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27화 (127/136)
  • 127화 기회가 왔을때 낚아채라!

    박주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자, 곁에 있던 메르헨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바이오셀의 서 사장인데, 스벤젝 에이즈 치료제 임상 3차 실패로 타격이 있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요···.”

    메르헨도 바이오셀의 소식을 알고 있는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망했을 박주혁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메르헨이 박주혁을 바라봤다. 그녀의 생각과 달리 박주혁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닐 텐데···.”

    박주혁이 중얼거리는 말에 메르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출구전략이 있나요?”

    바이오셀의 역사를 세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바이오셀이 이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부호 순위에 오르는 서진용이었던 만큼, 지금의 시련은 성장의 밑거름일 터. 박주혁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바이오셀이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됩니다. 더 공격적인 투자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음. 주혁 씨 뜻이 그렇다면···.”

    “질병을 이기는 과학의 힘에 투자하는 것은 인류를 위한 일이에요. 한번 실패했다고 끝낼 일이 아닙니다. 길버트 사이언스가 좋은 예죠.”

    길버트 사이언스는 미국의 바이오헬스 벤처회사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박멸에 집중하는 전략을 펼쳤는데, 인플루엔자는 다국적 제약회사도 연구 개발을 꺼리는 분야였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변이가 많아, 투자 비용 대비 수익이 적고, 치료제의 수명이 짧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버트 사이언스는 다국적 회사가 연구 개발하지 않는 틈새를 노리는 전략을 펼친 것이었다. 15년간의 적자를 기록하면서도 길버트 사이언스는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인플루엔자 치료제 개발에 성공했다.

    개발 성공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한 ‘하미플루’는 그렇게 탄생했다.

    “인플루엔자 치료제를 개발한 그 회사 말이군요.”

    “맞아요. 바이오셀이 그 특허기술을 이전받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마침 길버트 사이언스가 특허를 판매하겠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말했다.

    “주혁 씨. 바이오셀을 궤도에 올리기 위한 마음은 알겠지만, 인플루엔자 치료제는 제품 주기가 짧아서 투자 대비 수익이 적다고 알고 있어요.”

    ‘맞아. 하지만, 신종플루가 전세계 적으로 확산할 때 유일한 치료제는 하미플루가 유일하다.’

    “15년간 연구한 결과입니다. 그냥 나온 치료제가 아닐 거예요. 투자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만···.”

    확고한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은 말끝을 흐렸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메르헨이 갑자기 고개를 가로젓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인류를 위한 일이라고 했죠. 주혁 씨를 믿겠어요.”

    #

    바이오셀은 걸음마도 떼어보지 못하고 무너질 위기였건만, 박주혁은 우방으로 남는 것에 그치지 않고 뜬금없이 길버트 사이언스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치료제 특허를 이전받으라고 말했다.

    “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면, 시장성이···.”

    “이전받으세요. 비용은 파인에서 투자합니다.”

    “하, 하지만 대표님.”

    “바이오셀의 제품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제품군을 하나하나 늘려가면서 기술력을 쌓아야 합니다. 마침 길버트 사이언스에서도 특허를 이전할 생각이라니 지금이 기회입니다.”

    “···.”

    박주혁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지만, 서진용은 자신감을 상실한 듯 말을 잊지 못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대표님. 바이오셀의 기술 고문들도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서 사장님. 처음 만났을 때의 초심은 어디 가셨나요? 바이오셀은 아직 첫걸음도 안 뗐습니다. 이대로 주저앉으실 생각이신가요?”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박 대표님께 너무 많은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이시라면, 당장 미국으로 가세요. 가서 스벤젝의 기술도 받아오시고, 길버트의 인플루엔자 특허도 받아오십시오. 비행기표도 구해놓겠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서진용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표님···!”

    서진용이 뭐라 말을 이으려 했지만, 박주혁이 그의 말을 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둘러야 합니다. 길버트가 다른 회사에 특허권을 넘기기 전에요. 금액은 달라는 대로 지급하세요.”

    “···!”

    “기회가 왔을 때 낚아채는 사람이 승리하는 겁니다. 서 사장님. 지금 낙담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아, 알겠습니다.”

    그 길로 서진용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서진용은 스벤젝으로 향했다.

    #

    미국 스벤젝.

    “미안하게 됐습니다.”

    스벤젝 경영진의 말이 비수가 되어 서진용의 가슴을 쑤셨다. 정중한 사과였지만, 사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서진용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하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저는 전 재산을 투입했단 말입니다.”

    “임상 3차가 그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습니다.”

    “당장 내년이면 공장과 연구 개발 센터가 완공되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끝내면 안 되는 겁니다.”

    “···.”

    스벤젝의 경영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스벤젝도 손해가 막심했다. 연구 개발비에 바이오셀에 투자한 금액은 고스란히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서진용의 상황이 안타까웠지만, 발을 빼기로 한만큼 스벤젝이 더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서진용이 그들을 다그쳤지만, 돌아오는 말은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똑같았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말에 서진용이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어차피 에이즈 치료제를 포기할 생각이라면, 저희에게 기술을 이전이라도 하세요. 어차피 버려진 기술 아닙니까! 당신들에겐 버리는 기술이겠지만, 바이오셀에겐 희망의 끈이라고!”

    서진용의 말에 신강일 박사도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사장할 기술이라면, 신의를 생각해서라도 바이오셀에 기술을 이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스벤젝만 믿고 바이오셀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그게 도리인 것 같습니다.”

    “으으음.”

    신강일 박사의 말에 경영진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들에게 쐐기를 박은 것은 신강일 박사였다.

    “그마저도 못하겠다면 내가 퇴사하고 바이오셀로 이직하겠습니다. 신의라는 것을 모르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신강일 박사의 말에 서진용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바, 박사님!”

    “서 사장. 나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한국에 공장과 연구 개발 센터를 짓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미안하오.”

    “아, 아닙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박사님의 경력에 제가 짐이 된다면 평생을 후회할 것입니다.”

    서진용의 말에 신강일 박사는 미소 지으며 경영진을 다시 한번 압박했다.

    “빨리 결정하세요. 바이오셀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신강일 박사가 단호하게 나오자, 경영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신약 개발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기도 했고, 지금 신강일 박사를 놓친다면 다신 영입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 신 박사가 이렇게 나온다면 저희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에이즈 치료제 기술 바이오셀에 넘기겠습니다.”

    경영진의 말에 신강일 박사는 서진용을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착잡한 어조로 서진용을 위로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가 바이오셀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 까진 것 같습니다.”

    “바, 박사님!”

    “바이오셀을 멀리서라도 응원하겠습니다.”

    신강일 박사는 자신이 이렇게 나오면 스벤젝이 치료제 기술을 바이오셀에게 넘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을 담보로 에이즈 체료제 기술을 넘기도록 한 것이다. 실패한 에이즈 치료제와 신강일 박사의 가치는 비교 불가였기에 스벤젝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서진용은 90도로 상체를 숙여 신강일 박사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면역학의 세계적 석학을 이대로 스벤젝에 내줘야 한다니···.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스벤젝으로부터 이전받은 이 기술이 바이오시밀러 개발로 향하는 첫 단추임은 분명했다.

    #

    서진용이 스벤젝과 담판을 짓고 있을 무렵, 박주혁은 메르헨 그리고 박영희, 심영찬과 제주도에 도착했다.

    제주국제공항에서 그들을 맞이 한 자들은 태우조선해양의 기술자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태우조선해양의 정우영 수석입니다.”

    “반갑습니다. 파인그룹 박주혁 대표입니다.”

    정우영 수석은 DD 자동차와 벤타가 합작으로 만들어낸 ‘이스탄불’이라는 승합차로 안내했다. 서귀포 쪽으로 향하며 정우영 수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청하신 대로 제작을 했습니다. 조력 발전기도 설치했는데 생각만큼 효율이 높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음. 그렇군요. 비상 전력용 정도는 될까요?”

    “글쎄요. 컴퓨터가 얼마나 세팅되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으니 뭐라 답할 수 없네요. 일단 테스트로 넣어둔 컴퓨터 10대는 정상 작동 중입니다.”

    정우영 수석을 비롯한 태우조선해양 기술자들이 조선업에서야 베테랑이겠지만, 이들이 컴퓨터 분야를 알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바닷물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이론적으로는 반영구적입니다. 외부에 큰 충격이 가해져 코팅이 벗겨지지 않는다면 말이죠.”

    박주혁과 정우영의 얘기를 듣고 있던 심영찬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 박주혁에게 데이터 센터를 바닷속에 두겠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황당했었는가? 그런데 박주혁은 실제로 그 일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정우영 수석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 박주혁이 고개를 돌려 심영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심 과장. 서귀포에 도착하면, 서버를 어떻게 배치하면 좋을지 등을 계획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는데 흥분되는 군요.”

    심영찬과 박영희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약 1시간을 달려 서귀포 중문의 일행이 탑승한 이스탄불은 법환포구에 도착했다.

    “여기서 배를 타고 한 시간가량 가면 됩니다.”

    쾌속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메르헨이 법환포구 앞에 펼쳐진 에메랄드빛 물색을 보며 감탄했다.

    “와. 한국의 하와이라더니 정말 아름답네요.”

    “정말 그러네요.”

    제주도를 처음 와본 박영희와 심영찬도 물색에 감탄했다. 그때 정우영 수석이 물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쾌속정 타고 가면 더 아름다운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어서 타시죠. 운이 좋으면 돌고래 떼도 볼 수 있습니다.”

    “도, 돌고래요?”

    돌고래라는 말에 박영희가 흥분하여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돌고래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다. 안타깝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돌고래 떼는 출몰하지 않았다.

    범섬을 지나 바다 한가운데 철제 구조물이 떡하니 서 있었고, 태우조선해양의 캡슐이 물속에서 건져 올려지고 있었다.

    “벌써 저희 팀이 먼저 건져 올렸나 봅니다. 직접 가서 보시죠.”

    정우영 수석은 철물구조로 올라 각종 데이터를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캡슐 내부 온도는 평균 10도로 유지되고 있었고, 컴퓨터들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조류 때문에 좀 흔들리긴 했지만, 고장이 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조력 발전기로 전기 생산은 가능했지만, 과연 많은 컴퓨터를 돌릴 정도로 생산될지는 미지수이고요.”

    설명을 듣는 와중에 드디어 캡슐의 뚜껑이 열렸다.

    - 퓌식!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내부가 드러났고, 컴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가 미약하게 외부로 새어 나왔다.

    “오오.”

    심영찬이 가장 먼저 달려가 내부를 살피며 소리쳤다.

    “생각보다 엄청 넓은데요? 그리고 시원해.”

    심영찬의 반응에 정우영 수석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박 대표님 말씀처럼 질소를 충전해서 산소에 의한 부식 걱정도 없습니다. 원하시는 결과인지 모르겠습니다.”

    “좋습니다. 이제 실제로 데이터 센터를 구축해보고 운영해보는 일만 남았군요.”

    “그런데 대체 데이터 센터가 뭡니까?”

    정우영 수석이 무척 궁금했다는 듯 묻자, 박주혁이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혹시 파인월드 하십니까?”

    “파인···월드? 아! 그 미니홈피죠? 요즘 그거 안 하면 젊은 친구들과 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정우영 수석의 말에 박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파인월드를 구성하는 데이터들을 저장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그걸 왜 바닷속에 만드시는 겁니까?”

    “지상에 만들었더니 냉방비로 너무 많은 전기를 소모하는 측면이 있어서 말이죠.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 그렇군요.”

    정우영 수석은 박주혁의 말을 100%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사상과 신념에는 감동했는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인가요?”

    “조금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네요.”

    “멋지십니다.”

    정우영 수석의 말에 캡슐을 바라보던 박주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멋지긴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지구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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