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10화 (110/136)
  • 110화 가치를 짓는 건설사.

    동인건설에 2천억 상당의 아파트를 통째로 넘기겠다는 박주혁의 말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향후 가치까지 생각하면 상당한 금액이겠지만, 대출까지 껴있는 미분양 아파트들은 현재로서는 깡통이었다. 동인건설이 박주혁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동인건설이라는 암초도 제거하고 동시에 부채도 줄이는 일거양득(一擧兩得) 아니겠나?

    박주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한설계 사장과 윤철영 상무는 아직도 2천억이라는 분양 당시의 가치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주혁의 소매를 잡아끌며 속삭였다.

    “대표님. 시가 2천억 상당입니다. 그걸 그렇게···.”

    그들의 만류에 박주혁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렇게 나와야지. 의도하지 않았지만, 연출까지 완벽하군.’

    박주혁은 고개를 돌려 살짝 웃으며 속삭였다.

    “현재가치가 천억에 대출이 천억이라면서요. 동인건설은 폭탄을 받아 가는 겁니다. 절 믿으세요.”

    박주혁이 청우건설의 2천억 상당의 미분양 아파트를 미끼로 던졌다. 그러자, 박주혁의 동행인 관계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말린다. 동인건설로서는 미끼를 덥석 물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그 말에 박주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출 승계가 조건이다. 이 새끼들아.’

    동인건설이 승낙하자, 채권단에서도 군소리 없이 파인의 청우건설 인수를 승낙했다. 1천억 원을 현물로 처리한 만큼 자신들의 채권 회수 비율이 올라간다는 소리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청우건설도 악성 채권을 털어내는 것이었고···. 그야말로 Win Win 아니겠나? 똥을 밟은 것은 동인건설이었지만, 그들은 1천억이 아닌 2천억을 받아냈다고 싱글벙글했다.

    470억 원이 2천억 원이 됐다고 좋아하는 것이겠지만, 짧은 생각이다. 미분양 아파트당 발생하는 취·등록세와 대출이자까지 계산한다면···.

    박주혁은 인수합의서에 도장을 찍으며 채권단과 일일이 악수했다.

    “옳으신 결정입니다. 미력하나마 한국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입바른 소리였지만, 채권단에게 대의가 있음을 계속 주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인건설의 사장과 악수를 했다.

    “동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해야죠. 2천억 상당의 현물을 받게 된걸요. 하하하.”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동인건설 사장에게 박주혁이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청우건설은 아파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생각이거든요.”

    “오! 그거 좋은 일이군요.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둘은 동시에 맞잡은 손에 힘을 줬지만, 눈빛은 서로 달랐다.

    ‘건설의 ’건‘자도 모르는 놈이니까 덮어씌우기 딱 좋겠어. 크크.’

    ‘당신과는 거래하지 않겠어.’

    #

    이후 절차는 순조로웠다.

    인수합병만이 청우건설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비록 IT 기업이지만, 파인의 박주혁이 새로운 CEO가 된다는 것에 거부반응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직원들은 박주혁의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청우건설 본사 사장실에 도착한 박주혁은 늘 그랬듯 임원들을 소집했다. 임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기업이 인수된 후 가장 먼저 구조조정 대상이 되는 것이 높은 임금을 받는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박주혁의 인사에 임원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그리고 윤철영 상무가 한 서류뭉치를 박주혁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임원들의 사직서 입니다.”

    “예?”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류를 받아넘기니 각 부서의 임원들이 청우건설의 정상화를 위해 사직한다는 사직서가 들어있었다. 박주혁이 미간을 좁히며 사직서 뭉치를 들고온 윤철영 상무를 빤히 쳐다봤다.

    “회사 정상화를 위해서는 저희 임원들이 자발적으로 결정한 일입니다. 부디 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윤철영 상무의 말에 임원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상체를 숙이며 외쳤다.

    “수리해주십시오.”

    “크음.”

    그들의 반응에 박주혁이 낮게 신음할 때 윤철영 상무가 말을 이었다.

    “대신, 직원들의 고용은 보장해주십시오.”

    “보장해주십시오!”

    사직서를 어떤 각오로 썼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청우건설을 아끼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사직서를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DD 자동차의 임원들과는 너무 다른데?’

    한 몫 챙기는 데 혈안이었던 DD 자동차의 전 임원들과는 정반대인 청우건설의 임원들을 보며 박주혁은 희망을 보았다.

    ‘무리한 사업 확장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결단은 빠르게 내려야 한다. 박주혁은 좁혀졌던 미간을 펴며, 테이블에 사직서 뭉치를 힘껏 내리쳤다. 그리고 손으로 사직서 뭉치를 다시 한번 힘주어 내려쳤다.

    - 턱!

    묵직한 소리가 장내를 울렸고, 박주혁은 임원들을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지금 뭣들 하시는 겁니까?”

    “···?”

    윤철영 상무를 비롯한 임원들이 예상치 못한 박주혁의 반응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제가 이런 사직서를 받고자 여러분들을 소집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회사를 정상화 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고자 함이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곤란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윤철영 상무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대표님 청우건설을 정상화하려면 구조조정은 필수적입니다.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저희가 물러남으로써 회사는 운신의 폭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박주혁이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윤철영 상무를 쳐다보던 박주혁이 목소리를 바꿔 타이르듯 말했다.

    “이해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윤철영 상무와 임원들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로써 부하직원들의 자리는 보장받게 될 것이다.

    박주혁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청우건설의 유산이자, 건설의 베테랑들인 여러분을 내보낼 수 없습니다.”

    “···!”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고, 따뜻한 말 한마디가 마음을 움직인다고 했다. 박주혁은 지금 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열며 또박또박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줬다.

    “앞으로 6개월. 그 후에도 청우건설이 회생할 가망성이 없다고 하면 그때는 여러분의 사직서를 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회사를 얼마나 아끼고, 또 부하직원들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았습니다. 여러분 덕에 저는 청우건설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박주혁의 말을 가만히 경청하던 임원들이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임원들의 감정이 복받치는 것을 느낀 박주혁이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절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회사와 부하직원들을 지키는 일입니다. 다시는 무책임하게 단체로 사직하겠다는 말 듣고 싶지 않군요.”

    “···대표님!”

    윤철영 상무와 임원들이 모두 상체를 숙이며 큰소리로 외쳤고, 박주혁은 사직서를 옆으로 쓱 밀어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죠. 먼저, 청우건설의 사명을 파인건설로 바꾸고자 합니다. ‘파인’의 브랜드 가치가 높은 만큼, 사명을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아직 감동을 못다 추슬렀지만, 그들은 열정적으로 답했다.

    “청우건설이 부도가 났다는 이미지가 있으니, 파인건설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파인이 젊고, 혁신적인 이미지가 있는 만큼 청우건설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눈가를 훔치던 윤철영 상무도 사명 변경에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만장일치로 사명이 파인건설로 채택되었다.

    “회생을 위해 가장 먼저 부채비율을 줄여야 합니다. 미분양 아파트는 동인건설에서 전부 넘기기로 했으니, 다음 스텝으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미분양 아파트를 동인건설에 전부 넘기기로 했다는 말에 장내가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이미 사실을 알고 있던 윤철영 상무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는 임원도 있는 것이 다들 2천억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있는 것 같았다. 그때 재무팀 고경수 이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미분양 아파트는 이미 시장가치와 대출액이 같아 더는 자본가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분양 아파트를 금융권에 넘겨 털어내자고 건의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고경수 이사의 말에 주변이 있던 임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뭐라 항의했지만, 이미 결정난 사항이었다.

    “자! 모두 주목하세요. 이미 동인건설에 넘기기로 한 상황이기에 그 점에 대해서는 그만 얘기하세요. 고 이사님께서는 동인건설에 미분양 아파트를 넘기는 후속 절차를 진행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 당연한 얘기지만, 대출은 동인건설이 승계해야 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고경수 이사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아주 적절한 조치 시군요. 알겠습니다.”

    급한 일들에 대한 방향성을 정리한 후 박주혁은 윤철영 상무와 사장실로 향했다.

    “윤 상무님. 사직서를 그렇게 들고 오실 줄 몰랐습니다?”

    “전 대표님이 저희를 품으실지 몰랐습니다.”

    윤철영 상무의 말에 박주혁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서로의 진심을 알았으니,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군요.”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성심성의껏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저는 우선 임원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계신 윤 상무님을 부사장으로 임명할 생각입니다.”

    “예?! 대표님 그건 아닙니다. 저는 청우건설이 몰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 죄인에 가깝습니다. 잘못된 임명이십니다.”

    윤철영 상무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자, 박주혁은 흡족스럽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윤철영 상무의 어깨를 두드렸다.

    “윤 상무님의 이런 모습 때문에 저는 더욱 윤 상무님을 부사장으로 임명해야겠습니다.”

    “대, 대표님!”

    #

    윤철영 부사장은 박주혁과 마주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러니까, 층간소음이 없는 아파트를 짓고 싶으시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아파트가 도입된 이후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층간소음이라는 하자를 파인건설이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윤철영 부사장이 턱을 매만지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파인건설이 짓는 아파트의 명성은 확실히 올라가겠지만···.”

    “맞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그것입니다.”

    윤철영 부사장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층간소음을 완화시키는 공법은 분명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 공사비가 따라서 올라갑니다. 지금은 아파트 7층까지 짓는 비용만 들이면 나머지는 전부 이익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층간소음이 없는 공법을 적용한다면···.”

    윤철영 부사장이 미간을 좁히며 셈을 이어갈 때 박주혁이 그의 말을 잘랐다.

    “지금 당장 수익을 내겠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층간소음이 없는 아파트, IT 기술이 적용된 아파트 등 파인건설은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닐 겁니다. 지금 당장 이윤이 줄어든다 해도 소비자들이 파인건설의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한다면, 그게 곧 우리의 마진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

    윤철영 부사장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끔벅이자, 박주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이윤이 남지 않더라도, 우린 품질로 승부합시다. 그럼 결국 고분양가라 하여도 소비자들은 파인건설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린 그런, 가치를 짓는 건설사가 되어야 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윤철영 부사장이 눈을 크게 뜨며 감명받았다는 듯 박주혁의 말을 되뇌었다.

    “가, 가치를 짓는 건설사···입니까?”

    “그렇습니다.”

    박주혁의 답에 수첩을 들고 있던 윤철영 부사장이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빛냈다.

    “대표님. 가치를 짓는다는 말에 건설인으로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우리 한번 해봅시다. 같은 아파트지만, 공장처럼 찍어낸 것이 아닌, 누구라도 계속 살고 싶은 집을 짓는 일 말입니다.”

    박주혁의 말에 윤철영 부사장이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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