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18화 (118/136)
  • 118화 사이버 월드.

    [벤타 그룹이 계열분리를 결정했습니다.]

    [벤타가 마임러와 벤타로 쪼개진 이유는?]

    [벤타와 마임러, R&D 전문회사인 스마트 쉐어의 지분을 5:5로 나눈 속셈은 무엇일까?]

    벤타 그룹의 계열분리는 세계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벤타 그룹이 무슨 연유로 쪼개지는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아, 추측성 기사만 나돌 뿐이었다.

    박주혁은 신문을 유심히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벤타 그룹이 계열분리 한다는 소식은 접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벤타가··· 왜?”

    먼 미래에도 벤타는 여전히 그 위상이 건재했기에 더욱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박주혁은 의아한 눈빛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메르헨?”

    “주혁 씨! 잘 지내고 있어요?”

    메르헨의 말투는 여전히 밝았고 포근했다.

    “벤타가 계열분리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혹시 DD 자동차나 파인에 투자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내부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엄밀히 말하면, 박주혁을 만나 DD 자동차를 인수하게 되면서 일이 커진 것이다. 박주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메르헨은 에릭 마임러와 혼인을 했을 테고, 벤타의 회장이 되었겠지. 마임러와 계열분리도 되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박주혁의 질문에 메르헨은 답하지 않았다. 수화기에서는 메르헨의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잠시 뒤 돌아온 메르헨의 대답은 다소 엉뚱했다.

    “곧 한국으로 갈 테니 기다리세요.”

    “한국에요?”

    뜬금없이 한국으로 온다는 메르헨에게 박주혁은 당황했다.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메르헨이 살짝 뾰로통한 어투로 답했다.

    “아직 DD 자동차의 최대 주주는 벤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최대 주주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것인데 뭐가 잘못되었나요?”

    “···아니요. 계열분리 때문에 정신없을 텐데 갑자기 한국을 방문하신다고 해서 말입니다.”

    “해리스 명예회장님과 같이 갈 테니, 주혁 씨가 잘 대접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해리스 명예회장? 해리스 회장이 아니고?’

    박주혁의 미간이 순간 좁혀지며,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렸다. 정황을 살펴보건대 답은 하나였다.

    “설마, 메르헨 회장님?”

    “승진을 축하해 주시다니 감사하군요.”

    계열분리 된다는 소식에 메르헨이 회장을 역임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뉴스가 터지자마자 회장이 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박주혁이 말을 잊지 못하자, 메르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주혁 씨도 손슈찬처럼 딱딱하게 말끝마다 회장님, 회장님. 하시진 않겠죠?”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회장님.”

    “아, 싫어요.”

    메르헨이 살짝 퉁명스럽게 말하자, 박주혁은 웃으며 답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언제 오십니까?”

    “다음 주에 갈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명예회장님도 오신다니까 잘 준비해보겠습니다.”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박주혁이었지만, 자신의 미래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기야, 숲만 보고 있으면 다가오는 말벌은 잘 보이지 않으니까···.

    #

    메르헨과 통화를 끝낸 박주혁은 수첩에 일정을 추가했다. 그리고 수첩을 넘기며 여태 있었던 일들을 살펴봤다. 혹시 명예회장이 브리핑을 원할지도 모를 일이니, 미리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간단한 메모들만으로도 그간 발자취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때론 미소가 때론 미간이 좁혀졌지만, 다시 돌아보니···.

    “많은 일이 있었군. 파인랭스만 성장시키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새삼 놀라웠다.

    회사의 암적인 존재였던 권선호를 쳐내고, 파인랭스를 본 궤도로 올리는 것이 목표였는데 어느새 4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기업이 되었다.

    (주) 파인랭스

    (주) 파인

    (주) 파인테크

    (주) 파인건설

    그리고 박주혁이 직접 경영하는 DD 자동차와 지분율을 가지고 있는 디스플레이 업체 픽셀까지.

    박주혁은 각 회사의 현재 진행 중인 사항들과 미래 프로젝트들을 나열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문뜩 박주혁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월드컵에 맞춰 스마트폰을 출시할 생각이었는데···. 콘텐츠가 너무 없겠는데?”

    미국의 페이스메이커가 시장에 등장하는 것은 2004년, 원래의 흐름이라면 페이스메이커가 PC로 시작하여 시장을 형성한 뒤 2007년 마이폰이 등장하며 페이스메이커는 발 빠르게 모바일로 이식하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특히나 모바일에 특화한 인별그램까지 런칭하며 SNS 시장을 집어삼키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페이스메이커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우리나라의 SNS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99년 세상에 등장한 사이버월드였다. 2000년 초반까지 한국 SNS의 절대적인 강자였지만,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시장에 적응하지 못해 사장된 불운의 아이콘이다. 많은 이들이 사이버월드의 몰락을 아쉬워했을 터.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수첩에 적힌 사이버월드라는 글자에 별표를 치더니 팬으로 책상을 툭툭 쳤다.

    “스마트폰 출시만으로는 힘들지···. 파인이라는 컨텐츠가 있긴 하지만, SNS라고 하긴 미흡하다. 사이버월드의 모바일화와 글로벌화라는 두 마리 토끼만 잡는다면···!”

    박주혁의 머릿속은 거미줄처럼 촘촘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파인그룹은 그의 전략을 수행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할 수 있어. 페이스메이커보다 앞섰던 토종 SNS의 반격이다.”

    박주혁의 눈에 또다시 이채가 서렸다.

    #

    B 2 2

    박주혁은 곧바로 심영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 과장. 파인에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해야겠습니다.”

    “또···요?”

    심영찬이 앓는 소리를 했지만, 박주혁은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소비자 개인이 자신의 일상을 올리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개인의 일상을 올리는 공간이요?”

    “그렇죠. 카페와 같은 다수가 모인 공간 말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자신의 지인들에게만 공유하는 서비스 말입니다.”

    “이미, 개인 카페가 있어서 지인들과 함께 카페를 가입하면 충분히 그런 기능을 할 수 있을 텐데요.”

    심영찬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카페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카페가 있는데 왜 개인들이 자신만의 홈페이지를 구축하려 하겠습니까?”

    “으음.”

    개인별 홈페이지가 없으면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말을 듣는 시기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각종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해해야 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꾸미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그런 불편함을 파인에서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러니까 대표님. 파인의 아이디로 사용할 수 있는 개개인별 미니 홈페이지를 만들어주자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자신의 일상을 쓰고, 사진도 올리고, 지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자는 말입니다.”

    “파인과 연동해서 말이죠?”

    “두말하면 잔소리죠. 개발자가 더 필요하면 기안 올리세요.”

    역시 심영찬과의 호흡은 변함없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기분이 좋게 전화를 끊고 수첩을 뒤적이는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표님!”

    “예?”

    박영희 디렉터가 잔뜩 흥분하여 소리쳤고 박주혁은 당황하여 눈을 끔벅였다.

    “아니, 개발팀에 무슨 요청을 그리 많이 하세요?”

    “박 디렉터.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심영찬이 미니 홈페이지 개발이라는 미션을 박영희 디렉터에게 쪼로로 달려가서 보고했나 보다. 박영희 디렉터는 목소리를 높이며 박주혁을 몰아붙였다.

    “지금 AI 개발, 모바일 OS 개발, 사운드바다 개선, 번역 서비스 개발 등 지금 팀이 얼마나 과부하인지 아십니까?”

    “음. 하지만, 해야 합니다. 파인테크에서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해 스마트폰을 출시할 겁니다. 모바일 OS도 이제 궤도에 올랐잖습니까? 시장에 선보여야죠.”

    “아니, 그러니까. 지금도 벅찬데 미니 홈페이지라뇨?”

    “박 디렉터. 조금 넓게 보세요. 스마트폰이 출시됐는데 사용할 콘텐츠가 적다면 과연 스마트폰을 누가 쓰겠습니까?”

    “···.”

    박주혁의 지적에 박영희 디렉터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매일 밤을 새우고 있는 직원들이 안타까워 항의하고 있긴 했지만, 박주혁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박영희가 말을 잊지 못하자, 박주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개발자가 더 필요하면 뽑으세요.”

    “뽑아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대표님. 아까 콘텐츠 말씀하셨잖아요? 이번에 월드컵 홍보영상 번역을 하면서 생각해봤는데, 스마트폰이면 영상도 재생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죠.”

    “그럼 동영상을 휴대폰을 들고 다니면서 볼 수도 있고요.”

    박영희 디렉터의 말에 박주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항의할 때와는 달리 스마트폰 콘텐츠라는 말에 꽂혀 박영희 디렉터가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물론 그 부분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건 좀 이르지 않나? 조금 전까지 앓는 소리 하더니···.’

    박영희 디렉터의 말에 박주혁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투덜거렸지만, 박영희와 심영찬은 박주혁이 간지러워하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 긁었다. 이러니 안 좋아할 수가 있나?

    #

    그날 오후.

    박주혁은 부지정리를 시작한 목동으로 향했다. 머리에 눌러쓴 안전모가 어색했다.

    윤철영 부사장과 몇 임원들이 박주혁의 곁에서 열심히 설명했다.

    “대표님. 지금 이곳에 팽나무와 벗나무 그리고 야생화들로 꾸며진 가든이 들어설 계획입니다.”

    윤철영 부사장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도면을 힐끔 쳐다봤다. 단지의 정 중앙을 가로지르는 가든은 단지 외곽까지 이어져 있어 단지 내 산책만으로도 충분히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은 입주민들의 커뮤니티 센터로, 운동시설, 독서실 등이 들어섭니다.”

    “그렇군요.”

    설계도면과 서 있는 곳을 바라보며 들어설 파인건설의 아파트 단지를 상상해봤다. 층간소음에서 해방된 입주민들의 행복한 표정으로 반갑게 이웃과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떠올랐다. 박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사 와야겠다.”

    무심결에 뱉은 말에 윤철영 부사장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되물었다.

    “예?”

    “아, 아파트가 지어진 모습을 상상해봤더니 이사 오고 싶어지는군요.”

    “어?”

    윤철영 부사장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더니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예?”

    “파인건설이 지은 층간소음이 없는 아파트. 그 곳으로 이사한 파인건설 대표. 뭔가 상징적이고 좋지 않습니까?”

    “으음?”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윤철영 부사장이 세부 설계도를 꺼내 박주혁에게 내밀었다. 누가 봐도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동의 도면이었다.

    “대표님. 3동이 가장 로열 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막힌 곳도 없고 정말 좋아 보이는군요.”

    박주혁의 말에 윤철영 부사장이 씩 웃더니 도면을 한 장 넘기며 말을 이어갔다.

    “이건 그냥 혹시 모를 계획이었습니다만, 한번 검토해보시죠.”

    “으음?”

    박주혁은 도면을 천천히 훑었다.

    파인건설의 아파트 브랜드인 파이니스트는 층간소음 완화에 목적을 두었기에 계단식이 아닌 복도식이었다. 한 층에 2세대씩 배치되며 엘리베이터 1개를 공유하는 구조인데 맨 탑층의 도면이 살짝 달랐다.

    “이건 좀 다른데요?”

    “펜트하우스로 한 개 층을 한 세대가 사용하는 도면을 그려봤습니다. 옥상을 테라스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합니다. 이곳을 대표님이 사용하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습니다.”

    도면만으로도 탐이 나는 구조였다. 34평형 2세대를 합쳐놓은 크기에 넓은 옥상 테라스까지···.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꿈일 그런 집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단둘이 거주하기에는 너무 컸다. 박주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윤철영 부사장의 어깨를 툭 쳤다.

    “생각해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둘이 거주하기에는 너무 크군요.”

    “그, 그럴까요? 이런 아파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이목을 끌 것 같긴 한데요.”

    “음. 이슈몰이는 할 것 같군요. 완전히 배제하지는 마시고 생각을 좀 더 해보죠. 아직 땅도 안 팠으니까요.”

    “알겠습니다.”

    #

    목동 현장에 토목공사가 들어가고,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입찰제안서 준비로 파인건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박주혁도 진행되는 일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류 더미를 파고들었다.

    그때 평소와는 다른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단조로운 기계음 대신 간단한 멜로디가 구사되는 파인테크의 SKY 휴대폰이었다. 한눈에 봐도 기존 벽돌폰보다 확 작아진 크기에 심지어 흑백도 아니었다. 아직 색감 구현이 완벽하지 않았지만, 컬러였으며 위아래로 여는 폴더 타입이었다.

    어색한 벨소리에 박주혁이 힐끔 휴대폰을 바라보다 전화기를 열었다.

    [알람]

    - 김포공항! 메르헨 귀국. 1시간 전.

    휴대폰의 화면에 경고를 알리듯 떠있는 팝업창을 보며 박주혁의 미간이 와락 좁혀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차!”

    박주혁은 재빨리 사무실을 나서 모델 D에 몸을 실어 악셀을 밟았다. 웬만한 스포츠카보다 출력이 좋은 모델 D는 튕겨 나가듯 도로를 질주했다. 운전대를 꽉 잡은 박주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핸들을 한 번 내리쳤다.

    “아. 이런 중요한 일정을 놓치다니···!”

    박주혁의 모델 D는 김포공항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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