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무엇보다 멋지잖아. 우리 대표님.
박주혁과 메르헨이 LA에서 제이콥과 공동투자합의서에 서명하고 있을 때, 파인테크 대회의실에는 SJ 텔레콤과 파인테크가 날 선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Fp-100이 사운드바다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박영희와 심영찬도 함께 자리했다.
“파인테크는 SJ 텔레콤에 휴대폰을 공급하기로 했으면서 난데없이 Mp3 플레이어를 출시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SJ 텔레콤의 날 선 말에 박주혁을 대신해 자리한 이인우 센터장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해당 발언을 한 SJ 텔레콤 인사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방금 말씀하신 사항은 경영권침해입니다. 파인테크가 어떤 제품을 생산하든 그건 파인테크의 고유권한입니다. 마치, 파인테크가 SJ 텔레콤의 계열사처럼 대하는 언사는 삼가해주시죠.”
“SJ 텔레콤도 파인테크에 지분이 있습니다!”
이인우 센터장의 말에 SJ 텔레콤 측에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인우 센터장은 흔들림 없는 말투로 또박또박 반박했다.
“경영권을 행사하시려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는 주주총회가 아니고, SJ 텔레콤과 파인테크의 협업을 위한 자리입니다. 논점을 흐리지 마십시오.”
“크으음.”
이인우 센터장의 말에 SJ 텔레콤 쪽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이인우 센터장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담담히 SJ 텔레콤의 파고를 견뎌냈다. 몇 마디로 분위기를 휘어잡은 이인우 센터장이 잠시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는 SJ 텔레콤과 파인테크가 고객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모인 자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항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파인테크 쪽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SJ 텔레콤 인사들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헛기침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때 박영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말씀하시죠. 박영희 디렉터님.”
“안녕하십니까? 포털사이트 파인의 디렉터 박영희 입니다.”
박영희 팀장은 번역연구팀의 팀장에서 파인의 디렉터로 승진했다. 포털사이트 파인이라는 말에 SJ 텔레콤 임원진들이 팔짱을 풀고 박영희 디렉터를 쳐다봤다. 그만큼 포털사이트 파인의 위상이 올랐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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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사이트는 유일한 방송매체였던 텔레비전, 라디오 그리고 신문까지도 위협하리라는 것이 경제학계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파인은 최대 규모의 음원 유통업자가 되었다. 학계 말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포털사이트 파인과 Fp-100 그리고 사운드바다가 끊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은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파인테크의 Mp3 플레이어 Fp-100은 포털사이트 파인의 부가서비스인 사운드바다를 통해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음원을 구매하는 구조였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현재 소비자들은 음원 하나당 500원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반응은 폭발적입니다. 음반을 사서 원치 않은 음원까지 사던 과거와 달리 자신이 원하는 곡만 선택 구매할 수 있다는 장점과 Fp-100에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꾸려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겠죠. 그 덕분에 파인은 포털사이트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국내 최대 음원 유통사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박영희 디렉터는 영리하게도 SJ 텔레콤 앞에서 파인과 파인테크의 위상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어떻게든 갑질하려던 SJ 텔레콤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날렸다. SJ 텔레콤 측은 목을 가다듬으며 뻣뻣하던 목에서 힘을 풀었다.
“휴대폰은 아니지만, SJ 텔레콤은 현재 파인테크와 파인과 콜라보 하여 젊은 층을 공략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박영희 디렉터의 말에 SJ 텔레콤 측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너무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삐삐가 사라지고, 손에 휴대폰을 쥐는 시기다. 통신사들은 고객 확보와 유지를 위해 피말리는 마케팅 경쟁을 하고 있었다. 특히 SJ 텔레콤은 PCS보다 요금이 다소 비싸고 보수적인 아저씨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젊은 층이 기피하는 통신사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한가지 생각해봤습니다. SJ 텔레콤이 젊은 층에 어필하면서 파인과 콜라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박영희 디렉터가 잠시 말을 멈추고 곁에 있던 심영찬을 쳐다보자, 스크린에 영어 단문이 나타났다.
[The Finest!]
“더 파이니스트! ‘가장 훌륭한’, ‘최고’란 뜻이죠. 이 슬로건으로 20대를 공략하면 어떨까 합니다. SJ 텔레콤의 서비스 명칭이지만, ‘파인’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죠.”
“으음.”
SJ 텔레콤 측 사람들이 턱을 쓰다듬으며 낮게 신음하는 와중에 한 젊은 회의 참가자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젊은 층을 공략하려면 스피드, 통화품질이라는 이미지를 벗을 필요가 있습니다. 박영희 디렉터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박영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그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아, 저는 SJ 텔레콤 마케팅팀의 장한수 과장이라고 합니다.”
박영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장 과장님의 의견이 맞습니다. 현재 젊은 층을 공략하기에는 SJ 텔레콤의 이미지가 너무 40대와 50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맞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장한수 과장은 박영희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도 꼰대들 사이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없었나 보다. 아주 물 만난 물고기였다.
“또 한 가지 젊은 층이 사용하기에는 SJ 텔레콤의 통신 요금이 다소 비싼 감이 있습니다. 20대는 가격에 매우 민감한 세대입니다. 심지어 외환위기라 더 그렇죠. 지금은 다소 손해를 보는 것 같더라도 그들이 사회에 진출해 SJ 텔레콤에 충성고객이 될 테니,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쳐야 합니다. 장기적으로 봐야 한단 말이죠.”
“맞습니다! 박영희 디렉터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장한수 과장의 반응이 거슬렸는지, 박영희가 장한수 과장을 힐끔 노려봤다. 그의 동글동글한 눈이 박영희와 마주쳤고 그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이를 드러냈다.
‘저 녀석은 뭔데 계속 저러는 거야.’
박영희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고개를 획 돌렸다.
“더 파이니스트에 가입한 소비자는 사운드바다를 통신사 포인트로 활용할 수 있는 혜택을 주거나, 매월 일부 음원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면 파인과 SJ 텔레콤 모두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win win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더 파이니스트 존이라는 것을 기획하여 콘서트나 북 토크 같은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문화 행사를 열면 젊은 층을 확실히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타 통신사와는 확실히 차별화할 수 있죠.”
박영희의 말이 끝나자 장한수 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대단합니다! 대단한 기획력입니다.”
젊은 장한수 과장의 반응에 SJ 텔레콤의 부장급 인사들이 미간을 좁히며 구시렁거렸다.
“지금 저, 박 디렉터가 한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아?”
“저 철없는 장 과장이 한 얘기와 같습니다.”
“어휴. 무슨 통신사가 소비자에게 퍼주는 회사도 아니고 말이야.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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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혁은 박영희 팀장을 파인의 디렉터로 승진시키며 파인의 비전을 설명했었다.
“SJ 텔레콤에서 언젠가 파인과 손을 잡으려 할 겁니다. 당연하겠지만 그들은 고자세로 나올 겁니다. 그때는···.”
지나가듯 한 말이었는데 박영희의 수첩에는 꼼꼼하게 메모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지금 상황이 박주혁이 말했던 것과 일치했다.
수첩에 적힌 사항을 토대로 발표했더니 SJ 텔레콤 마케팅 팀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이제 공은 넘어갔으나, 부장급들 인사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 박주혁이 비장의 카드도 언급했었다.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면, PCS와 손잡는다고 하면 됩니다. 통신사는 SJ 텔레콤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구시렁거리는 부장님들을 바라보며 박영희 디렉터가 눈을 빛내며 쏘아붙였다.
“파인의 제안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부장님들께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봅니다.”
박영희의 말에 너 잘 걸렸다는 식으로 부장들이 소리쳤다.
“통신사는 땅 파서 장사합니까? 아무리 젊은 층을 공략해야 한다지만, 이건 퍼주기지! 뭐? 콘서트으? 참나!”
“통신사 수익구조에 대해 알면 그런 소리를 못 합니다! 투자금액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아십니까?”
역시나 격하게 반응하신다. 박영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박주혁이 언급한 비장의 카드를 쓸 생각이었다. 그때 장한수 과장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니 대체 젊은 층을 타겟으로 삼겠다는 겁니까? 버리겠다는 겁니까? 사장님께서 파인테크와 협의하라고 한 내용이 이런 겁니까? 답답들 하십니다! 통신사가 아닌 파인에서조차 지금 이런 훌륭한 안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다 파인이 다른 통신사와 손잡으면 그때는 어쩌실 겁니까! 박 디렉터님 말씀처럼 국내 최대 음원 유통사는 파인으로 이미 바뀌었습니다. 우린 그런 네임벨류를 발로 차고 있는 거고요.”
장한수 과장의 열변을 들어보니, 꽉 막힌 윗사람들 때문에 많이도 힘들었나 보다. 박영희는 그런 장한수 과장에게 살짝 힘을 실어줬다.
“장 과장님 말씀처럼, 저희는 다른 통신사와 손잡으면 그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극성텔레콤에서 만나자고 하더군요.”
거짓말이다.
오늘은 SJ 텔레콤과 미팅이 전부였지만, 극적인 연출을 위해 살짝 조미료를 넣었다. 그리고 이 한마디에 부장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참···못났다. 장한수 과장은 한술 더 떠서 박영희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들으셨죠? 우린 또 한 발 후퇴하는 겁니다.”
장한수 과장이 입을 굳게 닫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제야 상황이 심각함을 안 부장님들께서 허둥지둥 박영희에게 사정했다.
“바, 박 디렉터님. 그 안, 내부적으로 심도있게 검토해보겠습니다. 극성텔레콤과는 잠시 미팅을 보류하시죠.”
“그렇습니다. 파인테크와 SJ 텔레콤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서라도···!”
박영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호적인 관계이기에 먼저 제안 했던 겁니다. 관심 없으신 것 같으니 우린 이만···.”
박영희는 심영찬의 어깨를 치고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곧 회의실에서 장한수 과장의 고성이 울려 퍼졌다.
“제가 뭐랬어요! 아 진짜. 못 해 먹겠네!”
회의실을 박차고 나온 장한수 과장이 박영희의 팔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박 디렉터님. 제가 추진할테니 시간 좀 주십시오. 저도 아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과 너무 흡사해서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박수도 치고 그랬는데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장한수 과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실 장한수 과장은 SJ 텔레콤의 TTS 서비스를 기획하여 진행한 마케팅의 귀재였다. 그가 기획한 TTS 서비스와 쏙 빼닮은 더 파이니스트에 박수를 안 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박영희에게 홀리는 것도 당연할 터.
“SJ 텔레콤의 관계를 봐서 좀 기다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장한수 과장이 밝은 얼굴로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고, 박영희와 심영찬은 파인테크를 벗어났다. 그리고 박영희는 다시금 박주혁의 혜안에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신기하네.”
곁에 있던 심영찬이 박영희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뭐가요?”
“오늘 내가 한 말···. 그거 사실 대표님이 일전에 했던 말이거든.”
“아, 정말이에요?”
“어. SJ 텔레콤이 어떤 식으로 나올 것인지까지 모두 예상하시다니. 박 대표님은 정말···.”
박영희의 말에 심영찬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저도 그런 느낌 많이 받았어요. 마치 미래에서 온 것 같은···.”
“그렇지! 너도 그렇게 느꼈구나.”
“정말 미래에서 왔다면 복권이나 주식으로 떼돈을 벌면 되는데 뭐하러 이 고생을 하겠어요. 확실한 건 대단한 분이라는 거에요. 난 평생 우리 박 대표님과 함께 할 거예요.”
“풉. 나도! 그리고 무엇보다 멋지잖아. 우리 대표님.”
박영희와 심영찬은 피식 웃으며 파인랭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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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혁과 메르헨은 LA 온 김에 US 오픈의 우승 주역 백희나를 만났다.
“꺄아아!”
백희나가 박주혁을 향해 뛰어오다 말고 메르헨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어? 메르헨···?”
“반가워요. 백희나 선수. 이번이 두 번째인가요?”
“와. 벤타의 메르헨님이 여긴 어떻게?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한국말을 해요!?”
백희나가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되어 펄쩍 뛰었다. 그 모습에 메르헨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공부했죠.”
“한국말을요? 왜요?”
메르헨이 어깨를 으쓱이는데 백희나의 시선이 곧바로 박주혁을 향했다. 백희나는 박주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메르헨을 보며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설마···?”
메르헨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백희나는 놓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백희나가 야단법석을 필 때 뒤편에서 백연주가 천천히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박 대표님.”
“정말 축하합니다. 소원을 이루셨네요.”
“솔직히 너무 기쁘긴 해요. 그런데 이분은?”
“아 메르헨씨라고, 벤타의 부회장님이십니다.”
박주혁의 소개에 메르헨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백연주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메르헨이라고 해요.”
능숙한 메르헨의 한국말에 백연주의 눈썹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아, 안녕하세요. 한국말을 너무 잘하시네요.”
백연주는 웃고 있었지만, 입은 앙다물어진 상태였다. 그녀의 히스테리를 알고 있는 박주혁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기류를 느끼고 서둘러 식당으로 향하며 소리쳤다.
“뭐해요! 빨리 와요.”
박주혁의 외침에 힘을 잔뜩 주며 악수하던 백연주가 손에 힘을 풀며 몸을 돌렸다. 졸지에 선공격을 당한 메르헨도 얼굴을 굳히며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다른 파워 워킹이었다.
여자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사랑의 경쟁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