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13화 (113/136)
  • 113화 혼쭐을 내줘야겠습니다.

    파인테크 대 회의실.

    박주혁은 Fp-250의 성공적인 런칭을 치하한 후 임원들에게 물었다.

    “Fp-250으로 시장 방어는 성공했습니다만, 우리의 다음 스텝은 뭡니까?”

    박주혁의 매서운 질문에 밝게 상기되어 있던 임원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직원들을 둘러보며 입술을 뗐다.

    “파인테크는 mp3 제조회사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초반에 얘기했던 스마트폰 개발을 위해 전사가 움직여야 하지만, 실상은 Mp3에 몰두하고 있죠. 당연한 일입니다. 파인테크는 mp3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비전이 없으면 도태된다.’

    박주혁은 스스로를 다그치며 직원들에게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당장은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린 계속 연구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세계 1위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에 안주하는 순간, 우린 삼송, 극성, 마이애플 등 쟁쟁한 경쟁사들에 추월당할 것입니다.”

    박주혁의 말에 임원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선, 차기작인 Fp-300에 풀터치 스크린을 적용하고 휴대폰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검토해봅시다. 아직은 작은 터치스크린이지만, 물리 버튼을 최소화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잡겠습니다. 한발 한발 내딛다 보면 우린 어느 순간 목표에 도달해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임원들의 패기넘치는 대답에 박주혁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삼송과의 싸움에서 완승한 박주혁의 전략에 직원들은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

    파인건설의 분당 블루힐 백화점은 업계 1위인 루지 백화점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외환위기로 매출이 줄었지만, 그래도 블루힐 백화점의 연 매출은 2,000억 원 이었다. 고급스러운 내장과 준수한 연매출을 기반으로 고경수 이사는 루지 백화점과 기나긴 줄다리기 중이었다.

    루지 백화점이 제시한 금액은 1,234억 원이었다. 고경수 이사는 루지 측의 제안서를 바라보며 미간을 와락 구겼다.

    “외환위기에도 2,000억 원의 연 매출을 올리고 있고, 블루힐 백화점의 입지 등을 고려했을 때 루지 측이 제안한 가격은 터무니없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2만 평이 넘는 대지와 8,000평에 달하는 건물만 놓고 따져도 최소 3,000억 원은 투자했던 블루힐 백화점을 반값도 안 되는 헐값에 사겠다는 데 반발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루지 측 사람들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시면 없던 일로 하시죠. 루지에서도 이 이상의 금액을 투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아시겠지만, 외환위기로 자금 융통이 어려워서 말이죠.”

    루지 측의 말에 고경수 이사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금 융통이 어려운 것도 맞는 얘기지만, 자금이 경색된 이런 상황을 노려 헐값에 기업사냥을 하는 루지 측의 검은 속내를 모르지 않았다.

    “1,234억 원에는 매각할 수 없습니다. 최소 3,000억은 되어야 합니다.”

    고경수 이사가 다시 한번 정색하며 말하자, 루지 측은 가방을 싸매고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결렬이군요.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연락해주십시오.”

    루지 측은 전혀 아쉽지 않다는 표정으로 협상 테이블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개새끼들.”

    고경수 이사가 이를 악물며 말하자, 곁에 있던 직원들도 주먹을 불끈 쥐며 부르르 떨었다. 뻔히 속내가 보이는 전략이었지만,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시기가 그러했다.

    매물은 쏟아져 나오고, 자금은 경색되어 있으니 매수자들이 갑인 세상이다. 고경수 이사가 고개를 떨구며 박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고경수입니다.”

    “네, 고 이사. 협상은 잘되셨나요?”

    “루지 측에서 40% 가격에 사겠다고 해서 거절했습니다.”

    “40%요···?”

    박주혁이 다소 당황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계산기를 재빨리 두드렸다.

    연 매출 2,000억 원인 블루힐 백화점이다. 순이익률이 10% 이상으로 매년 최소 200억 이상의 순이익이 발생하는 알짜였다. 그걸 1,200억에 사겠다니?

    기존의 청우건설이었다면 자금이 급해 울며 겨자 먹기로 루지에 넘겼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현금흐름이 좋은 DD 자동차와 파인랭스 그리고 파인테크가 뒤에서 버티고 있다. 파인건설의 부채를 털어내 몸짓을 가볍게 가져가려고 하는 것은 맞지만, 자산을 헐값에 팔 생각은 없었다.

    ‘깎는 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양아치도 아니고.’

    루지 백화점과는 연결고리가 없던 박주혁이라 잘 몰랐겠지만, 사실 루지 백화점은 외환위기를 기회 삼아 공격적으로 목 좋은 백화점들을 인수하여 덩치를 키웠다. 2000년대 초반 루지 백화점은 총 13개의 지점이 있었는데 그중 절반에 가까운 6개 지점이 인수를 통해 확보했었다. 입지 장사인 백화점 사업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목 좋은 곳만 노려 인수한 루지의 전략은 주요했다.

    블루힐 백화점도 그들의 목표 중 하나였다. 마침 청우건설은 자금 사정이 좋지 않으니 작전을 펼친 것이었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박주혁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인상을 썼다.

    “기가 막히네? 아무리 부동산 경기가 바닥이라지만, 순이익이 매년 200억이상 나는 것을 1,200억에 사? 심지어 2만 평의 대지가 포함인데? 날강도 새끼들···.”

    아무리 생각해도 루지 측이 괘씸했는지 박주혁은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험악해졌다.

    “신세기, 미래 백화점에서는 정말 관심이 없을까?”

    박주혁은 루지의 경쟁 업체들을 떠올리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

    고경수 이사는 회사에 복귀하자마자 박주혁을 찾았다.

    “대표님.”

    “그래요. 고생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루지 측에 차마 헐값에 팔겠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박주혁은 고경수 이사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기에 고개을 끄덕이며 말했다.

    “신세기나 미래 백화점에서는 입질이 없습니까?”

    “아직은···.”

    “음. 분명 분당의 노른자위에 블루힐 백화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입지는 핵심 상권에 있죠.”

    “흠. 백화점은 입지 싸움일텐데···.”

    박주혁이 검지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미간을 좁혔다.

    백화점은 분명 파인건설의 사업영역이 아니었기에 처분해야 했다. 순수 파인의 자본으로 인수한 만큼 자본금이 부족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최소 2,500억은 받아 부채를 확실히 줄일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분당 수내동 근린상가 부지 한가운데 위치한 블루힐 백화점의 입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YS의 동아줄을 잡고 부지를 선정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신세기, 미래 백화점에서 입질이 없다? 이건 뭔가 이상한 일이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예? 어떤 것이···?”

    고경수 이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보자, 그는 낮게 신음하며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신세기와 미래 백화점이 분당의 요지에 있는 블루힐 백화점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입지 하나만큼은 확실한 곳인데···.”

    고경수 이사도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화점 서열을 다투는 경쟁사들이 군침 한번 흘리지 않는다는 것은···.

    박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고경수 이사에게 물었다.

    “고 이사. 신세기와 미래 백화점 연락처 아시죠?”

    “예. 있습니다.”

    “연락 넣어두세요. 직접 브리핑을 해야겠습니다.”

    “대표님께서 직접이요?”

    경수 이사의 말에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와중에 고경수 이사는 황급히 전화를 돌려 신세기 백화점과 미래 백화점 본사 재무팀에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아. 김 부장. 나 파인건설의 고경수 이사입니다.”

    “안녕하세요 고 이사님.”

    “오늘 분당 블루힐 백화점 관련하여 파인건설의 대표님께서 신세기 백화점에 직접 브리핑하고 싶으시다는데 시간 좀 내주시죠.”

    “예?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저흰 블루힐 백화점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박주혁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입지 싸움인 백화점 업계가 요지에 있는 블루힐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이거 구린내가 솔솔 나는데?’

    고경수 이사는 김 부장에게 쩔쩔매며 약속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대표님께서 직접 브리핑하시겠다는데 제 체면을 봐서라도 미팅 좀 잡아주세요.”

    “아, 갑자기 이게 무슨···.”

    김 부장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난색을 표하자, 박주혁이 전화를 뺏어 목소리를 높였다.

    “파인건설 박주혁 대표입니다. 신세기 백화점 대표님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예? 지금··· 장난하십니까?”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박주혁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루지 백화점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말이다.

    “제가 장난하시는 걸로 보입니까? 대표님을 만나기 어렵다면 윤리위원회 전화번호 좀 알려주십시오.”

    “···!”

    짜증을 내던 상대방이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박주혁은 그를 다그쳤다.

    “재무팀에서 윤리위원회 전화번호를 모릅니까?”

    “아, 압니다. 그런데 갑자기 윤리위원회는 왜···?”

    “그걸 제가 왜 김 부장에게 말씀드려야 하죠?”

    “하아···.”

    김 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김 부장의 반응을 살피던 박주혁이 옅은 미소를 짓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김 부장님. 왜 고민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설마 정순교 대표님 전화번호를 몰라서 이렇게 전화통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아,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그가 말끝을 흐리자, 박주혁이 정색했다.

    “그럼 제가 직접 연락하도록 하죠. 뒷감당은 알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대, 대표님! 아, 알겠습니다. 제가 상무님과 대표님께 보고하여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박주혁은 휴대폰을 고경수 이사에게 넘기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루지에서 블루힐을 헐값에 먹으려고 장난을 쳤군요.”

    “예?”

    “신세기, 미래 백화점 인수담당자들에게 돈을 좀 뿌렸나 봅니다. 아마 각 백화점에서는 블루힐 백화점이 매물로 나왔다는 것도 모를 겁니다.”

    “서, 설마요!”

    고경수 이사가 눈을 크게 뜨며 부정했지만, 구린내가 진동한다는 것을 그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윤리위원회 얘기만 나와도 절절매는 것을 보면 답은 나왔습니다. 가시죠.”

    “네! 대표님.”

    이미 박주혁의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고경수 이사가 감탄하는 시선으로 박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고개를 돌리며 한마디 했다.

    “루지는 왜색이 짙다 보니 일본과 비슷하게 참··· 간사하군요. 혼쭐을 내줘야겠습니다.”

    #

    베를린.

    해리스 엘리넥의 집무실에 부녀가 마주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라.”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 힘들게 익힌 경영수업이 아깝지 않단 말이냐? 오빠와 동생을 냉정하게 찍어누른 것은 너였다. 대체 너에게 벤타는 무엇이냐!”

    “벤타가 인생의 전부였지만, 최근에서야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허! ”

    해리스 엘리넥이 당당하게 답하는 메르헨을 보며 혀를 찼다. 몇 주째 이렇게 실랑이를 버리고 있건만, 메르헨의 생각은 확고했다. 윽박질러서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아는지 해리스가 심호흡을 하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메르헨···. 뜨겁게 타오르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정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 또한 사랑이야. 뜨거운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재만 남는다.”

    “그래서 아버진 행복하신가요?”

    메르헨의 말에 해리스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지만,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불행해 보이더냐?”

    “예.”

    “···?”

    메르헨이 정색하며 답하자, 해리스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되물었다.

    “내가 불행해 보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벤타라는 감옥에 갇혀 계시니까요.”

    “···허.”

    탄식하듯 말하며, 해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감옥이라···.’

    감옥이라는 메르헨의 말이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그때 메르헨의 휴대폰이 울렸고, 해리스는 메르헨에게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메르헨이 나가고, 해리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감옥이라···. 훗. 하하하!”

    한바탕 웃은 해리스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두툼한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마임러가와 엮인 운명 자체가 감옥이긴 하지···. 후우.”

    해리스는 연기를 내뿜으며 탄식하듯 말했다.

    “엠마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잊었다고 생각한 그의 사랑이 떠올랐고, 해리스의 눈에 깊은 슬픔이 자리했다. 해리스는 다시 입안에 가득한 연기를 한숨과 함께 뿜어냈다.

    - 후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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