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하나씩 현실이 된다.
신강일 박사.
국내 최초이자, 세계 3번째로 B형간염 백신을 개발한 국보급 석학이다. B형간염 백신을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전 국민에게 백신을 3천 원에 공급한 위인이었다.
신강일 박사의 이런 행보에 UN이 한국에 국제백신연구소를 만들어 그를 초대 소장으로 임명했다. 소장 임기가 끝날 무렵 스벤젝의 CEO인 전염병학자 도널드 프럼팻 박사의 권유로 그는 마침 스벤젝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서진용에게 있어 신강일 박사와의 만남은 천운이었다.
“시, 신강일 박사님?”
“어이쿠. 절 알고 계시나요?”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기서 만나 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바이오산업에 진출할 목적으로 닥치는 대로 관련 서적과 논문들을 읽었던 서진용이다. 국내 면역학에 한 획을 그은 신강일 박사를 모를 수 없을 터. 책으로만 접하던 위인을 직접 만났다는 생각에 서진용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서진용이 상체를 90도로 숙이며 신강일 박사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한국에 바이오회사를 만들 생각이라죠?”
“네! 신강일 박사님의 행보에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국민들이 저렴한 가격에 병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저도 한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서진용의 말에 신강일 박사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스벤젝에서 연구하고 있지만, 저도 서 사장을 도울 수 있다면 돕겠습니다. 국민뿐 아니라 인류를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질병 퇴치는 인류를 위한 일이죠.”
자신의 말에 깊이 공감하는 서진용을 바라보며 신강일 박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어떻게 바이오산업에 진출하시게 된 겁니까? 한국에서는 어떤 회사도 시도하지 않은 분야일 텐데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렇게 진행된 데에는 한 기업인이 있었습니다.”
“···기업인이요?”
“예. 파인그룹의 박주혁 대표라고 바이오셀에 대대적인 투자를 한 분입니다.”
서진용의 말에 신강일 박사가 눈을 끔벅이더니 곧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박주혁 대표라면···. 아! 전기차와 Mp3를 만들어서 세계를 사로잡은 그분 말인가요?”
“맞습니다!”
“허. 사업적 감각이 특출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바이오산업에도 관심이 있으셨나?”
“우리 민족이 동의보감, 허준의 후예라고 하셨죠. 그 말씀 덕분에 제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겁니다.”
서진용의 말에 신강일 박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허준의 후예라···. 저도 박주혁 대표를 언젠가 한 번 만나보고 싶군요.”
“제가 자리를 한번 마련해보겠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서진용의 말에 신강일 박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국에는 이렇다할 바이오 회사가 없습니다. 다만, 국제백신연구소가 있을 뿐이죠.”
“예. 신 박사님 덕분에 그런 연구소가 차려졌다는 것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좀 부풀려진 얘기고···. 어쨌든, 한국에 바이오 기업이 들어선다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벤젝 경영진에 입김을 좀 불어 넣었죠.”
“아아!”
스벤젝이 서진용에게 호의를 보인 것이 비단, 블룸버그 교수만의 입김 때문은 아니었다. 한국의 바이오셀이 스벤젝을 방문한다는 얘기에 신강일 박사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돕고 있었다.
“마침 스벤젝이 아시아에 생산거점을 만든다길래. 한국에 만들자고 몇 마디 거들었을 뿐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인걸요. 우리도 세계적인 제약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죠. 허준의 후예인데.”
신강일 박사가 서진용 쪽으로 고개를 돌려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속삭였고, 서진용이 활짝 웃으며 다시 한번 신강일 박사의 손을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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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옥.
박주혁이 사장실에 앉아 신문과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사장실 문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오세요.”
“대표님. 한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심영찬이 사장실로 들어오며 심각한 얼굴로 말하자, 덩달아 박주혁의 미간도 좁혀졌다.
“무슨 문제인데 아침부터 그리 숨을 몰아쉽니까?”
“그, 그게. 지하층에 있는 파인의 데이터 센터로는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벌써요?”
“파인월드 서비스가 시작되고 가입자가 폭증했습니다.”
심영찬의 말에 박주혁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낮게 신음했다.
“으으음.”
“증설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신촌 사무실의 임대 기간이 아직 남은 것으로 아는데, 임시방편으로 그곳에 데이터 센터를 만들까요?”
심영찬의 말에 박주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정말 임시방편일 뿐이죠. 우선은 지하 1층에 최대한 증설을 합시다. 제가 다른 곳을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서버에서 발생하는 열기와 소모 전기가 너무 높은 문제점도 있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가 조심스럽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저도 몰랐네요. 데이터 센터의 에어컨이 풀가동중입니다···.”
한겨울이다.
그런데 에어컨을 가동해야 할 정도라니···. 서버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음이 자명했다. 위기 상황이라지만, 박주혁은 왠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파인월드가 시장에서 뜨겁다는 방증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대표님. 웃을 일이 아닙니다···. 이러다가 서버가 다운된다고요.”
“심 과장. 알고 있습니다. 너무 동동거리지 말고 일단 최대한 서버 증설해서 버티세요. 제가 한번 알아볼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심영찬이 나가고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언젠가 MS가 번역했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야틱이던가?”
박주혁은 손으로 좁혀지는 미간을 매만지며 읊조렸다.
“시스템 온. 검색, 프로젝트 야틱.”
-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 총 2,306건이 검색되었습니다.
MS의 친환경 데이터 센터 설립 프로젝트인 ‘야틱’.
질소를 충천한 캡슐에 서버와 서버랙을 넣고 밀봉하여 바닷속에 구축하는 친환경 데이터 센터 프로젝트다. 데이터 센터를 건립하고 운용하는데 최소 2~3년이 걸리는 반면 야틱은 단 90일 만에 데이터 센터를 설립 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데이터 센터 운영에 가장 큰 비용을 차지하는 냉난방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해저 데이터 센터의 효용성은 매우 높았다. 조력 발전으로 자체적으로 발전을 하고, 바닷속의 낮은 온도 덕에 별도의 냉방이 필요 없었다. 심지어 물리적 충격이 없는 환경이었기에 고장률도 8%로 굉장히 낮은 편이라는 보도문이 박주혁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특히 삼면이 바다인 대한민국의 특성을 고려해 보면 그 효용가치는···.
야틱 프로젝트를 살피던 박주혁이 눈을 빛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다.’
아직 먼 미래의 얘기였지만, 대한민국의 조선업은 잠수함 건조까지 수주할 정도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분명 그들의 힘을 빌린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터.
박주혁은 곧바로 서진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박 대표님. 안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예! 미국의 스젠벡과 바이오셀이 합작으로 한국에 생산 시설과 연구개발센터를 짓기로 합의했습니다.”
놀라운 성과였다. 불과 두 달 전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바이오셀 설립을 독려했었는데, 벌써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바이오셀이 왜 그토록 폭풍 성장을 하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었다. 박주혁은 서진용 사장을 치하하곤 말을 이었다.
“서 사장님. 혹시 태우조선해양에 아시는 분 있으신가요?”
“태우조선해양이요?”
서진용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조, 조선업까지 진출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는데 조선업의 도움이 필요해서 말이죠.”
“대체 어떤 프로젝트길래···.”
“해저에 데이터 센터를 건립하려고 합니다.”
“···.”
서진용은 말을 잊지 못했다. 해저에 데이터 센터라니 IT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뭔가를 바닷속에 짓는다는 말 아닌가? 서진용이 당황하여 입술만 달싹거리는데, 박주혁이 물었다.
“서 사장님?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연락처 좀 주시죠.”
“아, 예! 연락처가 있긴 하지만···. 해저에 뭘 짓는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서진용의 말에 박주혁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아니요. 그냥 잠수함에 컴퓨터를 가득 채워서 바닷속에서 컴퓨터가 돌아가게 하는 개념이에요. 뭘 짓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최대한 쉽게 설명한다고 했지만, 바이오에 특화된 서진용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금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릴 뿐이었다.
“아아.”
영혼 없는 서진용의 답에 박주혁은 피식 웃었다. 박주혁은 서진용과 통화가 끝난 후 망설이지 않고 휴대폰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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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우조선해양은 그룹이 유동성 위기였기에 박주혁의 제안을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항해를 위한 엔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컴퓨터를 실어 바닷속에 부유하도록 설계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것을 만들겠다고 하는지 의아한 면이 있긴 했지만, 고객이 주문했으니 만들면 그뿐.
잠수함도 설계 및 생산했던 태우조선해양의 입장에선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태우조선해양의 확답을 받은 박주혁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씩 현실이 돼가고 있구나.’
박주혁은 천천히 눈을 떠 달력을 바라봤다.
99년 3월.
쉴 새 없이 뛰어왔고, 또 앞으로도 뛰어야 했다. 그래도 박주혁의 큰 그림은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파인테크의 스마트폰은 2002년 월드컵에 앞서 출시하기 위해 순조롭게 개발이 진행 중이다. 픽셀사의 제이콥의 컬러 터치스크린 개발도 순조로웠고, 파인 OS 또한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으니 일정에 문제는 없었다.
파인랭스는 박주혁이 바이오셀에 투자하게 되면서 시장의 저변을 넓혀가고 있었다.
파인은 SNS 서비스인 파인월드를 성공적으로 런칭하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박영희 디렉터의 제안으로 추후 스마트폰 출시와 동시에 서비스를 시작할 비디오 스트리밍까지 개발에 들어갔다. 이름이 뭐라더라?
‘파인비디오.’
촌스럽다. 아직 출시하려면 멀었으니 이름은 추후 바꾸면 되니 박주혁은 그냥 내버려 뒀다.
파인과 파인랭스는 상당히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파인비디오 서비스 개발에 맞춰 파인랭스는 영상 번역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구경숙이 애썼다. 월드컵 동영상 번역을 처리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DD 자동차는 세계 최초로 자율 주행 전기차를 출시했지만, 아직 개발할 일들이 많았다. 말이 자율 주행이지, 사실 알아서 목적지를 찾아가거나 할 수는 없는 반쪽짜리였다. 네비게이션 및 GPS 연동해야 하는 작업도 필요했고 파인 OS와의 최적화도 큰 과제였다.
마지막으로 파인건설은 목동 부지의 토목 공사를 끝내고 골조를 올리고 있었다. 층간소음이 없는 아파트라는 기치로 벌써 입소문이 나고 있었다. 대부분의 반응은 ‘정말 없겠냐?’가 대다수인 것 같지만, 일단 관심을 끌어냈으니 절반의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다.
유수엽 설계사와 함께 서울 월드컵 경기장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익을 최소로 하라고 했더니 윤철영 부사장이 정말 바닥까지 긁어 쓰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 정도쯤이야.
그룹사의 상황을 쭉 훑은 박주혁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그러다 문뜩 그의 시선이 달력 중앙에 별표가 처져 있는 곳에 멈췄다.
[결혼]
여태 흡족한 표정을 짓던 박주혁의 미간이 순간 좁혀졌다.
‘3주도 남지 않았다···.’
결혼식을 생각하니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손에서 땀에 배어 나왔다. 불현듯 지난달, 메르헨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는 계획이었다.
“주혁 씨. 우리는 글로벌 커플이니까. 결혼식을 한국에서 한 번. 그리고···.”
“두 번 하게요?”
충분히 이해 가능한 부분이었다. 메르헨은 한국 사람이 아니니, 독일의 친지들을 배려해 독일에서도 한번 치르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나?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메르헨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메르헨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입에서 예상외의 장소가 튀어나왔다.
“한국에서 하고 바로 하와이로 이동해서 피로연을 열고 싶어요. 와이키키 해변에서 파티!”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하와이에서 피로연이면···. 신혼여행은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