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14화 (114/136)
  • 114화 루지 OUT

    “이게 지금 무슨 말입니까?”

    정순교 신세기 백화점 대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김 부장을 노려봤고 김 부장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벌벌 떨었다. 딱 맹수를 맞닥뜨린 토끼 꼴이었다.

    박주혁은 그들의 반응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나 모르고 계셨군요. 신세기 백화점에 Fp-100을 입점시킬 때 때 만나 뵌 정 대표님이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실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박주혁의 말에 정순교 대표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의 턱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어깨가 들썩이며 숨을 고르던 그가 참지 못하고 김 부장에게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쳤다.

    “그깟, 돈 몇 푼에 신의를 저버리다니! 김 부장. 루지에서 얼마 준답니까?”

    “죄, 죄송합니다.”

    “내가 그렇게 분당에 진출해야 한다고 늘 말해왔거늘!”

    정순교 대표가 버럭버럭하며 소리치는 것으로 보니 블루힐을 마음에 두고 있긴 했나 보다. 분명 입찰 경쟁 속에 블루힐 백화점의 몸값이 올라가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도착한 미래 백화점에서도 신세기와 비슷한 고함이 터져나왔다.

    “당장 짐 싸, 당신은 해고야!”

    “대, 대표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루지가 인당 1억씩 뿌렸다는 미래 백화점 M&A 담당자의 자백에 박주혁은 씁쓸함을 삼켰다. 인수 경쟁사인 신세기와 미래의 입을 막기 위해 뿌린 약 20억은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인수자가 루지밖에 없다면 정말로 1,234억에 팔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나?

    하지만, 박주혁이 루지의 구린내를 감지해 냈고, 인수전에 신세기와 미래가 뛰어들게 됐다.

    미래 백화점에서 나온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절대 루지에는 안 판다. 이 더러운 새끼들.’

    #

    “분당 블루힐 백화점 입찰을 마감하겠습니다.”

    블루힐 백화점 입찰은 경쟁 입찰방식으로 진행됐고, 오늘이 그 결과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사회자의 말에 조용해졌다.

    “먼저 루지 백화점의 입찰 제안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루지 백화점의 로비가 있었던 만큼 입찰은 공개로 진행되었고, 입찰 제안서 평가도 현장에서 바로 진행하기로 했다.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박주혁의 조치였다.

    사회자가 루지 백화점의 입찰 제안서를 박주혁을 비롯한 임원들에게 전달했고, 그들은 루지의 입찰 제안서를 확인하며 채점표에 점수를 매겼다.

    “신세기 백화점 입찰 제안서를 확인하겠습니다.”

    “미래 백화점 입찰 제안서를 확인하겠습니다.”

    “타이거펀드의 입찰 제안서를 확인하겠습니다.”

    타이커 펀드라는 말에 장내가 다시 한번 소란스러워졌다. 단기투자를 노리는 대표적인 헤지펀드로 이들이 현물에 투자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박주혁도 의외였는지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하지만, 입찰액만 높을 뿐 제안서의 내용은 별 볼 일 없었다. 인수 후 파인과 시너지도 없어 보였고 말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입찰액]

    1. 타이거 펀드: 6,200억

    2. 루지 백화점: 5,230억

    3. 신세기 백화점: 5,170억

    4. 미래 백화점: 5,090억

    입찰액에 발표되자, 당당한 표정이던 루지 백화점 관계자들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졌다.

    “젠장. 타이거 펀드는 대체 왜?”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타이거 펀드 관계자들을 힐끔 노려본 그들은 다음 항목 발표를 기다렸다.

    [(주)파인과의 사업 연계성]

    1. 신세기 백화점: 82점

    2. 미래 백화점: 80점

    3. 루지 백화점: 40점

    4. 타이거 펀드: 0점

    “이게 뭐야!”

    루지 백화점 관계자가 버럭 소리치자, 사회자가 큰소리로 나무랐다.

    “조용히 하십시오! 경고입니다. 한 번 더 소리치시면 퇴장입니다.”

    사회자의 호통에 루지 백화점 관계자들이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고, 계속해서 항목별 순위가 발표됐다. 그리고 그 결과는···.

    [최종 순위]

    1. 신세기 백화점

    2. 미래 백화점

    3. 루지 백화점

    4. 타이거 펀드.

    최종 순위가 발표되자마자, 타이거 펀드 관계자들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마치 원래 관심이 없었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루지 백화점 관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결과를 승복할 수 없소! 타이거 펀드는 전혀 사업 연계성이 없어 탈락이겠지만, 루지의 사업 연계성이 왜 40점입니까? 그리고 루지의 입찰액이 가장 높았습니다. 정식으로 이의 제기합니다!”

    루지 백화점 관계자들의 말에 박주혁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마이크를 들었다.

    “비리가 없도록 공개 입찰 방식으로 모든 것을 오픈했습니다. 루지 백화점 측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루지가 40점인지 해명하십시오!”

    박주혁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사회자에게 속삭였고,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사업 연계성과 관련된 세부 항목을 공개했다.

    IT 연계성 : 20점.

    건설업 연계성: 20점.

    유통: 100점.

    사업 신뢰성: 50점.

    ...

    ..

    .

    총합 40점.

    점수가 공개되고 박주혁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채점자로 참가하신 분들이 모두 파인 측의 인사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경제학, 경영학 교수들로 이뤄진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무시할 생각이십니까?”

    표면적으로는 그렇단 얘기였고, 사실 서주경 교수에게 부탁해 박주혁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교수들이었다.

    ‘서 교수에게 흑산도 홍어를 선물해야지.’

    박주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루지 백화점 관계자를 노려보자, 그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이이익!”

    루지 백화점 관계자들은 낙찰 실패에 분노를 표출하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사회자는 바로 신세기 백화점의 낙찰을 통보했다.

    박주혁은 단상에서 내려와 입찰을 직접 참관하러 온 정순교 대표와 악수했다.

    “입찰에 성공하셨군요.”

    “열심히 제안서를 작성한 직원들 덕이죠. 블루힐 백화점을 인수하게 되어 기쁘군요. 하하.”

    “신세기가 IT 연계성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제가 IT에 관심이 많습니다. 고객 편의를 위해서는 필수라고 생각하고 있죠.”

    정순교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한번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때 미래 백화점 관계자가 다가와 박주혁과 정순교 대표에게 인사를 해왔다.

    “정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박 대표님도 블루힐 백화점을 제값에 판매하셨으니 축하드려야겠죠?”

    박주혁과 정순교가 동시에 미소 지었고, 미래 백화점 관계자는 무척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보던 박주혁이 그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미래 백화점이 입찰액에서 진 것 외에는 모두 신세기와 비슷했습니다. 결과가 아쉽군요.”

    “제 배포가 작아서지요. 더 썼어야 했는데···.”

    그는 무척이나 아쉬워하면서도 정순교 대표를 향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블루힐 백화점 인수에서는 졌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도발적인 말이었지만, 정순교 대표는 웃으며 그와 악수하며 말했다.

    “기대하죠. 정정당당하게 겨뤄봅시다.”

    블루힐 백화점은 5,170억에 신세기 백화점의 품으로 갔다. 루지 백화점의 비리를 알지 못했다면 1,234억이었겠지만···.

    블루힐 백화점 매각에서 가장 중요한 점수를 차지했던 사업 연계성 덕분에 파인과 신세기는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 협력하기로 하고 인수를 위한 절차를 밟아갔다.

    박주혁은 정순교 대표를 마중하며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정 대표님. 앞으로 협업을 기대해보겠습니다.”

    “저야말로 한국의 잡스라 불리는 박 대표님과 협업이 기대됩니다.”

    정순교 대표의 말에 박주혁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한국의 잡스?’

    “과찬이시군요.”

    “글쎄요. 박 대표님의 발자취를 보면 과한 표현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혁신적인데, 추진력까지 있으니 어쩌면 잡스를 이미 뛰어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순교 대표의 말에 박주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오늘도 해리스는 메르헨을 호출했다.

    “어서 와라. 메르헨.”

    오늘은 평소와 달리 해리스의 목소리가 다정다감했다. 메르헨은 해리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인제 그만하시죠. 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넌 그런 아이였지. 네가 사랑하고 있다는 그 녀석이 부러울 지경이다.”

    “···!”

    해리스의 말에 메르헨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해리스는 턱을 매만지더니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많이 고민해봤다.”

    “···.”

    “네 말대로 벤타에 갇혀 더 큰 것을 못 본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해리스는 쓸쓸한 표정으로 메르헨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친구를 한번 만나보고 싶구나. 박주효기였던가?”

    해리스의 말에 메르헨의 눈이 더욱 커졌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사랑에 빠졌다는 그 친구를 직접 만나보고 싶단 말이다. 아버지로서 딸의 배필을 만나보는 것이 이상한 게냐?”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벤타는···?”

    “마임러가와 이제는 결별을 생각할 때인 것 같다. 걱정 말거라. 그 일은 내 손으로 처리할 테니.”

    찻잔을 입에 가져가는 해리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차를 한 모금한 후 천천히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인생이란 것이 무척이나 짧아. 세상이라는 곳에 소풍을 나왔으면 행복하게 살다 가야 하거늘···. 왜 운명의 수레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마임러가에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거다.”

    “아버지!”

    메르헨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해리스의 품에 와락 안겼다. 해리스는 메르헨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메르헨. 행복을 찾아가겠다는 너를 이해한다. 그리고 부럽구나. 너의 그 용기가···.”

    “···?”

    메르헨은 의아한 눈빛으로 해리스를 바라봤지만, 그는 그저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박주혁은 파인건설 대회의실에 회의를 진행했다.

    “블루힐 백화점의 매각으로 파인건설은 드디어 무거웠던 짐을 덜어냈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임원들이 모두 웃으며 박수 쳤다. 그는 박수가 잦아들길 잠시 기다렸다.

    “이제 파인건설은 위대한 첫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겠죠.”

    박주혁이 말을 마치고 윤철영 부사장을 바라보자, 그가 스크린에 파인건설이 가지고 있는 토지 목록을 띄웠다.

    “지방 토지는 모두 처분하고, 수도권의 다음과 세 곳이 남아있습니다.”

    [목동, 하계, 광명]

    개발할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었지만, 파인건설은 부채를 모두 청산했다. 가볍게 목표를 향해 움직이면 되는 일이다.

    “광명 부지가 가장 크지만, 파인건설의 첫 시작은 서울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의견에 임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파인건설이라는 깃발을 휘날리려면 서울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터.

    박주혁도 동의하며 윤철영 부사장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후보군은 나왔군요. 광명은 추후 개발하기로 하고, 목동과 하계입니다. 목동의 부지가 가장 적으니 첫 시작으로는 목동이 어떻겠습니까?”

    박주혁의 말에 윤철영 부사장이 재빨리 답했다.

    “역시 보는 눈이 탁월하십니다. 목동 부근은 80년도 중반부터 복도식 아파트를 지어 노후화가 진행 중입니다. 신축에 대한 수요도 높을 것이며, 특히 대표님께서 추구하시는 층간소음이 없는 아파트라면, 조심스럽지만 완판도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저 부지가 가장 작은 땅이니, 실험적인 것을 해보기에 나쁘지 않다고 여겨서 말한 것이었는데 윤철영 부사장은 박주혁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느꼈다. 고경수 이사가 가장 먼저 동의를 표했고, 뒤이어 임원들이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목동에 제대로 된 아파트를 지어봅시다.”

    “알겠습니다!”

    직원들의 우렁찬 대답에 박주혁은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층간소음에서 고객들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연구하십시오.”

    “예!”

    “또 한 가지. 고객들의 집에서 결로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평생을 노력해 집 한 채를 소유하는 것이 서민들의 희망이 된 세상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짓는 집은 완벽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린 그들의 꿈을 짓는 것이며, 우리가 살고 싶은 집을 지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우리는 가치를 지어야 합니다.”

    박주혁의 비장한 말에 회의장이 숙연해졌다.

    “가치를 지어서 파인건설의 위용을 떨쳐봅시다. 할 수 있습니다. 전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애사심으로 똘똘 뭉쳐 단체 사직서를 거침없이 내밀었던 그들이다. 박주혁이 구심점이 되어 이끈다면 어떤 시너지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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