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대표님은 길을 만들어가시는 분.
파인의 모바일 OS인 fOS는 윤태현 군의 주도하에 개발되고 있었다. 보안에 관심이 많았던 윤태현 군 덕분에 fOS의 보안 성능은 기대치를 상회했다. 그리고 fOS가 처음 적용된 제품이 바로 FP-250이었다.
fOS와 사운드바다의 연동을 위한 실험적인 시도였고, 펌웨어 업그레이드를 통해 지속적으로 fOS의 결점들을 수정 보완해 가고 있었다.
포털사이트 파인도 꾸준히 지배력을 올리고 있었다. 추가 서비스인 소모임, 즉 카페 기능을 업데이트하자, 파인의 성장은 폭발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개발자 포럼’이라는 카페에서 하나의 이슈가 터져 나왔고 곧 나비효과처럼 언론의 1면을 장식했다.
[Fp-250의 펌웨어에서 fOS라는 소프트웨어 발견!]
[fOS는 Mp3 플레이어의 구동 SW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OS다.]
[fOS에서 모바일과 마켓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파인테크의 노림수는?]
신문을 보고 있던 박주혁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심영찬 과장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심 과장. 진정하세요.”
“지, 지금 진정되게 생겼습니까? fOS에 대한 얘기가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잘 된 것 아닙니까?”
“예?”
잘된 일이다. 별다른 입장 표명 없이 파인은 fOS를 계속 개발하면 될 일이다. 신비주의로 관심을 끌고 스마트폰을 출시하면 그뿐.
“하, 하지만!”
“fOS는 어차피 추후 개발자들에게 개방할 SW입니다.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개발자들이 fOS 위에서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겁니다. 사운드바다와 마찬가지로 플랫폼이 되는 거죠. 사운드바다에 우리가 직접 음원을 올리나요? 잘 생각해보세요.”
“···.”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 과장이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박주혁은 씩 웃으며 나긋나긋 말을 이어갔다.
“기자들이 물어오면, 정해진 바 없다. 기밀 사항이다. 등 둘러댈 말은 많습니다. 잘 처신하십시오.”
“하지만, 아직 fOS를 전격 공개하는 것은 이른 것 아닙니까?”
“Fp-250에 fOS를 사용하기로 하는 순간 공개될 것을 각오했습니다. 되레 좀 늦은 감이 있네요.”
“아아.”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 과장이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탄식하더니 말했다.
“대표님. 이제는 이런 식으로 채찍질하시는 겁니까?”
“이제야 눈치채셨군요. 하하하.”
박주혁이 웃음을 터트리자, 심영찬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 너무하십니다. 어쨌든 서둘러야겠군요.”
“그래야죠. 픽셀에서 정전식 터치스크린의 노이즈도 많이 해결했고, 이제는 컬러 터치스크린 개발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제이콥님이 벌써 컬러 터치스크린 개발에 착수했습니까?”
Fp-250의 조작부를 터치스크린을 적용하자, 픽셀사에 터치스크린을 구매하고 싶다는 전화가 쇄도했다. 특히 삼송에서 적극적이었지만, 삼송디스플레이에 기술을 뺏길 것을 우려한 제이콥이 거절했다고 한다.
과연 기술 유출을 우려한 것인지는 의심스러웠지만, 어쨌든 픽셀은 한국의 파인테크에 독점공급계약을 체결했고, 일본, 미국 그리고 중국 등의 기업에 터치스크린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이제 곧 일본의 써니, 쌰프에서 터치스크린을 장착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파인테크와 픽셀은 다음 스텝을 이미 준비 중이었다. 바로 해상도 320X240의 컬러 터치스크린 말이다.
“와, 컬러라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처음에는 흑백을 막 벗어나 색감이 있는 정도일 테니까”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고객들은 열광할 겁니다. 그나저나 UI 디자인들도 그에 맞춰 개발해야겠군요.”
“환경이 바뀌는 만큼 변화해야죠.”
“착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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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찬과 통화를 끝낸 박주혁은 윤철영 부사장과 함께 서울시청으로 향했다.
윤철영 부사장은 운전대를 잡은 채 박주혁에게 넌지시 물었다.
“정말, 서울시장이 입찰 기준을 완화해줄까요?”
“시도해봐야죠. 현재 우리 건설 실적으로는 월드컵 경기장 입찰조차 하지 못하니까요. 삼송엔지니어링에서 로비한 것이 분명합니다. 삼송, 미래, 태우 등 메이저 건설사 외에는 입찰할 수 없는 조건이라니···.”
박주혁의 말에 윤철영 부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분명 길이 열릴겁니다. 대표님은 길을 만들어가시는 분이니까요.”
“예? 하하. 비행기도 적당히 태우셔야죠.”
박주혁이 웃으며 말했고, 윤철영 부사장도 피식 웃었지만, 그의 눈빛은 상당히 진지했다.
그들은 곧 서울시청에 도착했고, 시장실로 향했다.
비서가 그들을 제지하며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고건우 서울시장님과 면담이 잡혀있습니다.”
윤철영 부사장의 말에 비서가 수첩을 뒤적이더니 되물었다.
“파인건설의 박 대표님과 윤 부사장님이신가요?”
“맞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비서는 수화기를 들어 고건우 시장과 통화한 후 시장실 문을 열어 그들을 들였다.
고건우 시장은 박주혁과 윤철영 부사장이 들어오자,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파인건설 박주혁 대표입니다.”
“윤철영 부사장입니다.”
고건우 서울시장은 간단하게 악수를 하고 접견실에 앉으며 물었다.
“커피? 녹차? 뭐로 하시겠습니까?”
“커피로 부탁합니다.”
박주혁이 비서를 돌아보며 말했다. 비서가 커피를 타러간 사이 고건우 서울시장은 박주혁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파인건설 대표라고 해서 동년배일 줄 알았는데 상당히 젊으시군요?”
“원래는 파인랭스라는 번역회사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DD 자동차의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오? DD 자동차면···. 아! 박주혁 대표?”
고건우 사장이 그제야 박주혁의 존재를 알았는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고 박주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허. 생각지도 못했는데 유명인을 만나보는군요.”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요. 외환위기 속에서 한국을 빛낸 기업인 아니십니까?”
박주혁이 고개를 가로젓는데 비서가 커피를 가져왔다. 고건우 시장이 커피를 한 모금 하고는 박주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 저를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이라?”
고건우 시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처음 박주혁을 반길 때와는 달리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정치인으로서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정부에서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신축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고건우 서울시장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잠실 경기장이 너무 노후화됐지요. 증·개축하는 비용이나 짓는 거나···.”
고건우 서울시장은 말을 흐리며 박주혁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이미 박주혁의 속내를 훤히 보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박주혁의 말을 기다렸다.
“서울 월드컵 경기장 건설에 이미 삼송엔지니어링이 많은 공을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
고건우 시장은 커피잔을 입에 가져간 채 눈을 빛내며 박주혁을 노려봤다. 그의 매서운 눈빛에 박주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고건우 시장의 카리스마는 엄청났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 박주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서울 월드컵 경기장 신축은 외환위기에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한다는 좋지 않은 시선이 있습니다. 거기다 삼송이라는 대기업이 건설하게 된다면, 대기업 밀어주기라는 비판 여론이 형성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고건우 시장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피식 웃었다.
“박 대표님. 재미있는 분이군요.”
이미 속내는 들켰지만, 하던 말은 마무리해야지.
“그래서 중견기업인 파인건설도 서울 월드컵 경기장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열어주십시오.”
“하하하.”
고건우 시장이 박장대소하며 웃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박 대표. 논리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수도. 서울의 월드컵 경기장을 짓는 일을 어중이떠중이에게 맡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건우 시장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고 차분했지만, 말속에는 뼈가 있었다. 마치 삼송엔지니어링을 내정했다고 은연중 말하고 있질 않나?
박주혁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목소리에 힘을 줬다.
“기술적인 면이나 건축적인 면모를 봤을 때 파인건설도 삼송엔지니어링에 밀리지 않습니다.”
“파인건설의 전신이 청우건설이죠?”
“그렇습니다.”
“훗.”
고건우 시장이 콧웃음을 치며 커피 잔을 들자,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윤철영 부사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급기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고건우 시장을 향해 소리쳤다.
“서울시장이 파인건설을 비웃을 자격은 없습니다!”
“···?”
고건우 서울시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윤철영 부사장을 올려봤다. 윤철영 부사장은 넥타이를 살짝 풀어 헤치더니 말을 이었다.
“절 무시하는 것은 얼마든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과 파인건설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겁니다.”
고건우 시장은 윤철영 부사장의 반응에 고개를 살짝 갸웃했고, 박주혁은 윤철영 부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윤 부사장!”
하지만, 윤철영 부사장은 꼿꼿하게 서서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이 청우건설을 인수하실 때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흠?”
윤철영 부사장의 말에 고건우 시장이 박주혁과 윤철영 부사장을 번갈아 봤다. 그의 눈에 호기심이 언뜻 비쳤다.
“일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일자리. 외환위기로 졸지에 길거리로 나앉은 서민들에게 질 낮은 일자리라도 만들어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
윤철영 부사장의 말에 고건우 시장은 박주혁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박주혁은 여전히 윤철영 부사장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윤 부사장!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대표님은 가만히 계셔 보세요. 지금 서울시장이라는 작자가 우리를 비웃고 곡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건우 시장은 낮게 신음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윤철영 부사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윤 부사장님. 알겠습니다. 진정하세요. 제가 사과드리죠.”
“제가 아니라 대표님께 그리고 파인건설에 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정하시고 앉으세요.”
윤철영 부사장이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자, 박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건우 시장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윤 부사장이 잠시 흥분했나 봅니다.”
“아닙니다. 사과는 제가 해야지요. 박 대표님 곁에는 참 훌륭한 분이 계시는군요.”
“예?”
충분히 언짢은 일이었음에도, 고건우 시장은 미소 띤 얼굴로 윤철영 부사장을 칭찬하며 말했다.
“건설프로젝트 수주를 위한 청탁인가 싶어서 좀 떠봤습니다. 제가 좀 지나쳤던 것 같네요. 사과드리죠.”
“···?”
박주혁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고건우 시장을 쳐다보자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파인건설이 일자리를 만들어 서민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는 얘기는 참 감명 깊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돼야 하고요. 사실 저는 나랏빚을 갚겠다며 금을 모으는 국민에게 월드컵 경기장 신축이라는 명목하에 3천억이라는 짐을 또다시 지워야 하는지 의문이었습니다.”
고건우 시장의 말에 박주혁과 윤철영 부사장이 서로를 마주 보며 눈을 끔벅였고 고건우 시장은 말을 이었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빚을 일부 갚았지만, 그거 아십니까? 결국은 대기업들의 빚을 국민이 갚아준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나랏빚은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투자로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지한 국민은 자식들의 돌 반지까지 꺼내 나라를 살리겠다고 모여들었습니다.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하는 고건우 시장의 말에는 울림이 있었다.
“그래서 저는 잠실을 간단한 리모델링 후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더는 국민에게 짐을 지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죠.”
“그러셨군요.”
“그런데 박 대표님과 윤 부사장님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고건우 시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국민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어쩌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죠.”
고건우 시장은 차를 한 모금 하더니 말했다.
“미국의 루즈벨트는 경기부양을 위해 댐 건설과 같은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했었죠. 그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에게도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송엔지니어링이 사활을 걸고 있지만, 우리 솔직해져 봅시다. 삼송엔지니어링은 이것 말고도 먹고 살길이 많아요.”
고건우 시장의 말에 아직도 씩씩거리던 윤철영 부사장이 피식 웃어버렸다.
“윤 부사장도 인정하나 봅니다?”
“으흠.”
윤철영 부사장이 좀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고 고건우 시장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위에서 입김이 거세지만, 제가 책임지고 월드컵 경기장 입찰 기준을 완화하겠습니다. 파인건설에서도 당당히 입찰하십시오.”
고건우 시장의 말에 박주혁과 윤철영 부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정말입니까?”
“제 정치 생명을 걸고 약조하겠습니다.”
매섭고 카리스마 넘치던 고건우 시장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