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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117화 (117/136)
  • 117화 가우디는 그렇지 않죠.

    고건우 서울시장에게 입찰 조건 완화를 끌어낸 박주혁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막상 월드컵 경기장 건설프로젝트에 참가하려고 보니, 2003년 세계 10대 축구경기장에 뽑힌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박주혁으로서는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스템을 확인해봤지만···.

    “검색, 월드컵 경기장 설계자.”

    - 자료가 없습니다.

    “검색, 서울 월드컵 경기장.”

    - 보도문 번역 23건이 있습니다.

    보도문 번역만 있을 뿐 그 어느 곳에서도 설계자와 관련된 정보는 없었다.

    “후. 이를 어쩐다?”

    분명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설계자가 존재할 진데, 그 어디에도 이름이 없었다. 세계 유명 건축물에는 설계자 또는 건축가에 대한 언급이 항상 함께 따라다니지만, 삼송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명 외에는 전혀 정보가 없었다.

    이름 없는 설계자는 분명 아닐 텐데···.

    “으으음.”

    이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박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대표님. 저, 한설계 입니다.”

    “아, 한 사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현장에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현장은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모두 적극적으로 임해서 공기도 단축되고 있습니다. 품질은 두말하면 잔소리고요.”

    “잘 됐군요.”

    “윤철영 부사장에게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한설계 사장의 말에 박주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분명 축하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축하는 감사드리지만, 걱정이네요.”

    “걱정이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한 사장님도 설계사시니, 제 고민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하고 말씀드리죠.”

    지금 박주혁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사람은 설계자일 터. 박주혁의 고민을 들은 한설계는 낮게 신음하더니 답했다.

    “으음. 박 대표님의 고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청우, 아니 파인건설에도 유망한 설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소통해보시면 답이 좀 나오지 않을까요?”

    “물론 그들을 못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에 짓는 월드컵 경기장은 상징성과 철학이 담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설계는 외주를 나가는 것이 맞을 것 같네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추천해주실 분 안 계십니까?”

    “으음.”

    한설계 사장은 낮게 신음하더니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박주혁의 속내는 시끄러웠다.

    “별것 아니라 생각했는데 막상 실행하려니 막막하군.”

    아무것도 없는 흰 종이에 월드컵 경기장이라는 그림을 그리려니 막막한 것은 당연했다. 파인건설의 전신인 청우건설이 단독주택, 아파트, 그리고 백화점과 같은 전형화된 건축물만 만들어 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박주혁은 이번에도 서주경 교수에게 도움의 손실을 내밀었다.

    “서 교수님. 이번에도 도움이 필요합니다.”

    박주혁의 얘기를 들은 서주경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건축 설계요? 그쪽은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데요. 미안하게 됐네요.”

    “혹시나 해서 여쭤봤습니다. 그나저나 홍어는 언제 드실까요?”

    “당분간은 연구 발표해야 해서 좀 힘들 것 같아요. 연말쯤 돼야 시간이 나겠는데요?”

    “그럼, 여유되실때 연락 주십시오. 홍어는 킵해놓겠습니다.”

    서주경 교수도 건축은 생경한 분야였기에 인맥이 없었다.

    박주혁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고 나니 비서가 들어와 부재중 전화가 있었음을 알려왔다.

    “한설계 사장님께 연락이 왔었습니다. HY대 건축학과 교수님과 연락이 닿았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HY대 건축학이면 그래도 S대 건축학과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만큼 공신력이 있을 터. 박주혁은 재빨리 한설계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사장님. 좋은 소식 있으십니까?”

    “예. 삼송엔지니어링 협의 중인 설계사가 누군지 알아냈습니다.”

    “···!”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휴대폰을 귀에 밀착시켰다.

    “대체 누구입니까?”

    #

    박영희가 파인의 디렉터로 승진한 후 번역 연구팀의 팀장은 구경숙 과장이 맡게 되었다. 당연히 후임은 그녀였기에 직원들의 불만은 없었다. 실제로 구경숙 과장의 실력이 가장 뛰어나기도 했고 말이다.

    “월드컵 조직위에서 파인랭스에 번역을 의뢰한 것은 모두 알고 있죠?”

    “네.”

    구경숙 팀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자, 직원들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대표님께서 직접 조직위와 연결되어 수주한 프로젝트입니다. 그 말은···?”

    “품질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번역 연구팀의 누군가가 큰소리로 답했고, 구경숙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2002년 월드컵에 세계 각지에서 우리나라를 찾을 것입니다.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로서는 절호의 기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직원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구경숙 팀장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현재 월드컵 조직위에서 의뢰한 문서는 한국을 알리는 캠페인과 영상으로 우리가 주로 번역하던 B2B 번역과는 조금 다릅니다. 자연스러워야 하며, 구어체를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수려한 문체를 사용하는 번역사를 추려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언어별로 원어민 감수까지 진행해야 하니 PM들은 꼭 명심해주시고, 동영상 번역을 위해 필요한 장비가 있으면 기안 올리도록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구경숙 팀장은 회의를 마치고, 조관영 차장에게 향했다.

    “조 차장님? 잠시 시간 되시나요?”

    구경숙 팀장의 말에 조관영 차장이 살짝 얼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쭈뼛쭈뼛 일어났다.

    “왜, 왜 그러시죠?”

    “잠시 저, 좀 보시죠.”

    “예에···.”

    조관영 차장이 구경숙 팀장에게 끌려 나가자, 한기훈 과장과 최지훈 대리가 수군댔다.

    “어제, 차장님과 술 마셨어?”

    “아니요. 어제 바로 가신다고 했는데요?”

    “아, 구 팀장님. 갈수록 무섭다. 난 결혼 하지 말까 봐.”

    한기훈 과장의 말에 최지훈 대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색했다.

    “그런데, 과장님은 애인도 없으시잖아요.”

    “최 대리. 그냥 그렇단 말이지! 꼭 그렇게 찔러야 속이 후련하냐?”

    “아, 아니요. 그렇단 말이죠.”

    한기훈 과장의 눈에는 불똥이 튀었고, 최지훈 대리는 피식 웃으며 자리로돌아갔다.

    한편, 구경숙에게 끌려 나온 조관영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잘 못 한 게 없는데···? 내가 기념일 같은 걸 놓쳤나? 아씨, 뭐지?’

    머릿속이 복잡한데, 구경숙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 이게 뭐. 뭐야?”

    구경숙은 말이 없었고, 조관영은 떨리는 손으로 구경숙 팀장이 내민 얇은 박스를 받아 열었다.

    “이, 이건?”

    임신 테스트기였다. 그리고 그 안에 두 줄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조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구경숙을 빤히 쳐다봤다. 조관영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는 임신 테스트기와 구경숙을 번갈아 보더니 소리쳤다.

    “여, 여보!”

    “오늘 아침 회사에서 확인한 거야. 아침 일찍 확인해야 정확하다더라고.”

    “경숙아!”

    조관영이 구경숙 팀장을 와락 껴안고 들어 올리자, 구경숙이 씩 웃으며 조관영을 나무랐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보라고 해. 우리가 불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와하하! 내가 아빠가 된다!”

    “못 말려, 진짜.”

    구경숙이 퉁명스럽게 말을 뱉긴 했지만, 그녀의 눈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벤타의 주주총회.

    이사진들의 대부분은 엘리넥 가문과 마임러 가문 사람들이었다. 특별한 안건이 없다면 의례적인 행사에 지나지 않는 주주총회였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달랐다.

    “회장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임러가와 엘리넥은 이제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벤타도 변화해야 한다는 소리죠.”

    해리스의 말에 마임러 가문 사람들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엘리넥 가문 사람들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떠한 예고도 없이 벤타의 근간을 흔드는 해리스를 질타하는 이사진들의 날카로운 눈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해리스는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말을 이었다.

    “마임러가와 결별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관계는 지속될 겁니다. 벤타는 사업을 확장하면서 조직이 비대해졌습니다. 그로인해 비효율적인 의사결정이 늘어났고, 벤타는 무거워졌죠. 그리고 회장의 권한도 커진 만큼 비리 가능성도 커졌습니다. 그렇기에 엘리넥과 마임러가 각자의 길을 가면서 서로를 견제하고 또 함께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으으음.”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마임러가의 몇몇이 낮게 신음했다. 해리스의 말이 틀리지 않았지만, 반발은 거셌다.

    “혈맹이 끊어지면, 엘리넥과 마임러가는 분열하게 됩니다. 안 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임러가의 투자가 없었다면, 벤타가 생겼겠습니까?”

    마임러가 이사진의 말에 엘리넥 가문도 얼굴을 붉히며 들고 일어났다.

    “말씀이 지나치시오! 그렇다면 엘리넥의 기술이 벤타의 근간임을 모르시는 거요?”

    “당장, 사죄하시오!”

    양 가문이 극렬하게 부딪히자, 해리스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 쾅!

    “모두 자중하세요! 혈연으로 돈독하다더니 이런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데 혈연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해리스의 말에 양 가문의 이사진들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해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어갔다.

    “저 먼 아시아의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전기차를 만들어냈고, 전 세계로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벤타는 뭘 하고 있었습니까?”

    해리스의 물음에 이사진들이 헛기침하며 먼 곳을 바라봤다. 그때 누군가 관련 사항을 알고 있는지 자신 있게 말했다.

    “회장님. DD 자동차라면 경영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맞습니다. 벤타는 DD 자동차의 최대 주주죠. 그리고 그건 벤타의 부회장인 메르헨 엘리넥의 결정이었습니다.”

    “오! 역시, 메르헨.”

    이사진들도 메르헨의 역량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전기차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낸 DD 자동차를 인수한 것 또한 그녀의 작품이라는 소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장내 분위기가 좋아졌지만, 해리스는 고삐를 놓지 않았다.

    “메르헨의 능력은 모두 인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차기 회장으로 유력한 메르헨이 마임러가와 혼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해리스의 말에 모두 수군거리며, 소란스러워졌다.

    “마임러가와 혼인하지 않으면, 회장이 될 수 없다는 우리의 방침 때문에 벤타는 유능한 회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없애려면, 마임러와 엘리넥은 따로 또 같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으으음.”

    모두 낮게 신음하며 고민에 빠졌을 때, 해리스는 벤타의 사업영역을 2개로 분리하는 방안을 이사진들에게 돌렸다. 사업의 분리였지만, 또한 협력이 필요한 영역이 포함되어 있어 협업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으음. 해리스의 안대로라면 둘 같은 하나겠군요.”

    “책임은 각 가문에서 임명한 회장이 지게 될 테고···.”

    “겹치는 영역 이외에는 자발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소리군.”

    해리스의 제안서를 꼼꼼히 살펴보던 마임러가의 젊은 이사이자, 메르헨의 내정된 남편이었던 에릭 마임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해리스에게 말했다.

    “좋은 안이군요. 저도 원치 않는 혼인은 사절이었거든요. 전 아주 마음에 드는 안이라 생각합니다. 할아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으으음.”

    마임러가의 적통자가 찬성하고 나오니, 분위기는 급물살을 탔다.

    #

    한설계 사장의 소개로 박주혁은 삼송엔지니어링의 협력을 요청받은 건축 설계사를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건설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연락받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유수엽이라고 합니다.”

    유수엽 건축 설계사.

    88년 체조경기장 설계로 90년 국제 건축상 금상을 수상했고, 92년 하난의 868타워의 설계공모에 당선되기도 하는 등 건축 설계 분야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는 설계사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유수엽은 박주혁의 말에 신음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 설계를 맡아 주십시오.”

    “허허.”

    유수엽은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턱을 매만지더니 말했다.

    “삼송엔지니어링에서 이미 요청이 있었습니다.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삼송엔지니어링에서 먼저 손을 뻗은 만큼 거절하기 힘들다는 것은 맞다. 엄청난 금액을 제시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세계의 찬사를 받는 서울 월드컵 경기장이었지만, 박주혁은 설계자인 유수엽의 이름이 묻혀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한설계 사장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유수엽 건축 설계사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또 다른 말로 설계자인 ‘가우디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란 뜻이다. 그런데 세계 10대 축구경기장으로 선정된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는 유독 설계자가 누군지 알수 없었다. 오로지 삼송엔지니어링의 이름만 거론될 뿐이다.

    설계사는 예술인이고, 건축회사는 그들의 붓일 텐데, 붓인 삼송엔지니어링이 모든 명예를 차지한다는 것이 박주혁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선생님. 파인건설은 삼송엔지니어링 처럼 거액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으음?”

    박주혁의 말에 유수엽이 흥미가 가는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예술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에서 설계자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설계자들이 무슨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어찌 설계한 건축물마다 이름을 남기겠습니까?”

    “가우디는 그렇지 않았죠.”

    박주혁의 말에 유수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우디를 모르는 건축 설계사가 있을까? 유수엽이 살짝 당황하여 멈칫거리자, 박주혁은 말을 이어갔다.

    “파인건설은 돈이 아닌 명예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설계사의 애칭이 붙은 건축물. 한번 만들어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박주혁의 말에 유수엽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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