색의 머리카락과 에메랄드빛 눈동자.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은 젤리같이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맛이 날 것 같다.
보기 딱 좋은 높이의 콧대와 가냘파 보이면서도 볼륨감이 있는 몸매는 남성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무기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미모.
그러나 그런 절대미를 마주한 내게 든 감정은 감탄이나 경외심보단 경계심이 앞섰다.
“당신은 인간인가요?”
두 번에 걸친 인생에 대한 기억은 허투루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은인에게 이런 예의 없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지만, 그만큼 눈앞에 존재하는 여성의 미모는 비현실적이었다.
경계심 가득한 내 행동에 어째서인지 그녀는 너무도 매력적인 미소를 흘렸다.
“어린아이가 가질만한 눈빛이 아닌걸?”
“······.”
난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아름다운 여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완전히 제쳤다.
그로 인해 드러나는 뾰족한 귀.
나는 눈을 껌벅였고, 그녀는 다시금 웃어 보였다.
“나는 숲의 자식인 루시엘라. 네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지.”
나를 향해 뻗어오는 손 위로 파란색의 투명한 요정이 나타나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이 아이는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처음 보지만 나는 그게 정령이란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엘프라니···.”
미모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엘프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전생을 포함해 엘프를 실제로 본 건 이게 처음이었으니.
황당함이란 감정이 섞인 내 반응에 그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상대가 엘프란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경계심을 풀었다.
그녀가 성인이 된 엘프라면 지금의 내 능력으론 절대 상대가 안 되기에 경계를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인간 입장에서 엘프는 하나하나가 고위기사이자 고위정령사였으니까.
적어도 루시엘라라고 이름을 밝힌 엘프는 내게 적대적이지 않은 것 같으니, 괜히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과했다.
“생명의 은인이신데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 저는 발티스영지 노라 마을 농부의 자식인 루이스라고 합니다.”
“농부의 자식인 루이스라···.”
내 이름을 기억하겠다는 듯 되새기는 그녀를 보며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내 외모에 감흥이 없어 보이는 구나. 인간은 원래 엘프의 외모를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아니겠는가.
귀족이나 왕족 입장에서 엘프 노예는 천금을 줘서라도 얻고 싶어하는 보물이었으니.
“물론, 좋아하죠. 루시엘라 님도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다만 제가 아름다움에 취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닐 뿐이죠.”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자리를 권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안전가도 근처에 위치한 숲속이었다.
심지어 모닥불까지 피워놓고 태연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당황해야 했다.
“자, 잠시만요. 여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사방이 탁 트인 데다가, 모닥불까지···.”
“엘프에게 모닥불은 필요 없지. 이건 널 위한 거란다.”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일한 위치 선정에 나는 급히 서치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서치는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사방으로 뻗질 못했고, 나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시선을 돌려 루시엘라를 바라보니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결국 나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얌전히 모닥불 앞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아이솔레이션’이군요?”
내 물음에 루시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솔레이션’은 일정 구역을 격리하는 공간 마법으로 5서클에 해당하는 고위 마법이었다.
역시 엘프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장면.
“마셔봐 피로회복에 좋은 차야.”
“감사합니다.”
나는 연녹색의 액체가 든 유리잔을 건네받았다.
그녀가 어떤 조치를 했는지 피로는 이미 상당히 가신 상황이지만, 굳이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입에 차를 털어 넣었다.
솨아.
“어?”
이게 그 유명한 ‘엘븐티’라는 건가?
마치 마나샤워를 한 것처럼 전신의 피로가 풀렸다.
루시엘라를 만난것은 내 입장에서 천만 다행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살짝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죠? 엘프는 인간을 싫어한다고 들었는데요?”
“맞아, 나도 인간은 싫어해. 욕심 많고 돈을 위해서라면 동족도 팔아 버리니까. 우리 입장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문명이 발달한 오크나 다름이 없거든.”
인간을 비하하는 발언.
하지만 나는 전혀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인간의 아이까지 미워할 이유는 없지. 어디까지나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추악한 욕심을 드러내는 인간 성체니까.”
“그렇군요.”
결국은 내가 어린아이기 때문에 도와줬다는 뜻이다.
모처럼 어린아이의 모습인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내용물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어째서 너 같은 아이가 홀로 여행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근처에 없었다면 너는 죽었을 수도 있어.”
이번엔 그녀가 내게 물어왔다.
유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