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주혁아, 고맙다.
98년 12월.
태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10개 사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같은 시각, 구로공단에서는 파인랭스의 사옥 준공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파인랭스, 파인테크, 파인건설의 임원들이 참석했으며, DD 자동차의 차동진 전무를 비롯해 지상억 디자인 센터장도 함께 자리했다.
박주혁은 가장 마지막에 메르헨과 함께 등장했고, 그 뒤를 해리스와 최효정 여사가 뒤따랐다. 박주혁은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고, 메르헨은 하얀색 원피스로 우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최효정 여사는 색감이 고운 한복에 쪽머리로 전통미를 한껏 뽐냈다.
그들의 입장을 기다리던 사회자가 마이크를 입에 가져갔다.
“VIP가 입장하십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그들은 지정된 자리에 앉았고, 사회자가 준공식을 시작했다.
“내빈 여러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국기를 바라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행사에서 빠질 수 없는 첫 번째 순서가 시작됐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 따따 따따다.
익숙한 음악과 함께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바로!”
사회자의 말에 모두 가슴에 올렸던 손을 내렸고, 독일인인 해리스와 메르헨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어서 파인그룹의 박주혁 대표님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사옥이 완성된 역사적인 날인 만큼, 박주혁은 웃는 얼굴로 단상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파인그룹의 박주혁입니다.”
박주혁의 인사말에 모두 크게 박수 쳤다.
“파인그룹의 전신인, 파인랭스의 사옥이 준공되었다는 사실이 아직 믿기질 않는군요.”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와 심영찬, 구경숙과 조관영 등 파인랭스 직원들이 가슴을 부여잡고 감격스러워했다.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맞는 처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대표라는 직함만 있을 뿐, 이런 일이 가능케 한 것은 모두 여러분의 노력 덕분입니다. 축하받아야 할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묵묵히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원들입니다.”
박주혁의 말에 직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입바른 소리가 아니었다. 이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도 박주혁의 진심을 알기에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사옥을 설계한 한설계 사장님.”
박주혁이 손을 뻗어 한설계 사장을 가리키자, 직원들이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한설계 사장은 자신이 호명될 줄 몰랐는지 당황하여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유수엽 설계사가 월드컵 경기장에 이름을 걸었듯 박주혁은 한설계 설계사의 이름을 파인랭스 사옥에 걸어줄 속셈인 듯싶었다.
“그리고, 사옥을 안전하게 짓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신 우리 현장 소장님.”
- 짝짝짝!
현장소장은 아직도 안전모를 쓰고 있었는데 자신이 호명되자 재빨리 안전모를 벗어 가슴에 올린 후 상체를 90도로 숙였다.
“마지막으로 건물의 구석구석 자신들의 숨결을 불어 넣은 우리 현장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다음으로 박주혁을 기준으로 좌측에 최효정 여사, 우측에 메르헨과 해리스를 대동하고 커팅식을 올렸다.
- 싹둑.
박주혁을 비롯한 임원들의 커팅이 끝나고 한설계 사장은 임원단을 이끌고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1층에는 안내 부스와 카페, 그리고 프리랜서 번역사들이 작업할 수 있는 오픈형 작업실로 꾸며졌습니다.”
박주혁이 꿈꿔왔던 대로 한설계 사장이 잘 구현해놨다. 이제 저곳은 번역사들 또는 직원들이 자유롭게 일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박주혁은 흐뭇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계 사장이 건물 층별로 설명해 갈 때 마다 뒤따르는 직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와. 여기가 이제 우리 팀이 쓰는 공간인 거네?”
“카페테리아 크기 봐. 장난 아니야!”
“오. 옥상 정원이라니!”
흥분에 찬 직원들의 반응에 박주혁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사옥 투어가 끝나고, 곧 파인랭스는 신사옥으로 입주했다.
직원들은 각자의 짐을 챙겨 건물로 향했다. 각 팀의 책상과 의자는 모두 배정산업의 더블백 브랜드로서 직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한 박주혁의 배려가 돋보였다.
“와. 책상과 의자 모두 더블백이네.”
“그런데 컴퓨터는 어디 있는 거지?”
“어? 그러게, 컴퓨터 먼저 가져가지 않았었나? 왜 모니터랑 키보드만 덜렁 있냐.”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컴퓨터를 찾고 있는데 심영찬 과장이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서프라이즈 입니다. 모니터를 켜시고 그 옆에 작은 박스 보이시죠?”
“이, 이거요?”
“네. 그게 접속 단말기입니다. 그게 컴퓨터 역할을 하죠.”
직원들이 심영찬을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바라봤다. 심영찬은 그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속는 셈 치고 해보세요.”
“아니, 심 과장님. 아무리 우리가 컴맹이라고는 하지만, 무슨 이 조그만 게 컴퓨터라는 겁니까? 일할 수 있게 세팅 빨리해주세요. 오늘 납품 있다구요!”
“에헤이. 일단 한번 해보라니까···.”
심영찬은 그들의 핀잔을 귓등으로 흘리며 단말기의 전원을 켰다. 그러자, 익숙한 윈도우 화면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조금 다르긴 했지만···.
“어? 진짜네?”
심영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기존 컴퓨터와 같습니다. 한번 접속해보시죠.”
“접속···. 이요?”
“어서 해봐요.”
직원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익숙한 컴퓨터 화면이 나타났고 직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심영찬을 바라봤다.
“이 조그마한 것이 진짜 컴퓨터에요?”
“아니죠.”
“아, 뭐에요. 현기증 나니까 빨리 알려줘요.”
직원들의 성화에 심영찬이 웃으며 말했다.
“접속 단말기에요. 이 건물 지하에 클라우드 서버가 있죠. 이제 모든 작업은 보안이 철저하게 관리될···.”
심영찬이 자랑스럽게 얘기하는데 직원들이 그의 말을 자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컴퓨터가 지하에 있고 이건 접속기란 소리네.”
“그러네.”
“별거 아니네.”
자기들끼리 속삭이더니 그들은 일을 시작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심영찬의 어깨가 풍선 빠지듯 내려앉았다. 그는 울상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지금 이걸 구축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벼, 별거 아니라니!’
그때 박주혁이 심영찬을 지나치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심 과장. 클라우드 구축하느라 애썼네요. 확실히 사무실이 쾌적해졌어.”
“대, 대표님!”
심영찬이 구세주를 만난듯 눈에서 빛이 났다. 마치 빨리 쓰다듬어 달라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클라우드 시스템을 도입했으니, 보안도 철저해졌고, 서버의 리소스를 활용하니 기존 컴퓨터보다 더 빨라졌죠?”
“마, 맞습니다! 역시 대표님은 알아주시는군요.”
심영찬의 침을 튀기며 흥분했고, 박주혁은 씩 웃으며 심영찬의 어깨를 두드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심영찬을 무시하던 직원들도 박주혁의 말에 눈을 끔벅이며 심영찬을 돌아보며 한마디씩 했다.
“심 과장님. 고생하셨어요.”
“맞아요. 저희가 장난 좀 친 거예요.”
“심 과장님. 따봉!”
직원들의 말에 심영찬은 배시시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른 직원들의 세팅을 돕기 위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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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에서 내렸다. 아직은 횡한 상태였지만, 박주혁의 사무실은 차려져 있었다. 박주혁 대표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탁 트인 뷰가 그를 반겼다. 비록 도로 뷰이긴 했지만, 탁 트인 것이 어디인가.
그리고 새로운 가구들···.
“어?”
어딘가 익숙한 가구들이었다.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가구들을 살피다 말고 주배정 사장에게 잽싸게 전화를 걸었다.
“주 사장님!”
“오. 박 대표. 오늘이 입주라지?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사무실에 이 가구들 뭡니까?”
“아, 그거? 선물이야.”
“아니 그게 지금 무슨···.”
박주혁이 뭐라 따지려는데 주배정이 그의 말을 잘랐다.
“일전에 DD 자동차에 있던 이태리 명품 가구들이야. 처분하긴 너무 아까워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박 대표에게 돌아갈 물건들 같아서 말이야.”
“아니, 주 사장님. 이건 아니죠.”
“아니긴 뭐가 아니야? 파인 그룹의 대표가 그 정도 가구는 써야지. 아. 끊어 나 바빠!”
- 뚝.
주배정 사장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고,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무실을 쭉 둘러봤다.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배정산업의 최고급 의자까지 들어서니 꽉 찬 느낌이었고, 한 기업의 사장실다운 포스가 느껴졌다.
“이래도 될까?”
호화스러운 느낌의 사장실에 박주혁은 인상이 살짝 찌푸렸다. 여태껏 그는 일반 직원들과 같은 가구들로 실용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이런 호화스러움과는 살짝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망설이며 가구들을 살피는데 메르헨과 해리스 그리고 최효정 여사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메르헨과 해리스가 사무실 가구를 알아보고 대번 감탄사를 뱉었다.
“와우. 이건 이태리 빈쎈초 까사노군요?”
“이 사람. 물건 보는 눈이 있었군.”
그들의 반응에 박주혁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되물었다.
“빈쎈초···. 뭐요?”
“빈쎈초 까사노요. 이태리 명품 가구죠. 아버지 이거 진품 같죠?”
“그러네! 진품이네. 이 깊은 광택과 우아한 선이···. 확실해.”
메르헨과 해리스가 감탄하는 사이 최효정 여사가 박주혁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가는 붉었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주혁아. 정말 고맙다.”
“···?”
박주혁은 말없이 최효정 여사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해졌다.
“어머니. 제게 고마워하실 게 뭐 있나요?”
“아니다. 고맙다. 이렇게 바르고 멋지게 성장해줘서 고맙고, 변함없이 착해서 고맙고, 결혼도 한다니 그 또한 고맙고···.”
최효정 여사는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박주혁의 손을 계속 토닥였다. 박주혁은 감격에 겨워하는 최효정 여사를 살포시 껴안으며 속삭였다.
“곁에 계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어머니.”
때마침 창가에 햇살이 박주혁과 최효정 여사를 비추어 그림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박주혁과 최효정 여사를 바라보던 메르헨이 해리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아버지.”
“응?”
“주혁씨와 어머니, 정말 아름답죠?”
“그래.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구나.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네가 왜 주혁한테 반했는지 이제는 확실해졌다. 사람 잘 골랐구나.”
해리스의 말에 메르헨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며 웃었고, 해리스는 메르헨의 어깨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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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서진용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다.
바이오셀을 설립하며 자문을 구했던 에이즈 전문가인 정명기 교수가 자신의 멘토인 바로 블룸버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교수를 만나볼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정명기 교수가 서진용의 방문을 불룸버그 교수에게 알렸지만, 블룸버그 교수는 서진용을 문전 박대했다.
그가 생명공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경영학 출신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글로벌 제약회사들이 비싼 값에 약을 파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불룸버그 교수였기에 경영학 출신인 서진용이 더욱 꺼려졌을 터.
“블룸버그 교수님.”
“돌아가게. 난 자넬 만날 생각이 없네.”
매몰찼다.
하지만, 서진용도 쉽게 포기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불룸버그 교수 근처에 모텔에 투숙하며 매일 같이 블룸버그 교수를 찾았고, 심지어 그가 조깅하는 코스까지 따라다니는 열정을 보였다.
그렇게 보름째 되던 날.
블룸버그 교수는 서진용에게 허셉틴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제네시스텍의 계열사인 스벤젝을 찾아가 보라고 소개해 줬다. 서진용은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곤 스벤젝을 찾아갔다.
“블룸버그 교수님의 소개로 찾아왔습니다.”
“아! 얘기 전해 들었습니다.”
블룸버그 교수와 달리 스벤젝은 서진용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예상치 못한 호의에 서진용이 조금 당황했지만, 막연히 블룸버그 교수가 서진용을 좋게 말해 주었을 거라 미뤄 짐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시아에 신약 개발 거점이 필요했습니다. 생산공장과 연구개발센터를 세울 생각인데 혹시 바이오셀이 한국의 파트너로 참여할 생각 없습니까?”
뜻밖의 얘기에 서진용이 눈을 끔벅일 때 누군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흰 가운을 입은 검은 머리의 아시아인이었는데 그는 회의실로 들어오자마자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어, 어. 안녕하십니까?”
면역학의 세계적 석학인 신강일 박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