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23화 (123/136)
  • 123화 우리는 허준의 후예입니다.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

    파인건설 사장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박주혁은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 호록.

    그는 커피를 한 모금한 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스템 온. 검색, 바이오셀.”

    -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 총 180건이 검색되었습니다.

    IT 전문 번역회사로 시장을 석권했었지만, 파인랭스가 바이오 분야까지 확장하진 못했었다. 바이오 시장에 대한 무지가 낳은 결과였다. 바이오셀도 처음에는 파인랭스와 연이 닿아있었지만, 품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권선호에게 넘어갔던 회사다.

    바이오셀은 코로나19 항체치료제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했던 만큼, 박주혁의 구상에 바이오셀이 꼭 필요했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바이오셀의 문서들을 살펴봤다. 다행히도 바이오셀 초기 홈페이지 번역을 파인랭스에서 진행했었다.

    [젊은 나이에 91년 태우 자동차 기획 재무 고문으로 근무한 서진용 회장은 셀러리맨 신화라는 애칭을 받았다. 하지만, 99년 태우자동차 부도와 동시에 직장을 잃은 서진용 회장은 같은 처지의 동료 10여 명과 함께 바이오셀을 창업했다. 한국의 미개척 사업 분야였던 바이오산업의 도전은 그야말로···.]

    문서를 읽어가던 박주혁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음. 서진용을 만나야겠구나.”

    박주혁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 윤철영 상무가 헐레벌떡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격앙된 그의 목소리에서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됐군요?”

    “맞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모두가 노력한 결과입니다.”

    박주혁은 미소 띤 얼굴로 윤철영 부사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앞으로가 중요하죠. 유수엽 설계사와 잘 협업하시어 잘 짓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개막전이 열리는 곳이니만큼 최선을 다해 짓겠습니다.”

    “목동 아파트 단지 때도 얘기했지만, 이윤을 남기려 하지 마십시오. 잘 지은 건축물 하나가 파인건설의 명성을 올려줄 것입니다. 그 명성으로 우린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으니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윤철영 부사장만큼 박주혁의 뜻을 잘 아는 이도 적을 터. 박주혁은 흡족한 얼굴로 사무실을 벗어나 DD 자동차로 향했다.

    #

    박주혁이 DD 자동차에 도착하자, 고윤희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실무를 담당하는 차동진 전무를 호출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차 전무님. 별일 없으시죠?”

    “예. 생산은 차질없이 진행 중이고, 모델 D에 픽셀 사의 터치스크린을 적용하기 위해 연구 중입니다.”

    차동진 전무의 보고에 박주혁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말했다.

    “계획대로 진행 중이군요. 소비자들 동향은 어떻습니까?”

    “아직은 내연기관을 선호하는 것 같지만, 모델 D가 일으킨 파장이 점차 확대되는 양상입니다. 충전시설이 확충되면서 수도권에서는 전기차의 수요가 점차 증가하는 중입니다.”

    “좋습니다. 고삐를 놓지 마십시오.”

    박주혁이 차동진 전무를 격려한 후 나지막이 물었다.

    “차 전무. 혹시 태우자동차의 서진용 고문을 아십니까?”

    “서진용 고문···. 아! 영업사원에서 젊은 나이에 임원까지 오른 친구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불리던데 한 번쯤 만나보고 싶군요. 혹시 연락처를 아십니까?”

    박주혁의 말에 차동진 전무가 잠시 미간을 좁히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제게 연락처는 없지만, 분명 임원 중에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대표님. 왜 서진용 고문을 만나려고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차동진 전무의 물음에 박주혁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아시겠지만, 태우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다는 얘기가 만연합니다. 그와 관련해서 서진용 고문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군요.”

    박주혁의 말에 차동진 전무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태우자동차의 부도 가능성이 있다는 루머가 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다.

    재계 4위인 태우그룹의 부도는 외환위기를 헤쳐나가는 대한민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외환위기의 여파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대기업의 부도라니···. 믿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었다. 심지어 DD 자동차를 인수가 불발되며 추가 대출을 받기 어려웠던 만큼 태우그룹의 시계는 예전보다 더욱 빨리 돌아갔다.

    차동진 전무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태우그룹이 흔들리면, 다시 한번 소비심리가 위축될 것입니다. 걱정이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DD 자동차는 이미 국내시장에 국한된 기업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차동진 전무가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경제가 흔들리는 만큼 DD 자동차의 내수 기반 자체가 약해진다는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부채만 자그마치 50조입니다. 회생은 불가할 겁니다.”

    “휴.”

    차동진 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박주혁에게 물었다.

    “혹시 대표님. 서진용 고문을 스카우트 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니면 태우자동차의 인수?”

    “아. 아닙니다. 서진용 고문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또 다른 영감을 받을 수도 있고요.”

    “음.”

    차동진 전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차동진 전무는 박주혁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

    차동진 전무가 서진용 고문의 연락처를 알려왔고, 박주혁은 곧바로 고윤희 비서에게 약속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그 사이 메르헨의 전화가 왔다.

    “주혁 씨. 저 아버지와 햇빛보육원에 왔는데요.”

    “어? 또요?”

    “예. 계속 아이들의 밝은 웃음이 보고 싶다고 아버지께서 그러시는 바람에.”

    “아, 그렇군요.”

    해리스와 메르헨은 진심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고 싶어 했다. 정말 본받을 점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보건실에 있던 아이들은 좀 나아진 것 같더라고요.”

    “다행이군요.”

    “네. 병원에 입원한 친구들도 다시 돌아왔는데···. 병원에서 뭐라더라? 코로나바이러스라 전염력이 높으니 마스크를 꼭 쓰라고 하더라고요”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감기 증상을 일으키는 3대 바이러스 중 하나이기 지금으로서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코로나19를 경험한 박주혁이었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세요. 마스크 착용하시고, 손 세정도 잘하시고요.”

    “지금 저 걱정하는 거예요?”

    “아버님도 마스크 꼭 착용하시라고 하세요.”

    박주혁은 메르헨의 질문을 회피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메르헨에게 전달됐다. 메르헨과 통화를 끝내고 잠시 뒤, 고윤희 비서가 사장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서진용 고문님께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스케쥴이 빡빡한데 마침 오늘 저녁 시간이 비었다고 하시던데요.”

    “바쁘겠죠. 회사가 그 지경이니···. 약속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태우그룹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으니, 바이오셀의 설립도 속도를 받을 것이다. 거기에 박주혁이 드라이브를 건다면, 다가오는 전염병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터.

    #

    “안녕하십니까? 박주혁입니다.”

    “서진용이라고 합니다. 박 대표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정말 만나 뵙고 싶었는데 막상 이런 기회가 오니 어리둥절하군요.”

    서진용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박주혁의 손을 맞잡은 채 놓을 줄 몰랐다. 한참을 손을 흔들어도 서진용이 놓을 기미가 없자, 박주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서 고문님. 사인이라도 해드릴까요?”

    “예?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서진용이 황급히 손을 놓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바이오셀을 일군 경영자라고 하기엔 서진용은 옆집 아저씨같이 푸근한 사람이었다. 주문한 초밥과 회가 테이블에 차려지자, 그들은 소주잔을 나누며 대화를 시작했다. 박주혁은 서진용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서 고문님. 태우그룹이 위기라는데 사실입니까?”

    서진용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소주를 입에 털어버린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열었다.

    “위기라기엔 너무 멀리 왔죠. 오늘내일합니다.”

    “···.”

    그래도 몸담은 회사인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하다니···. 조금 놀라웠다. 박주혁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태우그룹이 부도가 나면 다음 행선지는 생각해두셨습니까?”

    “예. 이미 동료들과 얘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박주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자기 살길은 만들어두는 법이지.’

    그때 서진용이 잔을 내밀며 말했다.

    “그런데, 이게 한국에는 없는 분야라 좀 난감합니다. 박 대표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네요.”

    박주혁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서진용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 서진용은 바이오셀의 전신인 넥스트솔루션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박주혁은 눈을 지그시 감고 서진용의 말을 곱씹었다.

    “바이오라.”

    “역시 생소하죠?”

    서진용이 피식 웃으며 소주잔을 가져갈때 박주혁이 눈을 뜨며 말했다.

    “역시 대단하군요.”

    박주혁의 말에 서진용이 소주가 사래걸린 듯 콜록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단하다뇨?”

    “역시 사업가답다는 얘기였습니다.”

    “···?”

    박주혁의 말에 서진용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끔벅거릴 뿐이었다. 박주혁은 그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DD 자동차의 전기차, 파인테크의 MP3, 포털사이트 파인과 사운드바다 등등 모두 세상에 없던 것들이죠.”

    “···.”

    서진용은 박주혁의 말을 경청하며 침을 꼴깍 삼켰고 박주혁은 잔을 들어 건배하며 말했다.

    “시도해보시죠. 제가 투자하겠습니다.”

    “예에?”

    잔을 입에 가져가던 서진용이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 아니. 대표님 아직 시작도 안 하고 생각만 하는 아이템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가능성 있습니다.”

    확신에 찬 박주혁의 말에 서진용은 눈을 끔벅이며 박주혁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바이오산업. 결국은 인류의 삶의 질을 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업 아이템입니다. 정말 훌륭한 생각입니다.”

    “지, 진심이십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에이즈 백신도 결국은 바이오 회사에서 만들었습니다. 질병을 극복하는 사업에 투자하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서진용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끔벅였다. 그렇지 않아도 에이즈 백신을 제조하는 미국의 넥스젠과 만나볼 생각이었는데, 박주혁이 콕 짚어서 얘기하니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 사람 보통이 아니다.’

    단지 바이오산업에 관한 얘기와 한국에도 바이오 기업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뜬구름 잡는 얘기였는데 벌써 먼 미래와 비전까지 제시하고 있는 박주혁에게 기함할 수밖에.

    서진용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자, 박주혁이 잔을 내밀며 말했다.

    “서 고문님. 파인의 투자를 받는다는 것은 벤타의 자본도 투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번 도전해보시죠.”

    “허···!”

    서진용이 말을 잇지 못하고 탄식과도 같은 감탄사를 뱉었다. 한참을 멍하게 있던 서진용이 고개를 흔들더니 겨우 입술을 뗐다.

    “도, 동료들과 얘기해봐야 합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시기 바랍니다.”

    서진용이 목이 타는지 소주를 입에 탁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놨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본 박주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서 고문님. 우리는 동의보감, 허준의 후예들입니다. 바이오산업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겠지만, 우리 민족은 의학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죠. 할 수 있습니다.”

    “···!”

    술기운 때문인 서진용의 가슴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서진용은 눈을 빛내며 박주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힘주어 박주혁과 악수하며 말했다. 그의 말에 비장한 각오가 녹아있었다.

    “박 대표님. 정말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용기를 주셔서.”

    “선구자의 길은 어렵지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2002년에야 설립될 바이오셀은 4년이나 빠른 98년에 닻을 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