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15화 (115/136)

115화 정면 돌파밖에 없다.

박주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모닝커피와 신문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가을로 접어들어서인지 따뜻한 커피가 오늘따라 더욱 좋았다.

- 후룩.

포털 사이트 파인에서도 뉴스 서비스를 시작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뉴스를 접할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 신문은 포기하기 힘들었다. 종이와 잉크 냄새가 심신을 차분하게 해주기 때문일까?

1면에는 역시나 외환위기 및 정부의 비리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박주혁의 시선을 사로잡는 제목이 있었으니···.

[잠실 주경기장, FIFA 실사단 평가에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감이 왔다.

88 올림픽 주경기장을 월드컵에 재사용하려면 리모델링을 반드시 해야 한다. 노후한 시설을 FIFA 기준에 맞추려면 새로 짓는 비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월드컵 경기장을 짓는 것이 더 이익일 터.

외환위기에 사회간접자본 투자한다는 비난이 빗발치지만, 상암동에 월드컵 경기장은 지어질 것이다.

“월드컵 경기장···. 가만, 파인건설이 이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는 없을까?”

박주혁이 눈을 빛내며 수화기를 들었다.

“국장님 안녕하십니까? 박주혁입니다.”

“오. 박 대표. 오늘은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을까?”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하나요? 환절기 안부 인사입니다.”

박주혁이 너스레를 떨었고, 유명한 국장은 비실비실 웃더니 말했다.

“우리 사이에 말 돌리지 맙시다.”

유명한 국장의 말에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리 좀 놔주십시오.”

“다리? 다리라면 내가 좀 잘 놓긴 하지.”

유명한 국장이 껄껄 웃더니 박주혁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월드컵 조직위에 다리를 놔달라...”

“외환위기 때문에 번역일도 줄고 해서 돌파구가 필요합니다.”

“으음. 하긴, 월드컵을 개최하려면, 번역이 필요하긴 하겠지.”

“그리고 월드컵 경기장 건설 프로젝트 입찰도 좀 노려보고 싶고요.”

“드디어 본심이 나오셨군. 내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유명한 국장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다리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 뒤로는 오롯이 박주혁의 능력에 따라 달라질 터. 박주혁은 만약을 대비해 봄바디오 이원희 지사장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박 대표. 정말 오랜만이군 그래?”

“지사장님. 잘 지내시죠? 지사장님께서도 입찰하시느라 정신없으시다 들었습니다.”

“일일이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번역을 의뢰하면 다 들통나지! 하하하.”

안부를 주고받고 박주혁은 본론을 꺼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잠실 주 경기장을 2002년 월드컵 경기장은 FIFA 실무단에서 거부했다고 합니다.”

“아, 그 얘기 들은 것 같네.”

“그래서 성산동 쪽에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신축할 것이라는 루머가 있죠.”

“설마, 그 프로젝트에 파인건설이 참여해볼 생각인가?”

역시 척하면 척이다. 하지만, 이원희 지사장은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이미 삼송엔지니어링이 눈독을 들이고 있어.”

“벌써요? 아직 공고도 하지 않았을 텐데.”

“뭐, 뻔하지···.”

말끝을 흐리는 이원희 지사장의 다음 얘기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도해봐야 하지 않겠나?

“삼송엔지니어링과 단독으로 붙을 수 있는 곳은 미래건설, 태우건설 정도입니다. 파인건설 같은 중견 건설업체는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할 겁니다.”

“컨소시엄이라···.”

이원희 지사장이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본사에 연락해보겠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실제로 컨소시엄이 결성되면 그때 받기로 하지. 아직은 감사받기는 일러.”

“노력해주시는 것 자체로 감사한 거죠.”

“그건···. 라운딩 한번 하는 것으로 대신하세.”

#

박주혁이 서울 월드컵 경기장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표님. 윤 부사장님이십니다.”

“들어오세요.”

윤철영 부사장은 박주혁에게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

“대표님. 층간소음을 줄이는 공법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아! 공법 변경으로도 층간소음을 잡을 수 있습니까?”

박주혁은 되물으며 보고서를 훑었고 윤철영 부사장이 짤막하게 설명을 곁들였다.

“현재 아파트는 벽식구조로 각 세대가 벽과 바닥 그리고 천정까지 모두 이웃집과 공유하는 방식입니다.”

“보통 아파트는 그렇게 지어지죠.”

“맞습니다. 비용과 시간을 모두 절약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해야 건설사들이 높은 이익을 가져갑니다.”

“...”

윤철영 부사장의 말에 박주혁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고개를 들었다. 윤철영 부사장에게 자신의 뜻을 충분히 전달했다고 여겼건만, 다시금 건설사 이익 얘기를 꺼낸 다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윤 부사장님.”

박주혁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호명하자, 윤철영 부사장이 화들짝 놀라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벽식구조가 건설사의 이익을 위한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박주혁이 좁혀졌던 미간을 펴며 답했다.

“계속해보세요.”

“층간소음이라는 것이 사실 소리보다는 진동이 문제입니다. 소리는 벽체를 두껍게 하고 차음, 흡음재를 추가하면 많이 줄일 수 있지만, 진동은 다른 얘기입니다.”

“진동이라···.”

“그렇습니다. 벽식구조의 한계는 바로 소음은 잡아도 진동을 잡지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벽으로 이웃집들과 이어져 있고, 진동은 벽체를 따라 퍼집니다. 그래서 층간소음의 진원지를 찾기도 쉽지 않죠.”

벽식구조에서는 벽체와 슬라브(바닥 천장 등 수평으로 이루어진 판상형 콘크리트 구조물)가 이웃집과 경계이자, 진동을 증폭시키는 북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원인은 있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집 안에서 걷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윤철영 부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박주혁이 그를 올려보며 물었다.

“그래서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벽식구조가 아닌 무량판 구조라면 층간소음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습니다.”

“무량판 구조?”

박주혁은 보고서를 빠르게 넘겨 무량판 구조를 확인했다.

기둥과 내력벽만 이웃과 공유하여 벽식구조 대비 이웃과의 접점이 적어 층간소음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대부분의 고층 빌딩이 무량판 구조로 지어진다. 가만 생각해보니 사무실에서 층간소음을 겪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또각거리는 구두를 신고 수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음에도 일하면서 층간소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심지어 아파트형 공장에서는 위층에서 기계를 돌려도 층간소음 민원은 없다.

반면, 아파트에서 누군가 구두를 신고 집안을 돌아다닌다면, 당장 쫓아와 무슨 일이 벌어지겠지···.

단, 무량판 구조는 필연적으로 각 층의 층고가 높아지기 때문에 벽식구조 대비 세대수가 줄어들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똑같은 10층 높이의 건물이라면, 벽식구조는 10가구를 지을 수 있는 반면, 무량판 구조는 8가구를 지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음.”

“무량판 구조에서는 굉장히 멀리서 울리는 듯한 느낌만 받기 때문에 층간소음에 확실한 효과가 있을 겁니다. 단,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비용이 증가하며 용적률 대비 세대수가 적어지기 때문에 수익성은 약해집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이익을 목표로 하는 것은 맞지만, 우리의 첫 작품이니만큼 수익성은 배제하고 진행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윤철영 부사장이 수익성을 언급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익이 없다면 회사의 존폐가 위험하니 애사심이 강한 그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박주혁에게 첫 아파트는 투자의 개념이었다.

윤철영 부사장이 보고를 마치고 나간 후 박주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층간소음이 없는 아파트로 입소문이 나는 순간, 파인건설의 가치는 달라진다. 첫 단추만 잘 끼우면 되는 거야. 그럼 다소 비싸도 파인건설을 선호하겠지.”

파인건설에 대한 이미지 구축이 박주혁의 목표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고분양가를 내건다면, 누가 찾겠는가? 그만한 가치를 부여하고 브랜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지갑을 연는 것 아니겠는가?

명품이 되려면 명품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는 법이지.

#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올라오자, 박주혁의 전화가 울렸다.

“네, 박주혁입니다.”

“박 대표. 날쌔.”

“유 국장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었지. 좋은 소식이 있고 나쁜 소식이 있네. 뭐부터 듣겠나?”

당연히 좋은 소식이지. 아니, 나쁜 소식이 먼저인가?

어쨌든 박주혁의 선택은 좋은 소식이었다.

“월드컵 조직 위원위에 파인랭스를 소개했네. 이미 파인랭스를 알고 있던데?”

“파인랭스를 알고 있었다고요? 번역은 의뢰하지 않던데요.”

“예산이 한정적인 모양이야. 저렴한 업체에 의뢰하고 내부적으로 수정해서 쓴다던데···. 왜 일을 그렇게 하나 몰라? 그냥 파인랭스에 맡기면 간단한 검토로 바로 사용할 수 있을 텐데···.”

“직접 꼼꼼하게 봐야 하는 스타일이면, 그걸 선호할 수도 있죠. 근데 이게 좋은 소식인가요?”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유명한 국장이 껄껄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라고 좀 했지.”

“아아.”

“곧 의뢰가 갈 거야. 품질 확실하게 처리해서 월드컵 조직위에서 나오는 문서 싹 쓸어버리시게나. 아 참, 조직위에서 동영상 스크립트 번역? 뭐 이런 얘기를 하던데 그런 것도 가능한가?”

“동영상에 쓰이는 자막 번역인가 보군요. 당연히 가능합니다.”

좋은 소식이 조직위가 번역을 의뢰한다는 것이면, 나쁜 소식은 듣지 않아도 알것 같았다.

“그럼, 나쁜 소식은 이미 삼송엔지니어링이 월드컵 경기장 건설 프로젝트에 침을 발라놨다는 것이겠군요.”

박주혁의 말에 유명한 국장이 탄식하듯 소리쳤다.

“허. 그걸 어찌 알았나?”

“이원희 지사장님께 얼핏 들었습니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해진 거랍니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긴 한데···. 로비가 엄청난 것 같아.”

하긴, 건설프로젝트 당 많게는 조 단위도 투입되는 경우가 있으니 로비가 심할 수밖에. 이건 비단 월드컵 경기장 건설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했다. 박주혁은 아랫입술을 한번 씹고는 말했다.

“서울시장을 만나야겠군요.”

“그게 다이렉트이긴 한데···.”

유명한 국장이 말끝을 흐리자, 박주혁이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다리···. 놔주셔야죠.”

“이제 막 당선됐고 또 워낙 거물이라···.”

두 달전 서울시장에 당선된 고건우 서울시장은 대통령 빼고 다 해봤다는 JP, HC와 함께 거론되는 정치 거물이었다.

유명한 국장이 다리를 놓기에는 조금 높은 곳에 있는 분이었기에 다리가 아니라 사다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인지 유명한 국장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래도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삼송엔지니어링의 로비에 틈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그 틈을 한번 노려보도록 해. 서울시장까지는 내 다리가 미치질 못해서 좀 미안하군.”

“아닙니다. 충분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만간 이원희 지사장님과 라운딩 한번 가시죠.”

“좋지!”

박주혁은 전화를 끊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고건우 시장과의 연결고리는 없었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낮게 읊조렸다.

“정면 돌파밖에는 없나?”

삼송엔지니어링과 파인건설은 출발선부터 달랐지만, 박주혁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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