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09화 (109/136)
  • 109화 일자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청우건설.

    대구를 거점으로 하는 회사로 80~90년대에는 1군 건설사들인 미래건설, 삼송건설과도 어깨를 견줄 만큼 아파트를 다수 지었었다. 꾸준히 건설로 기반을 다졌으면 좋았겠지만, 청우건설의 회장은 욕심이 많았다.

    94년 정부가 4대 직할시에 지역방송국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청우건설은 대구 지역방송국의 운영권을 따내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차입한다. 그리고 대구지역 지역방송국의 민영 사업자로 선정되어 (주)대구방송을 95년 5월 개국하게 된다.

    하지만, 청우건설은 신규사업 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를 한 것이었다. 외환위기가 오기 전인 95년부터 청우건설이 곧 부도날 수도 있다는 찌라시가 증권가에 괜히 돈 것이 아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청우건설은 아파트를 마구잡이로 지어댔다. 지으면 팔린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그 판단은 틀렸다. 외환위기 직전 청우건설의 미분양 아파트는 약 1천 7백여 가구로 여기에 묶인 자금만 2천억 원에 달했고 부채는 총매출액과 맞먹는 1조를 넘어섰다.

    남아있던 미분양 아파트들도 금리가 치솟으며 분양받으려는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다. 심지어 분양받은 사람들도 높은 중도금 이자 때문에 분양을 포기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돈줄은 막혔고, DJ는 구조조정을 외쳤다.

    대구를 베이스로 한 기업이었기에 YS와 줄이 닿아 있었지만, 외환위기가 닥치고 정권이 바뀌면서 썩은 동아줄이 되었다.

    - 툭.

    썩은 동아줄은 맥없이 끊어졌고 청우건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결국 97년 12월, 대구방송을 설립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매각됐다. 청우건설도 인수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막대한 부채 때문에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박주혁은 청우건설과 관련된 기사를 꼼꼼히 읽어보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대구방송과 부동산들을 처분하면서 부채를 줄이긴 했지만, 악성 미분양 아파트들 때문에 발목이 잡혀있군.”

    재무제표를 바라보는 박주혁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청우건설은 회생 불가에 가까웠다.

    - 톡, 톡, 톡.

    한참을 책상을 두드리던 박주혁이 눈을 감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채권단을 만나서 결판을 내는 수밖에는 없겠어···.”

    #

    그날 저녁 박주혁은 이연호 사무관과 안태희 주사가 상주하는 골프연습장으로 향했다.

    - 딱! 딱!

    하얀 골프공들이 바람을 가르며 튀어 나갔다.

    박주혁은 이연호 사무관과 안태희 주사를 발견했다. 박주혁은 팔짱을 끼고 그들의 스윙을 찬찬히 뜯어 보더니 중얼거렸다.

    ‘이 사무관은 슬라이스. 안 주사는 훅이겠군.’

    박주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연호 사무관의 공은 오른쪽으로 휘어져 나갔고, 안태희 주사의 공은 오른쪽으로 날아가다 땅으로 고꾸라졌다.

    “아, 진짜. 안 되네.”

    “그러게요.”

    둘은 투덜거리며, 다시 어드레스를 잡을 때 박주혁을 발견했다.

    “어! 박 대표.”

    “미국에 갔다더니 벌써 돌아온 겁니까?”

    이연호 사무관과 안태희 주사가 웃으며 박주혁에게 다가왔다. 박주혁도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사무관님은 왼쪽 벽이 무너져서 슬라이스고 흔히 배가 들린다고 하죠? 안 주사님은 엎어치고 있어요. 허리를 먼저 돌려야 한다니까 어깨로 치시려고 합니다.”

    박주혁은 이연호 사무관과 안태희 주사를 만나자마자, 송곳 같은 말로 아픈 곳을 후벼팠다.

    “크. 그게 잠깐 봐도 보이나?”

    “내가 엎어 친단 말이죠?”

    “제가 한 말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쳐보세요.”

    박주혁의 말에 둘은 서둘러 타석으로 돌아갔다.

    - 딱!

    “이 사무관님 벽! 아직도 무너집니다. 배꼽 보여요!”

    - 딱!

    “안 주사님. 어깨부터 시작하면 안 된다고 했죠? 허리부터 트세요. 허리!”

    박주혁의 날카로운 지적에 어드레스부터 공을 들이고 있는 이연호 사무관과 안태희 주사였다.

    연습을 마치고, 박주혁은 그들과 함께 호프집으로 향했다. 시원한 맥주를 들고 그들은 건배했다.

    “박 대표가 말한 대로 왼쪽 벽을 꼿꼿하게 세우니까 슬라이스가 잡히네.”

    “나도. 허리부터 시작하니까 훅이 딱 잡혔습니다. 박 대표님 정말 예리하시네요.”

    그들이 엄지를 추켜세우며 칭찬하자,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전부터 했던 말입니다. 그새 잊으신 거겠죠. 골프라는 게 자기 편한 대로 치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폼이 무너지게 되죠. 스윙을 한번 하더라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대충 휘두르면 안 돼요.”

    박주혁의 말에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먹음직스러운 치킨 한 마리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이연호 사무관은 재빨리 닭다리를 박주혁의 앞접시에 올리며 말했다.

    “우리 박 프로님께 제가 닭 다리를 바치겠습니다.”

    그러자 안태희 주사가 정색하며 말했다.

    “전 로비는 하지 않습니다.”

    안태희 주사의 정색에 박주혁과 이연호 사무관이 박장대소했고, 자신의 유머가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안태희 주사도 씩 웃어 보였다. 한참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며 웃다가 박주혁이 안태희 주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안 주사님. 일전에 55개 퇴출 기업 조사할 때 청우건설도 있었죠?”

    “청우건설이요?”

    안태희 주사가 잠시 맥주로 입을 축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청우건설 있었죠. 정말 말도 안 되는 부실기업이었습니다.”

    박주혁과 안태희 주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연호 사무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박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박 대표. 설마 건설까지 손을 뻗을 생각입니까?”

    “어? 그런 겁니까?”

    안태희 주사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박주혁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파인 사옥을 짓고 있는 것은 알고 계시죠?”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다시 입에 가져갔다.

    “외환위기라 건설경기도 바닥이고 인부들도 숙련자지만 그 대접을 못 받는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지금 건설은 죽었죠.”

    박주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던 그들은 박주혁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일전에 외화를 내놓으라던 경제부총리는 무시했지만, 생업 일선에 계신 그분들은 차마 무시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볼까 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이연호 사무관과 안태희 주사가 맥주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얼음처럼 굳었다.

    “그, 그러니까. 생업 일선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 건설업에 발을 들이시겠다?”

    “차라리 외화로 채권을 사시는 게···.”

    철밥통을 차고 있는 그들이야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생사를 오갔다. 박주혁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했다.

    “실업자 수가 120만 명을 넘어서고 있어요. 이 사무관님과 안 주사님은 정부 부처에 계시니까 실감이 안 나시겠지만, 서민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크음.”

    “흠흠.”

    이연호 사무관과 안태희 주사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도 정부의 녹을 먹고 있기에 현실감이 좀 떨어질 뿐이다.

    “YS가 그렇게 좋아하던 OECD···. 한국은 OECD 가입국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살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이연호 사무관도 안태희 주사도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박주혁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년 초부터 시작된 금 모으기···. 서민들 털어서 어떻게 됐습니까? 나랏빚? 결국 대기업들 부채 갚는 데 쓰인 것 아닙니까? 그나마도 경쟁력 있는 대기업들만 혜택을 받았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한 푼 만져보지 못하고 부도가 났습니다. 그 덕에 실직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경기는 더 나빠지고···. 악순환입니다.”

    “···.”

    이연호 사무관은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맥주잔만 만지작거렸다. 안태희 주사는 아예 눈물을 훔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자신의 손으로 55개 기업 퇴출을 추렸던 그의 부담감이 상당했으리라.

    “여기 있는 그 누구에게도 죄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는 것일 뿐입니다.”

    박주혁의 말에 이연호 사무관과 안태희 주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빛내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되나?”

    “말씀해 보세요.”

    #

    이연호 사무관의 인맥과 통상산업부 안태희 주사의 도움으로 박주혁은 청우건설 채권단과 마주할 수 있었다. 박주혁은 건설 쪽에 문외한이었기에 한설계 사장과 그의 친우인 청우건설의 윤철영 상무와 함께 채권단을 만났다.

    안태희 주사가 힘을 써준 덕에 채권단에 부채탕감의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어필이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청우건설 채권단이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하청 업체였던 동인건설이 극렬히 반대했다.

    “무슨 소리입니까! 청우건설의 부채를 탕감해주자니?”

    “청우건설의 남아있는 부채 6천8백억 원을 전부 탕감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 70% 탕감이 전부 탕감한다는 소리죠!”

    동인건설은 청우건설의 하청 업체로 떼인 돈이 많은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청우건설의 매각이 힘들어요. 그건 모두 아는 사실 아닙니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청우건설에 떼인 돈만 해도 천억입니다. 청우건설 매각을 위해 동인건설을 죽이겠다는 겁니까?”

    박주혁은 채권단끼리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윤철영 상무에게 속삭였다.

    “동인건설의 1천억은 뭡니까?”

    “청우건설이 지급해야 할 돈입니다. 하지만, 정확히는 470억 원입니다. 그동안의 이자 등을 더해 1천억으로 부풀린 겁니다.”

    대기업들이 건설업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장부 때문이었다. 일용직들을 대거 고용하며 지급되는 현금, 널뛰는 자잿값 등. 투명하지 않은 건설업의 특성 때문에 장부 조작이 그만큼 쉬웠다. 100억을 장부상 1,000억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런 장부 조작으로 매출을 부풀려 대출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이렇게 건설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한 것이기도 하지만···.

    건설을 잘 모르긴 하지만, 그런 비리가 있다는 것은 박주혁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속삭였다.

    “청우건설이 가지고 있는 미분양 아파트의 가치는 얼마나 됩니까?”

    “현재가치로는 천억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부동산 가격이 급락했기에 2천억 원으로 잡혀있던 미분양 아파트의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후하게 쳐서 절반이지 실은 그보다 더 못할 터.

    “미분양 아파트에도 전부 대출이 끼어있죠?”

    “그렇습니다. 분양가의 50%가 대출입니다.”

    분양가가 2천억이었고 절반인 천억이 대출이라면 현재가치로 따지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윤철영 상무의 얘기에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더니 큰소리로 싸우고 있는 채권단을 향해 말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인수희망자인 파인의 대표인 박주혁이 입을 열자, 채권단이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갑은 사실 파인이고 박주혁이니까 말이다.

    “파인이 왜 청우건설을 인수하려 하는지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채권 단장이 손을 뻗어 얘기하라는 시그널을 보냈다.

    “건설회사를 인수하려는 가장 큰 목표는 외환위기로 일자리가 없어진 분들에게 단기일자리라도 제공하고 싶어서입니다.”

    박주혁의 말에 장내가 수군거렸다. 여태껏 이런 목표로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합병을 택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다. 그런데 청우건설의 인수목표가 단기일자리 창출이라니! 채권단은 박주혁의 말에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건설에서 고용 창출이 가장 많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포털사이트 파인이나 파인테크로는 일자리 창출을 많이 할 수 없습니다. 기술이 필요하고 고등교육이 되어야 하니까요. DD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기차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의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런 교육을 받으려면 투자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 서민은 지금 당장 무엇을 배우고, 기술을 익힐 여유도 힘도 없습니다.”

    박주혁의 호소에 장내가 잠시 숙연해졌다.

    “당장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옆에 있던 이웃 중 실직자가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고 인력시장에 나오지만, 그들에게 일거리는 없습니다. 저는 그런 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사실 저의 목표를 이루려면 직접 건설사를 차려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청우건설이 무너지면 또 1,000여 명의 실직자가 발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목표를 곡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호소력 짙은 말이었지만, 돈 앞에는 소용없는 얘기였다.

    “감성팔이 하지 말고, 동인건설의 천억 부채를 떠안고 인수하세요!”

    동인건설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럼, 좋습니다. 단, 동인건설의 채권은 청우건설을 인수 후, 현물로 지급할 수 있도록 채권단에서 조정해주십시오.”

    “현물이요?”

    채권 단장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되묻자, 박주혁이 차분하게 답했다.

    “청우건설의 미분양 아파트를 동인건설에 전부 넘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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