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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121화 (121/136)
  • 121화 이건 됩니다.

    졸지에 상견례를 해버린 메르헨이었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최효정 여사와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최효정 여사가 메르헨을 백화점으로 불렀고, 그녀는 흔쾌히 최효정 여사에게 달려왔다.

    백화점 여성복 코너를 둘러보는데 메르헨이 자연스럽게 최효정 여사와 팔짱을 꼈다. 최효정 여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메르헨의 손을 바라봤다.

    이곳저곳 둘러보던 그들은 이내 눈에 띄는 옷을 발견했는지 한 매장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이거 예쁜데요?”

    “그래?”

    “네. 어머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박주혁도 최효정 여사에게 최선을 다하고는 있었지만, 딸이 없던 최효정 여사에게 메르헨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메르헨이 추천한 옷을 들고 탈의실에 간 최효정 여사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최효정 여사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메르헨은 이것저것 옷을 고르고 있는데 점원이 다가와 물었다.

    “저 손님?”

    “예?”

    “한국말을 엄청나게 잘하시네요. 놀랐습니다.”

    “아, 공부 많이 했거든요.”

    메르헨이 눈웃음을 지으며 옷을 고르는데 최효정 여사가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메르헨은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매장 점원들이 최효정 여사에게 우르르 다가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머, 어머니.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아주 맞춤이에요!”

    점원들의 말에 최효정 여사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마치 정말 그런가 싶은 착각이 드는 모양이다. 하지만, 패션 감각이 남다른 메르헨이 보기에는 살짝 오버핏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최효정 여사의 옷매무새를 만지며 말했다.

    “어머니 허리도 좀 크고, 어깨 라인도 내려와 있어요. 좀 큰 것 같은데요?”

    “그렇지?”

    메르헨은 점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 치수 작은 것 주세요.”

    하지만, 점원은 메르헨의 말을 무시한 채 최효정 여사를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아휴. 엄청나게 잘 어울리시는데요? 원래 어머니 나이 때면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옷이 조금 낭랑한 것이 좋아요.”

    “맞아요. 어깨랑 한번 움직여 보세요. 얼마나 편하신지, 요즘 이 옷이 50대 중 후반 어머님들에게 인기 최고라니까요?”

    점원들의 말에 최효정 여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어깨를 움직였다. 오버핏인 옷이었기에 당연히 편할 수밖에 없었지만, 점원들은 그것이 마치 장점인 양 최효정 여사를 현혹했다. 하지만, 최효정 여사는 메르헨의 말을 더 신뢰했다.

    점원들의 성화를 뿌리치고 최효정 여사는 원래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다른 곳도 둘러보고 올게요.”

    “아휴. 정말 딱 맞춤이던데 그냥 하시지.”

    “그러게요. 외국인 처자가 센스가 없네요.”

    점원의 말에 메르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 한마디 하려는데 갑자기 최효정 여사가 버럭 소리쳤다.

    “뭐라고요? 지금 우리 며느리가 센스가 없다니? 챠넬의 수석 디자이너와 친분이 있는 우리 며느리인데···! 센스가 없는 것은 당신들이겠지!”

    “며, 며느리요···?”

    “네! 우리 며느리에요. 어디서 함부로!”

    최효정 여사가 메르헨의 팔을 잡아끌어 자신 곁에 바짝 세우며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메르헨은 자신을 대신해 언성을 높이는 최효정 여사에게 뭔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며느리라고 불러주는 것도 좋았지만, 그것보다 엘리넥 가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끈끈한 무언가였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 고마워요.”

    “고맙긴. 우린 이제 가족인데.”

    “가족···!”

    메르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 할때, 최효정 여사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오늘 백화점 온건 메르헨 이쁜 옷 사주려고 한 거니까. 메르헨 옷보러 가자.”

    “제 옷이요?”

    “응. 예쁜 걸로 골라봐. 엄마가 사줄게.”

    며느리에 이어 이제는 엄마까지, 최효정 여사의 말에 메르헨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최효정 여사 곁에 더욱 가까이 붙어 팔짱을 꼈고, 최효정 여사는 그런 메르헨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쇼핑을 즐겼다.

    #

    서울시청.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공개입찰이 시작됐다.

    입찰 기준이 완화되어 많은 업체가 참여할 수 있었고, 각 회사의 프레젠테이션을 듣는 것만으로도 오전이 홀딱 지나버렸다.

    “다음 차례는 삼송엔지니어링입니다.”

    사회자의 말에 장내가 모두 조용해졌다. 이번 프로젝트의 낙찰이 유력한 삼송엔지니어링의 발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들의 표정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에서 삼송엔지니어링이 발표한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투시도를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특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난한 축구경기장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너무 평범했기에 타 업체들이 수군거렸다.

    “삼송은 이번 입찰 포기하나?”

    “대학생 알바를 썼나?”

    “설마, 삼송에서 아르바이트를 썼겠어? 설계자가 누군데 저따위로···?”

    박주혁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삼송엔지니어링의 발표를 듣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유수엽 설계사가 피식 웃어버렸다.

    “왜 그러십니까?”

    “제가 갑자기 틀어버리니, 급조한 티가 나네요. 제가 계약을 안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죠.”

    “사실 저도 유 설계사님이 저희와 함께 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으니까요.”

    그간 삼송엔지니어링의 행보와 달리 서울 월드컵 경기장 발표는 무향 무취로 끝나버렸다.

    “다음은 파인건설 입니다.”

    박주혁과 유수엽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발표를 마친 삼송엔지니어링 사람들과 스쳤다. 그들은 유수엽을 노려보며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배신자 자식.”

    그 말이 유수엽의 귓가에 들렸지만, 그는 웃어넘겼다. 계약도 체결하지 않았는데 배신이고 나발이고 무슨 의미란 말인가? 돈이면 된다고 생각한 그들의 안이함이 불러온 참사일 뿐이지.

    단상에 오른 박주혁은 파인건설의 발표 자료를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건설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오늘 이 발표를 할 수 있도록 기준을 완화해주신, 고건우 서울시장님께 감사를 표하며 발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건우 시장은 자신이 호명되자 너털웃음을 지으며 박주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먼저 파인건설의 투시도를 보시겠습니다. 발표는 설계자가 직접 해주시겠습니다. 유수엽 설계사님?”

    여태까지는 건설사들이 설계사의 투시도를 가지고 직접 발표하는 것이 관례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파인건설은 달랐다. 아니 박주혁의 생각은 달랐다.

    “설계자는 예술가이고 건설회사는 그들의 붓입니다. 당연히 발표는 설계자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박 대표님. 여태까지 그런 전례가 없습니다. 제가 정리하여 드릴 테니 직접 발표하시죠.”

    “아닙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렸습니다. 설계자님의 이름을 남길 건축물을 만들자고요. 그리고 그 시작은 발표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유수엽은 마이크 앞에서 박주혁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설계자의 이름이 남길 첫 발자국을 지금 막 내딛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설계사 유수엽 입니다.”

    유수엽의 인사에 서울시 관계자들이 박수를 쳤지만, 입찰한 건설회사들은 웅성거렸다. 파격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설계사는 건설사에 돈을 받아 디자인만 그려오는 도구와 같은 것인데 말이다.

    “서울은 북한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으며, 우리의 혼이 담긴 한강이 젖줄처럼 가로지르는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한발 뒤로 떨어져 유수엽의 시작하는 말을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직접 설명해야 가슴에 와닿는 법이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철학이 담겨있군.’

    유수엽의 말에 감탄한 것은 비단 박주혁만이 아니것 같았다. 고건우 서울시장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주억거리며 유수엽의 말을 경청했다.

    “이 아름다운 서울에 어울리는 경기장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파인건설의 박 대표님과 많은 얘기를 나눈 끝에 한국 전통의 선을 살린 디자인을 뽑아냈습니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투시도가 공개되자, 사람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음? 돛배?”

    “그러네 꼭 돛배들이 모여있는 것 같아.”

    “자, 잠깐만 지붕이 방패연을 닮았어.”

    “어? 경기장도 타원형이 아닌 팔각형 모양이야.”

    “획기적이네. 전통과 현대가 한데 버무려진 느낌이야.”

    타 건설사들이 당황하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박주혁에게는 노랫소리 같았다. 반대로 삼송엔지니어링 직원들에게는 비수가 되어 가슴을 쑤셨다.

    #

    삼송엔지니어링의 소회의실.

    서울 월드컵 경기장 프로젝트를 담당한 직원들이 모두 모였다. 프로젝트 총괄을 맡고 있는 상무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우 부장! 유수엽 설계사가 왜 파인건설과 함께 하는 거야? 당장 설명해봐!”

    “그,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자그마치 28억이었어. 유수엽 그 새끼가 지금 28억을 거부했다는 것을 나보고 믿으란 말이야?”

    “···.”

    직원들이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다물자, 상무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왜 말들이 없어!”

    상무가 씩씩거리며 열을 올렸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지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 쾅!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삼송엔지니어링의 베테랑들이 전부 집결했어. 그런데 설계자 하나 구워삶지 못해서 파인건설 같은 들어보지도 못한 잡것한테 뺏기게 생겼잖아! 말을 해보라고!”

    “···.”

    상무의 호통에 직원들의 머리가 더욱 숙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총괄 책임자인 그였다.

    “프로젝트 입찰 성공 못하면 다들 사표 써!”

    버럭 소리치며 상무는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버렸고, 남아있던 직원들이 깊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씨발. 돈만 주면 단가”

    “성질머리하곤 내가 더러워서 진짜 사표 쓴다 써.”

    “설계자가 무슨 돈만주면 다해주는 사람인줄 아나, 인심을 얻을 생각은 안하고···. 퉷!”

    직원들이 하나둘 불평을 토로하며 회의실을 나갔고 곧 우 부장 앞에 사표가 수북이 쌓였다.

    “자, 자네들 왜 이래? 진짜로 그만두란 얘기가 아니셨잖아?”

    “그만둘 겁니다. 파인건설에서 구인하던데, 우 부장님도 같이 가시죠? 언제까지 저 새끼 밑에 계실 건데요?”

    “이, 이봐!”

    “솔직히 설계자들 막 굴리는 거나, 직원들 막 대하는 거나 똑같잖아요? 저도 그만둡니다.”

    베테랑이라고 불린 사람들을 뽑아 TF를 만들었더니 총괄 PM을 잘못 만나 퇴사 러쉬라니···! 동아줄인줄 알고 꽉 붙잡고 있었더니 아무래도 우 부장은 줄을 잘못 선 것 같았다. 우 부장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했다.

    ‘젠장. 나도 사표 써야 하나?’

    우 부장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떨궜다.

    한편, 박주혁은 유수엽과 서울시청 근처의 족발집에서 소주를 한잔 기울이고 있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설계사님.”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박주혁의 물음에 유수엽은 말끝을 흐리며 미소만 지었다. 왜 그렇지 않겠나? 여태까지 이름 없는 설계자에서 이제 드디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럴 만하다. 박주혁은 소주를 입에 털고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큰 결단을 내려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박 대표님 아니었으면 이번에도 제 이름은 돈에 매몰됐겠죠. 다 덕분입니다. 저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 입찰이 잘돼서 마무리까지 함께 했으면 좋겠군요.”

    “기대해 보죠. 솔직히 저희 PT가 가장 좋았다는 평이 있잖습니까?”

    박주혁은 웃으며 잔을 내밀었고, 유수엽도 미소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

    “입찰 후에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정설인데, 왠지 박 대표님 말에 이번엔 잔뜩 기대되는군요.”

    “또 압니까? 유 설계자님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을 울려 파인건설이 낙찰될지?”

    “하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박주혁은 유수엽을 따라 웃었지만,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소주잔을 입에 가져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 설계사님 이건 됩니다. 이제 잘 짓는 일만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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