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08화 (108/136)
  • 108화 다, 부모님 덕분입니다.

    “오늘은 제가 사는 겁니다!”

    백희나가 호기롭게 소리치며 웃었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답했다.

    “제일 비싼 거 먹는다?”

    “네! 제일 비싼 거 드세요. 제가 쏩니다! 꺄하하.”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백희나를 보며 박주혁은 웃고 있었지만, 메르헨과 백연주는 마주 앉아 서로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신경전은 그들만의 것이었고 박주혁과 백희나는 음식을 주문하며 웃기 바빴다.

    “그래서 연장전 퍼팅을 하는데···. 그런 거 있잖아요. 이건 된다는 확신이랄까?”

    “오. 그런 느낌이 딱 들었단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처음이었어요. 홀컵이 대접만 하게 커진 것 같고, 공이 어떻게 흘러갈지도 그려지더라고요.”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단 소리네. 멋지다.”

    “히히히!”

    박주혁과 백희나가 시시덕거릴 때, 백연주는 메르헨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벤타의 부회장이라고 들었습니다. 박 대표와는 어떻게 알게 되신겁니까?”

    심문하는 듯한 백연주의 말에 메르헨이 팔짱을 끼더니 상체를 꼿꼿하게 세웠다.

    “제가 대답할 의무는 없는 것 같군요.”

    메르헨은 매사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적대감이 있는 사람들한테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회사를 이끄는 수장답게 차가울 때는 시렸고, 쳐낼 때는 칼이었다.

    “아. 그러시던가요.”

    백연주도 요키아의 임원을 지낸 사람으로서 두 사람 사이에는 찬 바람이 휭휭 불었다.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는 사이 주문한 요리가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를 보며 백희나가 감탄사를 뱉었다.

    “와! 맛있겠다. 너무 그리웠어.”

    “김치찌개가 그리웠어?”

    “당연하죠! 미국에선 이런 상큼한 맛이 없다고요. 매번 텁텁하고 기름지고···.”

    백희나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 후룹.

    백희나는 김치찌개를 한 수저 떠서 맛을 보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더니 곧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캬아! 국물이 끝내줘요.”

    “하하하.”

    역시나 즐거운 건 박주혁과 백희나뿐이었다. 그리고 백연주가 박주혁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일전에 나이스 계약 건 잘 처리해줘서 고마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나이스의 골프채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 건 정말 현명했습니다.”

    “나이스의 골프채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으니까요.”

    박주혁이 미소 지으며 답하자, 메르헨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는 두 여인이었지만, 박주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알게 뭐람? 박주혁은 그저 백희나를 축하해주고 응원하기 위해 온 것일 뿐이다.

    식사를 마치고, 박주혁은 백희나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물론, 백연주에게도 말이다.

    “이게 뭐예요?”

    “파인테크에서 만든 Fp-100이라는 Mp3 플레이어지.”

    “아!! 나 얘기 들었어요. 세계 최초라면서요. 대박!”

    백희나가 소리치며 박스를 바로 뜯었다. 프리즘 모양의 작은 Fp-100을 보며 백희나가 입을 떡 벌렸다.

    “우와! 진짜 작아. 여기에 음악을 넣어서 들으면 되는 거죠?”

    박주혁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폰을 연결해 백희나에게 건넸다.

    “지금 가장 인기 있는 곡으로 골라 넣어놨어. 한번 들어봐.”

    잔잔한 피아노 음과 함께 미성이 흘러나왔다.

    [괜찮은 거니 어떻게 지내는 거야]

    “어머, 나 이 노래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음질 완전 좋아.”

    “마음에 들어?”

    “최고예요! 고마워요. 잘 들을게요.”

    백희나의 반응에 흡족한 미소를 짓던 박주혁이 백연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백 이사님 Mp3에도 취향에 맞을 만한 곡 넣어두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죠.”

    백연주가 잠시 눈을 빛내며 Fp-100을 조작했다. 그리고 흘러나온 노래는···.

    [그, 어느 날! 너와 내가! 심하게 다툰 그 날 이후로···.]

    너무도 유명한 곡이고 전주만 들어도 누구나 제목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노래였다. 그 제목 때문에 백연주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박주혁은 태연하게 물었다.

    “어때요? 음질 괜찮죠?”

    #

    백희나, 백연주와 반가운? 만남을 끝낸 박주혁은 다음날 공항으로 향했다. 메르헨의 배려로 퍼스트 클래스에 몸을 실었지만, 옆자리에 메르헨은 없었다.

    “음.”

    늘 곁에 있던 메르헨과 그녀의 그림자였던 수행비서가 없어 뭔가 허전했지만, 독일로 복귀해야 한다는 메르헨을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주혁 씨, 조만간 또 봐요.”

    메르헨은 밝은 얼굴로 윙크하며 베를린행 비행기에 먼저 떠났다. 시원섭섭한 감정이 이런 것일까? 소금 덩어리 계란말이를 먹으라고 줄 때까지만 해도 빨리 가버리라고 속으로 빌었건만, 막상 독일로 간다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승무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손님. 샴페인 한잔하시겠습니까? 살롱과 크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병을 내밀며 보여주는데 마트나 주류백화점에서 본 적 없는 것이 비싼 것이 고가의 샴페인이었다.

    “비교해보게 한 잔씩 주세요.”

    “알겠습니다.”

    둘 다 누르스름했지만, 크룩이 조금 더 노르스름했다. 번갈아 가며 맛을 봤지만, 솔직히 모르겠다. 그냥 탄산이 많은 화이트 와인이랄까?

    박주혁은 고개를 살짝 갸웃한 후 약하게 도는 알코올 기운을 느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쏘맥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시원하게 한잔 말아서 마셔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박주혁은 눈을 붙였다.

    한숨 푹 자고 나니 비행기는 김포 상공에 도착했다.

    박주혁이 김포공항에 내려 휴대폰을 켜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대표님. 도착하셨습니까?”

    “이 센터장님. 오랜만에 목소리를 듣는 것 같군요.”

    이인우 센터장은 안부 인사 후 SJ 텔레콤과 파인간의 협의 사항을 보고했다.

    “음. 그랬군요. 박 디렉터의 제안을 받아들였군요.”

    “그렇습니다. 박 디렉터가 상당히 디테일하게 준비해서 이후 절차는 순조로웠습니다.”

    “더 파이니트스 서비스는 언제 출시한다고 합니까?”

    “내년을 목표로 한다고 합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인우 센터장에게 수고했다고 치하했다. 박주혁은 모델D에 탑승해 자율주행 활성화한 후 최효정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도착했습니다.”

    “수고했다. 메르헨도 같이 왔지? 어서, 집으로 오거라. 같이.”

    메르헨의 안부를 묻는 최효정 여사가 살짝 의아했지만, 박주혁은 덤덤하게 답했다.

    “메르헨은 독일에서 호출이 있어서 독일로 갔습니다. 언젠가 또 한국에 올 날이 있겠죠.”

    “독···일?”

    “예. 독일 사람이잖아요.”

    “그, 그래. 그랬지···.”

    메르헨이 최효정 여사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섭섭해하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박주혁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구로공단 사옥 공사 현장에 가려는데 어머니도 나오시겠어요? 오래간만에 외식도 하고요.”

    “···그럴까?”

    시무룩한 최효정 여사의 목소리에 박주혁은 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예쁘게 하고 나오세요.”

    “예쁘게는 무슨···. 알았다.”

    최효정 여사의 시무룩한 말투에서 그녀가 메르헨을 몹시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갑게 다가왔던 메르헨에게 정이 드셨기 때문이리라. 박주혁은 잠시 망설이다 메르헨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르헨?”

    “주혁 씨! 잘 도착했어요?”

    밝은 메르헨의 목소리를 듣자, 박주혁도 뭔지 모를 그리움이 마음속에서 피어났다.

    #

    구로공단 파인의 사옥 건설 현장.

    토목공사가 완료되고 골조를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미 골조가 틀을 갖추고 12층의 사옥의 뼈대가 완성되어 있었다.

    박주혁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어머니, 이게 우리 사옥이에요.”

    최효정 여사도 고개를 들어 건물의 골조를 보며 박주혁의 등을 쓰다듬었다.

    “에그머니. 이게 사실이라니?”

    “예. 어머니. 사실입니다.”

    막상 사옥이 형태를 갖춰가니 최효정 여사의 감정이 복받쳤는지 살짝 눈물이 고였다. 그때 현장 쪽에서 한설계 사장과 현장소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박주혁과 최효정 여사를 향해 넙죽 고개를 숙였다.

    “박 대표님과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오시기 전에 연락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일하시는 것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저희가 온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박주혁이 되묻자, 현장소장이 높게 솟아 있는 크레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크레인 기사가 건축주님 오신 것 같다고 무전을 해서요.”

    박주혁이 고개를 들어 잘 보이지도 않는 크레인 운전석을 슬며시 바라보며 말했다.

    “골조가 올해 안에 끝난다더니 벌써 다 된 것 같네요?”

    “예. 외환위기라 숙련자들이 많아서 공사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네요.”

    “숙련자가 많아요?”

    박주혁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말고 곧 그 이유를 알아챘다. 외환위기로 인해 건설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으니 숙련 기술자들이 작은 건설 현장이었지만, 몰렸을 터. 박주혁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턱을 쓰다듬으며 현장소장에게 물었다.

    “숙련자들이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하고 계신 겁니까?”

    “예? 아, 요새 숙련자라 하더라도 일감이 없어서··· 몸값이 많이 내려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숙련자지만 그 대우를 제대로 못 받고 있단 소리였다. 건축주로서는 금액을 아끼면서 고품질의 인력을 쓸 수 있으니 환영할만한 일이었지만,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팔뚝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더니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는 안되죠. 숙련자들이 몸값이 내려가면 그분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부업을 하거나,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곤욕을 치르실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현장소장이 눈을 슬그머니 내리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건설업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애환이 그대로 느껴졌다.

    “한 사장님. 그리고 소장님. 예정보다 건물이 빨리 올라가고 있고, 숙련자들 덕분에 건물의 기초와 골조의 품질이 좋아졌다면 응당 그 대가를 지급해야 하는 겁니다.”

    “대표님!”

    “건축주님!”

    한설계 사장과 현장소장이 박주혁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박주혁은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안전에 특별히 신경 쓰라고 했지요? 숙련자들이 부업으로 피곤한 몸으로 건설 현장에 계셔서는 안 됩니다. 그분들이 오롯이 자신의 분야에 매진할 수 있도록 챙겨주십시오. 그게 맞는 겁니다. 그래야 안전사고도 없는 것이에요.”

    박주혁의 말에 현장소장은 다시 한번 자신의 안전모를 벗어 가슴에 품고 상체를 90도로 숙였다. 한설계 사장도 살짝 눈물을 글썽이며, 박주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박 대표님. 정말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하실 줄 몰랐습니다. 보통은 빠르고 싸게 건설하는 것이 목적일 텐데요. 진정한 상생을 아시는군요. 감복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자신의 가치에 맞는 대가를 받으며 안전하게 일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모두 힘든 시기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겨우 이 정도라 안타깝군요.”

    진심이 묻어나오는 박주혁의 말에 현장소장이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시기에 이런 배려를 하시는 것이 엄청난 결단이라는 것을 모두 알 겁니다. 건축주님의 넓은 아량에 모든 이들을 대신해 제가 감사드립니다.”

    한설계 사장도 머리를 조아리더니 박주혁과 최효정 여사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현장 사무실로 가시죠.”

    박주혁과 최효정 여사는 한설계 사장과 현장소장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그들을 뒤따랐다. 그들을 따라가면서 최효정 여사는 가만히 박주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주혁아, 고맙다.”

    “예? 뭐가요?”

    “이렇게 바르고 따뜻한 사람으로 자라줘서.”

    “다, 부모님 덕분이죠.”

    박주혁의 말에 최효정 여사가 살며시 눈을 훔치며 박주혁의 손을 토닥였다. 건설 현장 한켠에 있는 임시사무소에서 도착했다. 현장소장은 관리감독을 위해 현장으로 떠났고, 한설계 사장이 황급히 믹스커피를 타서 박주혁과 최효정 여사에게 건넸다.

    건설 현황 및 문제점 등 개괄적인 설명한 후 한설계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대표님.”

    “네?”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공사대금 추가라면 각오하고 있었기에 박주혁이 시원시원하게 말했지만, 한설계 사장은 머뭇거렸다. 박주혁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자, 한설계 사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친우가 청우건설의 임원으로 있습니다.”

    “청우건설이요?”

    “예 작년 말에 부도가 났는데···.”

    외환위기에 부도가 난 건설회사 많았기에 박주혁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어진 얘기에 박주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청우건설이 자산도 처분하고 회생절차를 진행했지만, 마땅한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리고 얼마 전 술자리를 가졌는데 제가 그만, 실수로 박 대표님 얘기를 했습니다.”

    “제 얘기를요?”

    “예, 별다른 얘기는 아니었고 지금 같은 시기에 안전을 우선해야 한다는 대표님의 말씀에 너무 감명을 받아서 대표님 자랑을 했더니만, 건설업 진출하실 계획은 없으시냐고···.”

    한설계 사장이 박주혁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생각지 못한 얘기였기에 박주혁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턱을 매만졌다. 박주혁의 표정이 좋지 않자, 한설계 사장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 치며 말했다.

    “곤란하게 해드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전 그 친구에게 말을 전했다는 얘기만 해도 됩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음···.”

    “죄송합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

    “아닙니다. 말씀 잘해주셨어요. 청우건설이라···. 한번 고민해보죠.”

    “예? 정말이십니까?”

    한설계 사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고, 박주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건설이라···. 기업을 인수하려면 지금이 적기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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