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20화 (120/136)
  • 120화 결정했어. 파인건설과 함께 한다.

    오후 7시 광화문 한국관.

    박주혁의 차가 주차장에 도착하자, 발렛 요원이 서둘러 차를 받아 갔다. 박주혁이 해리스와 메르헨을 안내하며 정문을 바라봤는데 한껏 멋을 부린 최효정 여사가 웃으며 손을 살며시 흔들고 있었다.

    ‘왜 저렇게 치장하셨지?’

    수수한 최효정 여사였는데 오늘따라 상당히 신경을 쓴 것 같았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세련된 것으로 골라오셨으리라. 명품들은 아니었지만, 최효정 여사에게서는 특유의 기품이 느껴졌다. 역시 사람의 품격을 드러내는 것은 명품이 아닌 인격 그 자체일지도 모를 일이다.

    박주혁이 최효정 여사의 모습에 살짝 놀라 멈칫거릴때, 먼저 반기며 뛰어나간 것은 메르헨이었다.

    “어머니!”

    “아이고, 메르헨! 잘 지냈니? 보고 싶었다.”

    “저도요.”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이 반갑게 포옹하며 웃자, 박주혁과 해리스가 서로를 마주 봤다.

    “메르헨이 이미 당신의 어머니를 알고 있었나 보군?”

    “예. 한국에 머무는 동안 메르헨이 저희 어머니와 왕래를 했었습니다.”

    “보기 좋군.”

    “···.”

    해리스의 따뜻한 말투에 박주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눈을 끔벅이며 해리스를 빤히 쳐다보는 데 그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어서 가지.”

    국화라고 적힌 방에 들어가자 곧 형형색색의 15첩 반찬이 테이블에 깔렸다. 반찬의 가짓수와 색감에 놀란 해리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점원이 나가고 해리스는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벤타의 명예회장 해리스 엘리넥이라고 합니다.”

    박주혁이 재빨리 해리스의 말을 최효정 여사에게 통역했고, 최효정 여사도 맞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최효정이라고 합니다. 부족한 우리 주혁이를 좋게 봐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최효정 여사의 말은 메르헨이 해리스에게 통역했다. 통역을 듣고 난 해리스가 손사래 치며 말했다.

    “부족하다니요. 박주효기가 얼마나 훌륭합니까? 벤타 소속 계열사 중에서도 DD 자동차의 실적이 압도적인 것을 보면 충분히 능력이 있는 사장입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칭찬하는 말에 손이 오글거렸지만, 해리스의 말을 제대로 전달해야 했다. 박주혁의 통역을 다 듣고난 최효정 여사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분위기는 훈훈했다. 최효정 여사와 해리스는 서로의 자식을 칭찬하기 바빴고, 박주혁과 메르헨은 통역하기 바빴지만 말이다.

    그리고 올 것이 왔다.

    시작은 해리스였다.

    “메르헨이 올해 27입니다. 이제 혼인해야 하는데···.”

    해리스의 말에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해리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오냐고 따지는 듯했지만, 해리스는 손으로 어서 통역하라며 제스처를 취하는 것 아닌가?

    ‘와···. 뭐지?’

    쌔했다.

    메르헨도 당혹스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해리스를 막지 않았다. 메르헨은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박주혁이 해리스의 말을 통역하자, 최효정 여사는 한술 더 떴다.

    “그러게요. 우리 주혁이도 27살인데 결혼 생각이 전혀 없네요.”

    “어머니!”

    박주혁이 당황하여 최효정 여사를 불렀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메르헨 같은 며느리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최효정 여사의 말을 들은 메르헨이 굳은 얼굴로 박주혁을 힐끔 노려보곤 해리스에게 재빨리 통역했다. 그 과정에서 당황하는 것은 박주혁뿐이었다. 그는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 그리고 해리스를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사돈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잘됐습니다. 메르헨은 주혁 군을 사랑한 나머지 회사를 계열분리까지 시킨 아이입니다. 제가 백기를 들었죠.”

    해리스의 말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박주혁의 멘탈이 와르르 무너졌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르헨을 바라봤는데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메르헨?”

    박주혁이 메르헨을 불렀지만, 그녀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이런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주혁씨는 제가 싫어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물살이었다. 그리고 최효정 여사가 쐐기를 박았다.

    “주혁이도 메르헨이 좋다네요. 날짜는 언제로 잡을까요?”

    ‘허!’

    메르헨에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이라니. 결혼은 다시 하지 않으려 했건만···.

    그때 문뜩 메르헨이 박주혁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혁 씨의 최종 목표는 뭐에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가고 싶어요.]

    메르헨은 돈만 노리고 접근했던 전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자다. 이미 부는 많았고 최효정 여사와 왕래하며 보여준 인성도 훌륭했다. 남들을 배려하는 그 마음씨 또한 이미 여러 차례 봐오지 않았나? 다만 요리가···.

    그건 하다 보면 늘겠지.

    언젠가 다시 살아난 감정이 다시 한번 꿈틀거리며 박주혁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수줍어하는 메르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메르헨과 함께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

    파리에 도착한 유수엽은 곧바로 자신의 스케치를 삼송엔지니어링과 파인건설 측에 팩스로 넣었다. 그들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파인건설의 팩스가 유수엽의 스케치를 토해냈다.

    - 즈즉. 즈즈즉.

    발신: 유수엽 건축 설계사

    수신: 파인건설 박주혁 대표.

    제목: 상암 월드컵 경기장 스케치.

    팩스를 받은 비서가 재빨리 박주혁에게 유수엽의 스케치를 전달했다. 그는 유수엽의 스케치를 보자마자, 입을 살짝 벌리며 감탄했다.

    “역시. 스케치만으로도 작품이네.”

    아직 미완성이지만, 충분히 유수엽 설계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상암 월드켭 경기장의 기본 토대라는 것을 박주혁은 알 수 있었다.

    아직은 팔각 소반으로 월드컵 경기장의 틀만 그려냈지만, 여기에 방패연과 돛배에서 영감을 받은 지붕이 올라가면 전통과 현대미가 합쳐진 선이 아름다운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완성될 터.

    박주혁이 흡족한 얼굴로 스케치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걸 보냈다는 얘기는 파인건설과 손을 잡을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응을 살피려는 것이겠지?’

    박주혁이 눈을 빛내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같은 시각 삼송엔지니어링에서는 좀 다른 반응이 나왔다.

    “이게 뭐야?”

    “월드컵 경기장 스케치라고 합니다. 유수엽 설계자님의 작품입니다.”

    “유수엽? 그 HY대 건축가 말이지?”

    “그렇습니다.”

    “아니, 그 많은 돈을 주기로 했는데 이따위 스케치만 보냈단 말이야?”

    “...”

    보고자는 말없이 고개를 살짝 떨궜다. 같은 업종에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유수엽의 스케치에 상당한 감명을 받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유수엽 설계자를 비난하는 상사의 말을 묵묵히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더 디테일한 스케치 가져오라고 해. 그렇지 않으면 계약 못 한다고. 참나. 무슨 똥배짱이야? 널리고 널린 게 건축 설계사인데···. 쯧. 요즘 주가 좀 올렸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구먼? 제대로 조련해. 우리 말 잘듣는 개로 만들라고. 알아들어?”

    “예. 상무님.”

    #

    98년 프랑스 월트컵의 경기장들을 둘러보며 영감을 받아 보려 했던 유수엽은 일정을 모두 캔슬하고 호텔에 틀어박혀 스케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초안에 방패연을 연상시키는 지붕을 추가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네. 아직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충분히 한국의 미를 표현할 수 있겠어.”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에 수행직원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차별화된 경기장 같네요.”

    “그렇지? 과연 건설사들의 반응은 어떨까?”

    “...”

    수행비서는 더는 말을 잊지 못했다. 아무리 유수엽 건축 설계사의 아이디어가 좋더라도, 건설사의 입김에 뒤집어 엎히는 것이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때마침 그의 휴대폰이 울려 수행직원과의 대화는 잠시 뒤로 밀렸다.

    “네. 유수엽입니다.”

    “설계사님 저 삼송엔지니오링 우 부장입니다.”

    “예. 우 부장님. 제가 보낸 스케치 초안 보셨습니까?”

    유수엽이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지만, 돌아온 우 부장의 답은 그렇지 못했다.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예?”

    유수엽이 당황하여 눈을 끔벅이자 우 부장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다가 만 것 같은 이런 스케치로 상무님께 완전히 깨졌습니다. 제가 유수엽 설계자님의 실력을 알고 있어 망정이지···. 상무님께서 설계자를 바꾸자는 걸 겨우 막았습니다. 제대로 된 스케치를 주세요.”

    “이보세요. 우 부장. 아직 삼송엔지니어링과 함께 하겠다는 계약을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스케치로 제가 디자인할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러프를 보여드린 것인데 시작부터 이러시면 같이 일할 수 없습니다.”

    “하아, 그러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제대로 된 스케치를 제출하세요. 이런 장난처럼 끄적인 것 말고요. 영감받기 위해 프랑스로 가셨다면서요?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

    우 부장의 말을 듣는 유수엽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영감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온 것은 맞지만, 이미 머릿속에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영감이 이미 떠올랐는데 다른 경기장을 보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유수엽은 우 부장과의 전화를 끊고 인상을 구기며 휴대폰을 침대에 던졌다.

    “아. 이 새끼들. 설계자가 무슨 자기들 뜻대로 움직이는 연필인 줄 아나?”

    씩씩거리는 유수엽에게 수행직원이 다가와 그를 위로했다.

    “선생님. 한 두 번도 아니지 않습니까? 참으시죠.”

    “더는 못 참겠어. 뭘 제출하든지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갈구지. 그렇게 해야만 더 좋은 작품이 나오는지 알고 있을걸?”

    “···.”

    건설사와 설계자의 밀당이었지만, 그 정도가 좀 지나쳤다. 돈이면 모든 살 수 있다는 삼송의 논리에 유수엽의 작품이 매몰되는 것은 자명한 일. 앞선 건축물에서도 배제되었듯 이번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도 유수엽이란 이름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직감 때문이었을까? 박주혁의 제안이 더욱 가슴을 후벼팠다.

    “후. 파인건설은 내 스케치를 받았으려나?”

    “분명 잘 보냈습니다.”

    “으음.”

    아직 연락이 없는 파인건설에 유수엽은 작지만, 희망을 걸었다.

    한편, 박주혁은 윤철영 부사장과 스케치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윤철영 부사장이 신선하다며 유수엽의 스케치를 칭찬했고, 박주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유수엽 설계자의 성향을 봤을 때 아마 지붕에도 한국적인 색채를 가미할 것입니다. 이 팔각 구조도 한국의 소반에서 연상한 것은 아닐지 추측되는 군요.”

    “소반이요?”

    윤철영 부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한번 유수엽 설계자의 스케치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때, 박주혁이 휴대폰을 열어 유수엽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유수엽 입니다.”

    “설계자님. 저 파인건설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보내신 스케치 잘 받았습니다.”

    “아, 박 대표님. 스케치는 어떠셨습니까?”

    박주혁과 통화하면서 유수엽의 일그러졌던 인상이 조금씩 진정됐다. 그리고 통화를 끝낸 유수엽의 얼굴에 오묘한 미소가 걸렸다. 유수엽은 휴대폰을 옆으로 치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방패연과 돛배라? 박 대표 참 재미있는 친구네. 어쩌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이리도 비슷하지?”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꽤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젊은 박주혁 대표라는 사람에게 유수엽은 매료되었다.

    “결정했어. 파인건설과 함께해야겠다.”

    유수엽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하자, 곁에 있던 수행직원이 눈을 크게 키우며 되물었다.

    “선생님. 정말이십니까? 삼송엔지니어링이 제시한 금액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금액입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따질 수는 없어. 삼송엔지니어링과 함께라면, 또다시 내 이름은 돈에 매몰될 것이야. 그래도 이름 좀 날린 내가 설계자들의 명예를 위해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

    “으음.”

    수행직원이 씁쓸한 입맛을 다시자, 유수엽의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우리들의 위상을 바로 세울 기회야. 좋잖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월드컵 경기장에 내 이름이 붙는다는 사실 말이야.”

    서울 월드컵 경기장 건설 프로젝트의 마지막 퍼즐이 지금 막 박주혁의 손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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