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28화 (128/136)
  • 128화 설마 이 새끼가?

    스벤젝으로 부터 에이즈 치료제 생산 기술 이전을 합의한 서진용은 길버트 사이언스로 향했다. 하미플루에 대한 특허권 구매를 타진하기 위함이었다. 서진용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길버트 사인언스의 회장인 헨리 럼즈펠드가 임원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의 곁에는 검은 머리의 연구원도 함께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길버트 사이언스의 회장 헨리 럼즈펠드입니다.”

    “바이오셀의 서진용 사장입니다.”

    헨리는 서진용과 악수를 한 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재무 담당인 제임스이고, 여긴 하미플루 개발을 주도한 토마스 정 입니다.”

    서진용은 헨리가 소개한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자리에 앉았다. 서진용의 시선이 토마스에게 잠시 머물렀다.

    ‘설마, 한국 사람인가?’

    애초에 ‘하미플루’는 조류인플루엔자 인플루엔자를 잡기 위해 개발됐다. 그리고 이 약을 개발을 주도한 화학자는 재일교포 출신의 정형교 박사였다. 미국 이름 토마스 정이 바로 그였다.

    서진용의 시선을 느꼈는지 정형교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한국 사람 맞습니다. 정형교 박사입니다.”

    익숙한 한국말에 서진용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 안녕하세요. 거참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하세요?”

    “생각보다 한국의 박사님들이 해외 바이오 업체 곳곳에 계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서진용의 말에 정형교가 웃으며 말했다.

    “그야, 한국 기업이 없으니까요.”

    “아!”

    서진용이 한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헨리 럼즈펠드가 둘의 대화가 궁금하다는 듯 번갈아 보며 쳐다봤다. 정형교가 한국 사람이라 서진용이 놀란 것 같다고 말해주자, 헨리가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한국 사람들이 이 분야에 많고, 유능하죠. 한국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더군요.”

    헨리의 말에 서진용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이오셀이 설립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서진용의 말에 헨리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에 개발한 하미플루에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길버트에서도 특허 이전할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헨리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길버트 사이언스는 의약품이 아니라 과학을 파는 회사니까요.”

    헨리의 말을 시작으로 길고 지리한 협상이 시작됐다.

    쩐의 전쟁.

    #

    서진용이 길버트 사이언스와 협상을 시작할 무렵, 한국 언론은 파인의 해저 데이터 센터가 큰 이슈가 되었다.

    [파인 해저 데이터 센터를 짓는다.]

    [파인은 왜 바닷속으로 갔을까?]

    [박주혁 대표의 광폭 횡보 이번엔 바다다.]

    “주혁 씨, 너무 유명해지는 것 아니에요?”

    신문을 스크랩하던 메르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문은 왜 스크랩해요?”

    “좋아서요. 주혁 씨 얘기면 다 모을 거에요. 일전에 챠넬 기사도 다 스크랩 했었는걸요? 몰랐죠?”

    박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메르헨은 박주혁의 기사를 잘 스크랩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파인의 본사를 제주도에 둘 생각이에요?”

    “데이터 센터 근처에 회사가 있는 것이 급한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으음. 제주도는 휴양 느낌이던데 괜찮을까요?”

    “뭐 직원들이 일도 하고 휴양도 즐길 수 있다면 더 좋은 것 아닐까요?”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파인은 인터넷 기업이니까, 꼭 서울에 사무실이 있을 필요는 없겠어요. 그러고 보니 하와이에서 파인랭스 직원들은 업무도 가능하더라고요.”

    “자리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수 있는 근무환경이 앞으로는 중요한 복지로 떠오를 거예요. 사람의 욕구는 다양하니까요. 일과 삶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 회사 대표가 해야 할 일될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번 고정관념을 깨버리는군요. 이번 해저 데이터 센터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요. 주혁 씨가 만들어 가는 회사는 말로만으로도 설레네요. 직원들이 부러울 지경이에요.”

    박주혁과 메르헨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데 최효정 여사가 과일을 가지고 거실로 왔다.

    “과일 먹으면서 얘기하렴.”

    “감사합니다. 어머니. 제가 해도 되는데.”

    “아휴. 과일 깎는 게 무슨 힘든 일이니? 괜찮다.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기사가 있었니?”

    최효정 여사의 물음에 메르헨이 스크랩한 자료를 최효정 여사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박주혁 대표의 광폭 횡보래요. 참 기자들이 말을 잘 만들죠?”

    메르헨의 말에 최효정 여사는 미소 지으며 스크랩된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기사를 읽어가는 최효정 여사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러게, 글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표현이 좋네.”

    20평 남짓한 아파트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박주혁과 메르헨 그리고 최효정 여사였지만, 그들의 표정은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

    박주혁이 사과를 한입 베어 무는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박주혁입니다.”

    “대표님. 저 윤철영입니다.”

    “아, 윤 부사장님. 제주도 부지는 좀 알아보셨습니까?”

    “예. 마침 제주도에서 기업 유치를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더군요.”

    포털사이트 넥스트가 ‘즐거운 실험’이라는 테마로 IT 기업에 적합한 자유로운 업무환경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파인랭스는 넥스트 본사 이전에 대해 90% 이상이 만족한다는 보도문을 번역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애써 태연한척하며 말했다.

    “그래요? 잘되었군요. 기왕이면 데이터 센터가 있는 서귀포 인근 부지면 좋겠으니 제주도와 협의해보시죠.”

    “알겠습니다.”

    포털사이트 넥스트가 제주도로 본사를 옮기는 것이 2006년이었다. 박주혁은 무려 7년을 앞서 포털사이트 파인의 본사를 제주도에 만들려하고 있었다.

    #

    파인랭스의 구로 본사.

    아침 부터 박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사장님. 행복 부동산입니다. 파인랭스 빌딩 10층에 입주하고 싶어 하는 업체가 있는데요. 혹시 지금 볼 수 있을까요?”

    “지금 오시면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업종이 뭐죠?”

    “아, 유명한 중식 쉐프님이십니다. 얼마 전까지 대사관 총주방장이셨죠.”

    그렇게 서양식 레스토랑을 원했건만, 중식이라니? 박주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온 문의였기에 그는 불쾌감을 감추며 말했다.

    “언제 오시는 겁니까?”

    “쉐프님이 곧 오신다고 했으니 10분 안으로 도착할 겁니다.”

    “로비에서 절 만나러 왔다고 하시면 됩니다.”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박주혁이었지만, 임대업은 또 다른 영역이었다. 건물을 지으면 세입자들이 알아서 찾아오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파인랭스 사옥이 완공되고 5개월 넘게 10층은 공실이었다.

    파인랭스 사옥을 지으며 일으킨 대출로 인해 재무구조의 상태도 예전과 달리 좋지 못했다. 물론, 파인랭스가 해결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계획에 차질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10층 월세로 대출을 충당하면 문제없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직접 요식업에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막연히 세입자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다 보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래도 5개월 만에 처음으로 물건을 보겠다고 하니 기뻤다.

    “그나저나 대사관 총주방장이었던 중식 쉐프가 누구지?”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하는 찰나, 박주혁의 키폰이 울렸다. 로비의 안내원이었다.

    “대표님. 행복 부동산에서 오셨습니다.”

    “예. 올려보내세요.”

    “네, 알겠습니다.”

    사장실에서 잠시 기다리니,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박주혁이 일어나 사장실 문을 열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

    박주혁이 행복 부동산 중개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쉐프를 알아보고 말을 끝맺지 못했다.

    ‘최, 최연복 쉐프? 정말 유명한 쉐프 맞네!’

    중식의 대가 최연복 쉐프.

    2015년 티비에 출연하며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스타 쉐프였다. 물론, 지금은 중국 대사관 주방장을 그만두고 독립할 시기의 최연복이었지만, 어쨌든 그의 미래를 박주혁은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임대차 계약은 이미 성립된 것이다.

    그가 운영할 ‘목란’이라는 전통 중식 레스토랑의 명성을 알고 있는 박주혁이었기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최연복 쉐프에게 10층을 선보였다. 최연복 쉐프는 창문 밖으로 탁 트인 공간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개방감도 있고, 손님들이 좋아하겠군요.”

    ‘좋아. 나쁘지 않은 반응이군.’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부가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10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옥상으로 가보시죠.”

    박주혁은 중개인에게 설명을 맡길 수 없었는지 직접 설명하며 최연복 쉐프를 옥상 정원으로 안내했다. 잔디와 벤치 그리고 꽃나무들로 꾸며진 옥상 정원은 파인랭스 사옥의 하나의 자랑거리였다.

    최연복 쉐프는 탁트인 옥상에 올라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정말 잘 꾸며 놓으셨네요.”

    “옥상 정원을 꾸며놔서 손님들이 식사 후 간단한 음료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옥상 정원을 저희가 사용해도 됩니까?”

    최연복 쉐프의 말에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용하시되 저희 직원들도 이용하는 곳이니, 전용으로 사용하시면 곤란합니다.”

    “아, 물론입니다.”

    “그리고, 사용하시는 대신 관리를···.”

    “이런 공간을 누릴 수 있는데 공으로 쓸 수 있나요? 당연한 겁니다. 좋네요.”

    최연복 쉐프는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기까지 했다. 부동산 초짜 티가 나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도 그렇지 않은 척해야 한 푼이라도 깎을 수 있는 법인데 말이다.

    최연복 쉐프는 옥상 정원이 흡족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로 훑어보더니 박주혁에게 물었다.

    “월세 조정은 안됩니까?”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

    박주혁은 애써 웃음을 숨기며 말했다.

    “저는 상생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죠···.”

    그렇게 최연복 쉐프의 목란은 구로에 첫 둥지를 틀었다.

    #

    최연복 쉐프와 계약서를 작성한 박주혁이 사장실로 돌아오자마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표님. 서진용입니다.”

    “아, 서 사장. 협상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아직도 줄다리기 중입니다. 쉽지 않네요. 헨리 럼즈펠드가 생각보다 너무 꼬장꼬장합니다.”

    “···누구라고요?”

    “헨리 럼즈펠드요. 길버트 사이언스의 회장님이신데요.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2001년 미국 국방성 장관으로 입각하는 헨리 럼즈펠드.

    미국 역대 최악의 국방부 장관이라는 평을 받는 인물이다. 젊었을 적에는 백악관 수석보좌관, 국방부 장관 등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며 그 능력을 입증했었다. 골수 공화당인 럼즈펠드는 조지 부시가 집권하며 다시 한번 국방부 장관으로 입각하지만···.

    그는 어느새 ‘고집불통’, ‘독선’ 그리고 ‘아집’으로 똘똘 뭉친 킹 오브 꼰대가 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 남의 말을 경청하며 확실한 업무처리로 유능함을 뽐내던 럼즈펠드는 이미 없었다.

    박주혁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그래서 신종플루가 유행하기 전에 하미플루를 미국 국방부가 대량으로 주문했던 거구나.’

    신종플루가 세계적으로 유행할 당시, 그런 음모론이 있었다. 신종플루는 미국에서 타미플루를 판매하기 위하여 퍼트린 것이라고 말이다. 결론은 아니라고 판명이 났지만, 글쎄···?

    많은 생각이 박주혁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그래서 얼마 달라고 합니까?”

    “한국 돈으로 2,700억입니다.”

    “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길버트 사이언스가 공들여 개발한 치료제라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턱없이 비싼 금액이었다. 물론 향후 신종플루로 2,700억은 충분히 뽑고도 남는 일이라는 것을 박주혁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인간에게 영향이 없는 조류인플루엔자 치료제일 뿐이었다.

    “조류인플루엔자 치료제인데···. 2,700억이요?”

    박주혁이 되물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현듯 미국 국방부가 하미플루를 대량 구매했던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박주혁이 순간 눈을 부릅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잠깐, 설마 럼즈펠드 이 새끼가?’

    박주혁이 다급하게 서진용을 불렀다.

    “서 사장님. 잠깐만요. 럼즈펠드에게 매출액의 10%를 로열티로 주겠다고 제안해보세요.”

    “매출액의 10%요? 2,700억을 달라는데 그게 먹히겠습니까?”

    “아무래도 럼즈펠드에게는 다른 속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진용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전화를 끊고 다시 회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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