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26화 (126/136)
  • 126화 선구자의 길은 어렵다.

    파인건설 사장실.

    박주혁은 목동 파인아파트 현장과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진행 상황을 보고 받았다.

    “목동은 토목 공사가 거의 다 진행된 상태로 곧 분양이 시작됩니다.”

    “그렇군요. 층간소음 없는 아파트로 이미지를 굳힌 것 같던데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관심은 무척 높습니다. 다만, 아직 실체가 없는지라 소비자들이 반신반의하고 있죠.”

    “층간소음에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아파트가 다 지어진 후인데 그 점이 좀 안타깝군요.”

    박주혁의 말에 윤철영 부사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했다.

    “대표님. 혹시 후분양제도를 아십니까?”

    “후분양이요?”

    선분양으로 입주할 사람들에게 분양권을 팔아 자금을 모으는 방식으로 많은 건설사가 취하는 방식이다. 초기 자본금이 많이 필요없는 까닥에 건설사들이 선호하는 방식이지만, 한계점도 명확하다.

    소비자들은 아파트의 품질을 다 지어진 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보니 하자 분쟁이 많았다. 심지어 하자 처리 시한도 없는 허술한 제도 탓에 날이 갈수록 분쟁은 더욱 심해졌다. 일반 사람들에게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집이지만, 하자가 있어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반면, 후분양은 집을 다 지은 후, 소비자들이 직접 집을 확인하고 분양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소비자 친화적인 방식이지만, 완공까지 건설사의 자본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큰 방식이었다.

    “후분양이라···. 딱 우리에게 적합한 방식인 것 같군요.”

    “맞습니다. 자금이 많이 들어서 문제긴 한데요···.”

    윤철영 부사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박주혁을 바라봤다. 벤타까지 등에 업은 박주혁에게 사실 자금은 큰 걱정거리가 아닌 만큼,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월드컵 경기장은 원청이 따로 있으니 논외로 치고, 현재 목동 외에는 별도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없습니다. 후분양으로 진행합시다.”

    “대표님이 결정만 해주신다면, 저도 후분양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선분양대비 분양가 상한도 없을뿐더러, 소비자에게 직접 선보이고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고 팔 수 있으니 일석이조입니다.”

    윤철영 부사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고, 박주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하시죠. 지금도 잘하시겠지만, 후분양인 만큼 품질에 더욱 신경써야 할 것입니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 그리고···.”

    박주혁이 말을 잊지 못하고 망설이자, 윤철영 부사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박주혁의 말을 기다렸다.

    “이건 아직 비공개 사항이지만, 부사장님께는 말할 수밖에 없겠군요.”

    박주혁이 세상 진지하게 말하자, 윤철영 부사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박주혁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제가 곧 결혼할 것 같습니다.”

    “···!”

    박주혁의 말에 윤철영 부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사모님 되실 분이 누구십니까?”

    호기심 어린 윤철영 부사장의 눈이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언젠가는 공개될 사안이었다.

    “벤타 그룹의 회장인 메르헨입니다.”

    “헉!”

    “뭘 그리 놀라십니까? 계속 왕래했었는데요.”

    “그, 그렇긴 했습니다만, 투자자인 줄만 알았지. 설마···.”

    윤철영 부사장도 여자에 둔한 것은 매한가지인듯싶다. 하긴, 그러니 박주혁과 장단이 잘 맞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박주혁이 본심을 꺼내자, 윤철영 부사장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박주혁의 말을 잘랐다.

    “펜트하우스 말씀이시군요?”

    윤철영 부사장의 말에 박주혁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결혼한다는 얘기만 꺼냈을 뿐인데···.

    “대표님과 어머님이 사시기엔 크지만, 가정을 이룬다면 얘기가 다르죠. 펜트하우스 적용하라고 관련 부서에 얘기하겠습니다. 대표님이 목동 파인아파트에 입주하신다면 파인아파트의 이미지 메이킹에도 좋을 것입니다.”

    윤철영 부사장의 눈이 호선을 그렸고 박주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

    “신랑 입장!”

    박주혁이 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번 경험했던 일이었지만, 느낌이 또 달랐다. 한발 한발 힘주어 내디뎠다. 챠넬 무대에 섰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에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긴장한 박주혁을 보며 피식 웃던 조광연이 큰소리로 외쳤다.

    “멋지다! 박주혁!”

    박주혁이 힐끔 고개를 돌리자, 조광연이 해맑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들어 올렸고, 어느새 배가 부른 구경숙이 그의 등짝을 때리며 말했다.

    “주책이야. 진짜!”

    그래도 덕분에 긴장감이 조금 해소되어 박주혁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박주혁이 단상 앞에 자리하자, 럴커펠트가 뛰어나와 박주혁의 옷매무새를 만지며 속삭였다.

    “마이 러브. 어깨 힘주고, 정면 주시! 오케이?”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럴커펠트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유 룩 퍼펙트.”

    럴커펠트는 엄지를 치켜들고 종종걸음으로 대기하고 있는 메르헨에게 향했다.

    박주혁과 메르헨의 수트와 드레스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럴커펠트가 한사코 직접 관리하겠다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결혼식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는데... 황송할 따름이었다.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귀빈 여러분께서는 큰 박수로 신부를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신부, 입장!”

    박주혁의 등장때보다 더 큰 박수 소리와 함성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 딴 딴다다. 딴 따다다.

    그랜드 피아노에서 익숙한 멜로디로 리드했고 곧이어 오케스트라가 웅장함을 더했다. 그리고 드디어 3월의 신부 메르헨이 해리스와 함께 등장했다.

    메르헨이 모델 저리 가라는 몸매의 소유자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워 보였다. 조명 때문일까?

    지켜보는 하객들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여기저기서 탄성을 질렀다.

    “와.”

    “어쩜, 저럴 수 있지?”

    “너무 아름답다.”

    메르헨은 수줍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입장했고, 박주혁은 그녀를 맞이하며 해리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하네.”

    형식적인 말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박주혁에게는 묵직한 말이었다. 단상 앞에 박주혁과 메르헨이 수줍게 섰고, 주례를 맡은 유명한 국장이 그들을 마주 보고 섰다.

    “여기, 선남선녀가 짝을 이뤄···.”

    유명한 국장의 주례로 결혼식은 성황리에 끝났다.

    하객들에게 스테이크가 올려질 때, 박주혁과 메르헨이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박주혁의 말에 사람들이 박수로 화답했고, 메르헨이 이어서 말했다.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최효정 여사와 해리스의 눈가가 붉어졌다.

    결혼식이 끝나고 박주혁과 메르헨은 벤타의 전세기에 올라탔다. 물론, 메르헨의 소원처럼 전세기에는 메르헨의 친우들 뿐아니라 파인랭스 식구들도 함께였다.

    파인랭스가 하와이로 함께 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심영찬 덕분이었다. 클라우드 시스템을 도입하여 원격근무를 가능하게 한 것이 주요했다.

    심지어 하와이는 19시간의 시차가 있어서 오전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 한국이 아침 9시면 하와이는 오후 2시. 시간을 잘 활용하면 여행도 즐길 수도 있을 터.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

    박주혁이 빌린 리조트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소란스러웠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박주혁은 인파를 벗어나 메르헨과 달빛을 맞으며 해변을 걸었다.

    “메르헨.”

    “네?”

    “고마워요.”

    “이럴 때는 사랑한다고 하는 거예요.”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이 멋쩍게 웃는데, 메르헨이 잡고 있던 박주혁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박주혁은 무게중심이 흐트러져 메르헨 쪽으로 휘청거렸고, 곧 메르헨의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이 박주혁의 입술과 포개어졌다. 달빛이 그들을 시기하는 듯 더욱 밝게 빛났다.

    #

    박주혁과 메르헨이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을 무렵, 바이오셀의 서진용은 스벤젝과 생산시설과 연구 개발 센터 건립에 관한 MOU를 체결했다.

    “미스터 서.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스벤젝의 한국 생산거점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진용이 웃으며 스벤젝의 대표와 악수를 했다. 그 모습을 신강일 박사가 흐뭇한 듯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MOU 체결을 끝내고, 서진용은 신강일 박사와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박사님 덕분에 MOU를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서 사장님.”

    “스벤젝의 에이즈 치료제를 생산하면서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그래야죠. 언제까지 하청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서진용과 신강일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커피잔을 입에 가져갔다.

    바이오셀의 출발은 순조로운 듯 보였다. 너무 순조로워 되레 문제라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스벤젝 에이즈 치료제 임상 1차 성공!]

    [바이오셀, 스벤젝과 생산 시설 및 연구 개발 센터 건립 MOU 체결!]

    [한국에도 드디어 바이오 업체가 탄생하나? 바이오셀을 전격 해부한다.]

    제네시스텍의 자회사인 스벤젝과 MOU를 체결했다는 소식에 바이오셀의 명성이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올라갔다. 이 좋은 소식이 있을 때 주식을 상장한 상태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바이오셀의 대주주는 서진용 외 사내 임원 10명이 51%의 지분을 갖고 있었고, 파인 그룹과 벤타가 나머지 49%를 보유했었다. 하지만 이번 MOU 체결로 지분 구조가 변경된다.

    스벤젝 49%, 파인 & 벤타 25%, 서진용 외 임원진 26%.

    이 같은 소식에 박주혁은 서진용의 결정에 동의했다. 생산 및 기술이 없는 바이오셀이었기에 스벤젝의 기술 이전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도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임상 1차 결과를 토대로 바이오셀은 대규모 부지에 공장 및 연구 개발 센터를 착공했다. 물론, 파인건설에서 전적으로 시공을 책임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로 스벤젝의 임상 2차 실험 결과가 발표됐고, 바이오셀은 다시 한번 날개를 달았다.

    [스벤젝 에이즈 치료제 임상 2차 성공.]

    [드디어 에이즈로 부터 해방. 스벤젝 임상 2차 성공!]

    [스벤젝 임상 2차 성공으로 다시 주목 받는 바이오셀!]

    송도에 자리 잡은 바이오셀은 기업공개를 결정하며 탄탄대로를 걷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앞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던가? 바이오셀의 날개는 스벤젝의 임상 3차 실험 결과 발표 후 꺾이고 말았다. 5만 리터 규모의 생산 공장의 완공을 1년 앞둔 시점이었다.

    [스벤젝 임상 3차 결과 흑인에게만 유의미한 것으로···.]

    [스벤젝 에이즈 치료제 임상 3차 실패. 바이오셀의 향방은?]

    [바이오셀에 투자한 파인그룹의 운명은?]

    주가는 하한가를 찍었고, 금융권에서 자금 회수를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서진용이었다.

    서진용은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들이키며 미간을 잔뜩 좁혔다.

    “젠장!”

    - 똘똘똘.

    서진용은 빈 잔에 다시 위스키를 채우며 씩씩거렸다.

    “모든 것을 걸고 투자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휴대폰을 열어 신강일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 박사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하. 그러게 말이오. 흑인에게만 유효하다는 검증 결과가 나오다니 나도 당혹스럽소.”

    “흑인에게만이라도 팔면 안 되는 겁니까? 정말 전 재산을 걸었습니다. 대주주인 파인그룹과 벤타에게는 뭐라 한단 말입니까?”

    “···후.”

    신강일 박사의 깊은 한숨이 서진용의 마음과 같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신강일 박사가 서진용을 타이르듯 말했다.

    “서 사장도 알겠지만, 백인에게 효과가 있어야 시장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흑인들에게 에이즈 약을 준다 한들 그들은 구매력이 없다나···?”

    “박사님. 저 이대로면 끝입니다. 흑인에게라도 효과가 있다고 하니, 그 기술만이라도 바이오셀이 가져와야 합니다.”

    “으음.”

    서진용의 간절함을 알기에 신강일 박사는 낮게 신음하더니 말했다.

    “내가 한번 알아보죠. 그리고 생산시설이 있으니 다른 회사들에서 위탁생산 계약을 할 수도 있으니 우선 그렇게 투자자들을 설득해보세요.”

    “후. 알겠습니다. 박사님, 부탁드립니다.”

    서진용은 신강일 박사와 통화를 끝내고, 손에 들려있던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으며 신음했다.

    “크으으.”

    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뭔가 결심한 듯 전화번호를 눌렀다.

    “네, 박주혁입니다.”

    “박 대표님. 저 서진용입니다.”

    “아, 서 사장님.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서진용의 말에 박주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긋나긋 말했다.

    “서 사장님이 죄송할 일은 아니지요. 공장 완공까지 1년 남았던가요?”

    “예···. 스벤젝에서 에이즈 치료제 기술을 이전해달라고 요청할 생각입니다. 공장이 완성되면 글로벌 제약회사에 위탁생산 제안서도 제출하고요. 어떻게든 회사를 돌아가게 만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마지막에 서진용은 거의 울먹이다시피 했다. 가만히 서진용의 말을 듣고 있던 박주혁은 웃으며 말했다.

    “서 사장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십니까?”

    “···허준의 후예라고요?”

    “하하하. 아니요. 선구자의 길은 어렵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리고 제가 돕겠다고 했습니다. 파인과 벤타는 바이오셀의 우방으로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생각한 바대로 추진하십시오.”

    “대, 대표님!”

    서진용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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