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19화 (119/136)
  • 119화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김포공항.

    박주혁이 서둘러 입국 게이트로 향했다. 다행히도 늦지 않았다. 비행기는 착륙했지만, 입국 수속이 진행 중이었다.

    “휴,”

    한숨을 내쉬며 안도하는데 누군가 박주혁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박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음? 한 기자?”

    한현태 기자가 카메라를 한 손에 쥔 채 박주혁을 향해 씩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국장 근처에 기자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박주혁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거물이 오나 봅니다?”

    “벤타의 회장이 한국에 온답니다.”

    “···!”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현태 기자를 쳐다보자, 그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벤타와 마임러 계열분리로 뜨겁잖습니까? 기자들이 몰릴 수밖에요.”

    “아, 그렇군요···.”

    건성건성 답했지만, 박주혁의 속은 복잡했다.

    ‘기자들이 몰릴 거라곤 생각 못 했을 텐데 어쩐다?’

    머릿속 계산기가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한현태 기자가 박주혁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DD 자동차가 벤타 소속이잖아요···? 박 대표님 오늘 공항 나오신 이유를 알겠군요. 내친김에 오늘 회장님이 한국에 온 이유를 좀 알려주세요.”

    “저도 모릅니다. 일주일 전에 한국에 온다는 소식만 들었어요.”

    “그래요?”

    한현태 기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지만, 정말 그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박주혁의 표정을 읽은 한현태 기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정말 모르세요?”

    “그렇다니까요.”

    “그럼, 파인테크 신제품 힌트라도 줘요.”

    뭐라도 건져보려는 한현태 기자의 직업정신에 박수를.

    신제품이 나오면 가장 먼저 사용해보고 리뷰를 남기는 일을 독접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답했다.

    “출시되면 가장 먼저 보내드리는데도 부족합니까?”

    “혹시나 특종 건져볼까 그러죠. 파인테크의 제품은 출시마다 히트니까요. 하하하.”

    한현태 기자가 너스레를 떨며 웃다가 표정을 굳히며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 촤라락!

    셔터가 빠르게 돌아갔다.

    해리스와 메르헨이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동시다발적으로 카메라 플래쉬가 터졌다.

    “한국에 오신 목적이 뭡니까?”

    “벤타와 마임러는 왜 분리된 겁니까?”

    “DD 자동차는 마임러에 속하는 겁니까?”

    기자들의 속사포 같은 말을 메르헨이 직접 해리스에게 통역했다. 메르헨의 한국어 실력에 감탄한 해리스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랄 때 박주혁이 잽싸게 카메라 앞을 가리며 상체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DD 자동차의 박주혁이라고 합니다.”

    “오! 그대가 박주효기인가?”

    해리스가 살짝 미소지으며 박주혁과 악수를 했다. 그리고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박 대표님! DD 자동차는 벤타 소속입니까?”

    “계열분리가 되자마자, 한국을 방문하신 이유가 뭡니까?”

    “DD 자동차를 재 매각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박주혁은 기자들의 말을 무시한 채 해리스와 메르헨을 김포공항 밖으로 에스코트했다. 기자들이 따라붙었지만,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박 대표님!”

    “해리스!”

    “메르헨!”

    기자들이 어떻게라도 그들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이름을 연호했지만···. 그들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

    승차 순서와 좌석에도 비지니스 예의가 있다.

    직접 운전하는 차의 경우 조수석이 상석이다. 뒷자리는 조수석 뒤편이 두 번째 상석이다. 뒷좌석의 가운데가 말석이다.

    박주혁이 모델 D의 조수석을 열자, 해리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더니 승차했다. 이어서 박주혁이 뒷문을 열려 하자, 메르헨이 잽싸게 먼저 직접 뒷문을 열며 박주혁에게 속삭였다.

    “이런 건 제가 해도 돼요. 그리고 기자들 커버해줘서 고마워요.”

    별달리 한 것은 없었다. 그저 해리스와 메르헨을 마중 나왔으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는데 메르헨은 박주혁이 기자들을 커버하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왔다고 생각했나 보다. 뭐 메르헨이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손해 보는 것은 없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박주혁이 운전석에 올라 차에 시동을 걸자, 해리스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모델 D를 직접 타보는 것은 처음인데···. 듣던 대로 엄청 조용하군.”

    “아무래도 구동 모터 외에는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안전을 위해 가상의 소리를 출력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행자들이 차량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도록 배려했죠.”

    박주혁의 설명에 해리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메르헨도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모델 D에 관심을 표하는 해리스를 위해 박주혁은 자율주행 기능을 키고 운전대에서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해리스 회장님. 모델 D는 이처럼 자율주행도 가능합니다.”

    박주혁의 모습을 보고 있던 해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살짝 벌리더니 전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 앞에 차는 없었다. 해리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천장에 달려있는 어시스트 그립을 조용히 움켜잡았다. 그리고 때마침 한 트럭이 모델 D 앞으로 끼어들었다.

    “어억!”

    해리스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해리스의 눈은 빠르게 박주혁과 트럭을 번갈아 봤다. 그가 무척 놀란듯싶었지만, 모델 D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속도를 늦추며, 트럭과 거리를 벌렸다.

    모델 D의 자율주행 기술에 해리스는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어메이징!”

    말로 듣는 것과 실제 경험하는 것은 천지 차다. 메르헨은 경험했던 상황이라 해리스가 놀라는 모습에 쿡쿡거리며 입을 가린 채 웃기 바빴다.

    “메르헨. 너는 이미 경험해봤구나?”

    “당연하죠. 전 DD 자동차의 대주주인걸요.”

    “좋아. 좋은 자세다. 허허허.”

    입은 웃고 있었지만, 모델 D가 스스로 차선을 변경해 속도를 올리자, 해리스의 표정이 굳어가며 어시스트 그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메르헨 회장님. 행선지는 어디로?”

    “우선 DD 자동차로 가시죠.”

    “알겠습니다.”

    #

    DD 자동차의 서울 본사.

    박주혁도 오랜만에 방문했지만, 경비원과 직원들은 박주혁의 모델 D를 단번에 알아챘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별일 없죠?”

    “예. 근무 중, 이상 무!”

    경비원이 멋들어지게 경례하고 DD 자동차의 정문을 열었다.

    오늘 회장단의 방문을 예고했기에 고윤희 비서가 먼저 나와 박주혁과 메르헨 부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고윤희 비서가 정중히 박주혁에게 인사하더니 독일어로 해리스와 메르헨에게 말했다.

    『환영합니다. 벤타 회장단 여러분.』

    고윤희의 능숙한 독일어에 해리스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대접받는다는 느낌일 터.

    사징실로 이동한 그들은 커피 한잔을 나누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특히 해리스가 많은 질문을 했다.

    “부모님은 살아계시나?”

    “형제자매는 어떻게 되지?”

    뜬금 호구조사라 절로 고개가 갸웃거렸지만, 박주혁은 티 내지 않고 답했다. 해리스와 박주혁의 대화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메르헨이었다.

    “아버지. 왜 그런 질문을?”

    “벤타의 자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어 물어보는 것인데 뭐 잘못되었느냐?”

    해리스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메르헨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색함이 흐를 찰나, 박주혁이 중간에 끼어들어 말했다.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박주혁의 말에 해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술은 좀 하나?”

    “술이요?”

    이번에도 뜬금없는 질문이었기에 당황하여 되물었다. 해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박주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들 보조 맞출 정도는 마십니다.”

    “그래? 그럼 한잔하러 가세나.”

    “예?”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되물음이었다. 벤타가 마임러와 계열분리와 관련된 말은 한마디도 없이 다짜고짜 술이라니?

    박주혁이 당황하여 메르헨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왠지 분위기가 이상한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철저한 갑과 을의 관계다.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지만, 박주혁은 고윤희 비서에게 광화문의 한국관을 예약하라고 지시했다.

    “한국에 오셨으니 한식으로 대접하겠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박 사장의 어머니도 초대했으면 좋겠군.”

    “예?”

    “우리 자회사를 이끄는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신 분과 함께 식사 하겠다는데 뭐 잘못되었나?”

    해리스는 너무도 당당하게 말했고, 메르헨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박주혁은 해리스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깊은 뜻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어머니께는 연락해보겠습니다.”

    박주혁은 정중히 인사하며 휴대폰을 들고 잠시 사장실을 벗어났다.

    “후.”

    “대표님 왜 그러세요?”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하자고 하시네?”

    “아, 그러세요? 그럼 한국관에 전화해서 예약을 변경할까요?”

    “그 전에 어머니와 통화 좀 하고···.”

    박주혁은 말끝을 흐리며 최효정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주혁아. 뉴스에 메르헨이 왔다고 난리더라? 혹시 알고 있었니?”

    “예. 지금 같이 있어요.”

    “그래? 잘되었구나. 그럼 오늘 저녁 집으로 와서 같이 하자고 하려무나.”

    “예? 하아.”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해리스도 그렇고 최효정 여사도 뭔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딱 짚어서 뭐라고 말하기는 애매한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해리스 명예회장이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하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박주혁은 최효정 여사에게 현재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다.

    박주혁은 최효정 여사가 단칼에 거절할 것으로 생각했다. 불편한 자리에 굳이 참석할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최효정 여사는 되레 목소리가 높아졌다.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니? 메르헨의 아버지라 이거지?”

    더 적극적인 어머니의 답에 박주혁은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7시 광화문 한국관입니다. 제가 모시러 갈게요.”

    “아니다. 거기서 보자꾸나.”

    “저, 어머니?”

    “끊는다. 준비할 것이 많구나.”

    - 뚝.

    ‘아 이 불길함은 뭐지···?’

    박주혁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품에 넣자, 고윤희 비서가 재빨리 물었다.

    “예약 변경할까요?”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찜찜한 기분을 애써 숨기며 말이다.

    #

    박주혁의 제안을 받은 유수엽 설계사의 고민은 깊었다.

    ‘돈이 아닌 명예를 남기는 건축물이라···. 박 대표 그자가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졌네.’

    눈을 지그시 감고 고민하고 있는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여러분. 이 비행기는 김포를 이륙해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KR223편입니다. 비행시간은···.]

    안내방송과는 관계없이 유수엽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삼송엔지니어링과 파인건설의 조건이 너무도 상이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돈과 명예라···. 하하, 거참.’

    돈도 중요했지만, 박주혁이 언급한 명예라는 것이 건축 설계사에겐 필요한 부분이었다. 건축 설계사는 건물이 존재하는 한 무한책임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도 설계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으로 이 건물을 설계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그야말로 ‘이름’ 없는 건축 설계사.

    88년 체조경기장 설계 당시에도 그러했다. 유수엽 건축 설계사라는 얘기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어 체조경기장 개장식에서조차 유수엽이라는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시공사 대표들과 정치권과 사이의 공치사만 오갔다.

    유수엽은 과거를 회상하며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제길 그걸 또 반복해야 한다고?’

    아무래도 박주혁이 던진 돌이 일으킨 파장 생각보다 큰 것 같았다.

    그 사이 비행기가 이륙했다.

    유수엽은 손바닥만 한 비행기 창으로 서울을 내려봤다.

    북한산이 어머니가 아이를 양팔로 감싸듯 서울 북부를 안고 있었고 한강이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며 운치를 더했다.

    서울을 멀리서 내려다보며 서울의 장관에 빠진 유수엽은 박주혁이 던진 화두를 잠시 잊고 다시 본연, 월드컵 경기장의 설계를 고민했다.

    ‘아름다운 도시에 어울리는 전통적인···. 뭐가 있을까?’

    점점 작아지는 서울을 바라보던 그때 스튜어디스가 유수엽에게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손님. 커피, 녹차 그리고 한과가 준비되어 있는데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한과라면 녹차가 좋겠군요.”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고 유수엽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튜어디스는 팔각 소반과 비슷한 모양의 쟁반에 녹차와 한과를 세팅하여 유수엽의 테이블에 살포시 올려놨다.

    유수엽은 이제는 점이 되어버린 서울을 바라보다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어?”

    유수엽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녹차와 한과를 옆 수행직원의 테이블로 옮기더니 쟁반을 들어 유심히 쳐다봤다.

    “이, 이거···. 이거다!”

    수행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수엽을 바라볼 때 그는 가방에서 붓 팬과 종이를 꺼내 일필휘지로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스케치를 그려나갔다.

    팔각 모양의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밑그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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