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분명 키스였는데···
파인테크와 벤타의 투자 의향을 확인한 제이콥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내려놨다.
“됐어. 이제 종인이의 제안을 거절하면···.”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했던가, 마침 이종인과 그 패거리들이 로그 미 인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종인은 웃는 얼굴로 제이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직 점심 전이지?”
“어. 맞아.”
“어제 내가 미처 제안하지 못한 게 있어서 말이야. 밥 먹으면서 좀 더 얘기할까?”
제이콥은 직장 동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해 이종인과 밖으로 나갔다. 사무실을 벗어나자마자 제이콥은 이종인을 핀잔하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직장 동료들이 있는 데서 그렇게 말해야겠어?”
“뭐 어때. 이 바닥이 다 그런 거지. 능력자라면 돈에 따라가는 것 아닌가?”
이종인의 말에 제이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 적어도 나와 제일린을 그렇지 않았어.”
“···”
제일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이종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제이콥과 이종인은 근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들은 메뉴를 대충시키고, 마주 앉았다.
“제안은 생각해봤어?”
“어. 해봤지. 그런데 아직 내가 터치스크린에 매진할 때는 아닌 것 같다.”
“그래.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제이콥이 그렇게 얘기할 줄 알았다는 듯 이종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는 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직원은 황급히 가방에서 서류하나를 꺼내 이종인에게 건넸다.
“자, 이걸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봐.”
“이게 뭔데?”
“널 위한 삼송의 배려랄까?”
제이콥은 문서를 건네받아 천천히 읽어가며 점점 눈이 커졌다.
“날 삼송디스플레이의 상무로 임명하겠다고?”
“파격적인 대우지. 내가 힘 좀 썼다.”
“···.”
밝게 웃는 이종인과는 달리 제이콥의 표정은 굳었다. 제이콥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또다시 너의 꼭두각시가 될 수는 없지.’
제이콥이 말없이 눈만 끔벅이자, 이종인이 답답하다는 듯 그를 다그쳤다.
“뭘 망설여? 삼송이면 한국에서 제일가는 기업이라는 것은 너도 알잖아. 거기에 상무라고. 절호의 기회야.”
“그래 너의 노력은 고맙지만, 난 딱히 생각이 없어.”
제이콥은 서류를 눌러 이종인 앞으로 밀어냈다.
“뭐? 이런 조건을 거절하겠다고?”
이종인과 그의 동료들이 크게 당황했다. 제이콥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깍지 끼더니 천천히 입술을 뗐다.
“우선, 왜 네가 날 영입하려 혈안인지 모르겠어. 내가 디스플레이에 관심이 많은 건 맞지만, 현재로서는 내세울 기술이 아무것도 없지. 다시 말하자면, 지금 삼송이 제안하는 것은 내 분수에 맞지 않다는 소리야.”
“제이콥. 삼송은 너의 미래가치를 본 거야.”
제이콥은 상체를 의자에 기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미래가치라면 사실, 로그 미 인이 먼저 알아봤지. 지금도 성장세가 가팔라.”
“···.”
이종인의 입술이 얇게 펴졌고 당황하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너, 파인에서 무슨 제안을 받았구나?”
“받긴 했지. 하지만, 거절했어.”
거절했다는 제이콥의 말에 이종인의 눈빛이 다시 풀어졌다. 그때 주문했던 요리가 나왔다. 제이콥은 손바닥을 비비더니 이종인과 그의 부하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자, 먹죠. 배고프네요.”
제안을 당차게 거절한 제이콥은 밝은 목소리였지만, 이종인을 비롯한 삼송 직원들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제이콥이 먼저 일어나려 하자, 이종인은 다시 제안서를 내밀며 말했다.
“다시 한번 고민해봐. 정말 쉽지 않은 기회라고. 너의 이름을 세계에 알릴 수도 있어.”
“내 이름···? 너 아니고?”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됐다. 더는 너랑 할 말 없어. 이 제안서는 도로 가져가도록 해.”
제이콥이 차가운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나자, 이종인 곁에 있던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쩌죠?”
“마이애플에서 터치스크린을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냥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파인에서도 움직이고 있어.”
이종인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제이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제이콥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종인은 여전히 제이콥에게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닌 척하지만, 제이콥이 날 피하고 있다. 설마··· 제일린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나?’
이종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제이콥을 가만히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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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혁과 메르헨은 바닷가 파라솔에 앉아 칵테일을 들었다. 메르헨이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리곤 눈웃음을 짓더니 박주혁에게 말했다.
“원했던 결과는 아니지만, 그래도 축하합니다.”
“제이콥이 파인이나 삼송을 택하지 않고, 회사를 차린다고 할 줄은 몰랐네요.”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칵테일 잔을 입에 가져갔다. 수평선에 걸린 붉은 해가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뭐 제이콥 함이 자신의 기술로 회사를 창립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결과가 멀티 터치스크린 기술의 발전을 앞당길 수 있는 결과였으니 절반은 성공이라고 볼 수 있겠지.
박주혁이 씩 웃으며 칵테일 잔을 입에 가져갈 때, 조금 전부터 주변을 얼쩡거리던 중년의 신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좋은 저녁입니다.”
중년의 남성에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메라가 목에 걸려있었고 그가 짊어진 커다란 가방과 그 뒤에 꽂혀있는 피켓이 그가 사진을 찍어 판매하는 사진사라고 말하고 있었다.
메르헨은 환하게 웃으며 남성의 인사에 답했다.
“좋은 저녁이네요. 해가 너무 이쁘죠?”
그러고 보면 메르헨의 심성은 참 곱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니 말이다. 물론, 비지니스적으로 할 때는 사나운 맹수 같지만 말이다.
사진사는 너그러운 미소로 박주혁과 메르헨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비록 사진으로 먹고사는 사람입니다만, 두 분의 분위기와 저 석양이 너무 잘 어울려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왔습니다. 미천한 실력이지만, 두 분을 제 카메라에 담아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사진사의 말에 메르헨이 빙긋 웃으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언젠가 파리의 길거리 화가가 박주혁을 그리고 싶다고 했을 때는 둘이 도망쳤었는데···. 박주혁이 잠시 파리의 기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사는 환하게 웃으며 석양을 바라보며 박주혁과 메르헨을 향해 카메라 렌즈를 열었다.
“두 분. 애인이시죠? 참 보기 좋네요.”
“···!”
사진사의 말에 메르헨이 눈을 살짝 키우며 박주혁을 힐끔 쳐다봤다. 사진사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박주혁은 챠넬 무대에 섰던 경험을 살려 카메라를 씹어 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박주혁의 진지함에 메르헨은 또 풉! 하고 웃어버렸다.
‘주혁 씨 답네. 매사 열정을 다하는 모습.’
박주혁의 매력에 흠뻑 취한 메르헨이 웃으며 사진사를 바라봤다. 사진사는 렌즈를 이리저리 돌려 초점을 맞춘 후 박주혁과 메르헨에게 포즈를 주문했다.
“그 남자분은 카메라가 잡아먹지 않으니까, 눈에서 힘 좀 빼시고요. 여성분을 따뜻하게 뒤에서 안아주세요.”
“···예?”
“백허그 몰라요?”
“알죠.”
대답은 잘했지만, 박주혁은 메르헨의 뒤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메르헨은 박주혁이 쩔쩔매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거렸다.
박주혁이 어색하게 메르헨의 뒤에서 서서 뻣뻣하게 굴자, 사진사가 답답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박주혁에게 다가왔다. 그는 허공을 헤매는 박주혁의 손을 잡아끌어 메르헨의 허리를 안게 했다. 진땀을 흘리는 박주혁과 달리 메르헨은 박주혁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기며 기댔다. 메르헨의 반응에 사진사는 웃으며 박주혁에게 호통치듯 소리쳤다.
“거, 아시아인들이 매우 보수적이라더니만, 사실인가 보네. 자연스럽게 해요. 자연스럽게! 둘이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안고, 키스도 하고 그럴 거 아닙니까? 카메라 앞이라고 너무 뻣뻣하게 굴지 말고요.”
사진사의 말에 메르헨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고, 박주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진사의 카메라만 응시했다.
“자 찍습니다.”
- 찰칵. 찰칵!
사진사는 셔터를 누르더니 또 다른 주문을 했다.
“자연스럽게 서로 눈을 바라보고, 여성분 좋아요. 거기 남자분 목석처럼 굴지 말고 사랑을 담아 눈을 바라보시라고요!”
사진사의 호통에 메르헨이 풉하고 웃었다. 메르헨의 숨결이 박주혁의 뺨을 간질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메르헨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맑고 깊은 푸른 눈을 마주하자, 전에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이 살아났다.
- 두근 두근.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박주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지?’
한 번 메르헨의 눈 속에 시선을 뺏기자,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주 좋아요!”
사진사의 외침과 함께 카메라 셔터가 눌렸다.
- 찰칵!
박주혁의 품에 안긴 메르헨이 박주혁을 지그시 바라보며 속삭였다.
“주혁 씨. 가까이서 보니 더 멋지네요.”
“예?”
박주혁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뜨며 메르헨으로부터 한 발 떨어지어지려 하자, 사진사가 버럭 소리쳤다.
“아, 자연스럽게 합시다. 정말 좋았는데···. 안 되겠어요. 키스하는 장면으로 바꾸죠. 두 사람의 입술에 석양을 입히면 작품나올 것 같습니다.”
박주혁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사진사를 뚫어지라 볼 때 메르헨이 까치발을 들어 자신의 입술로 박주혁의 입술을 덮었다.
“읍!”
박주혁이 흠칫 놀랄 때 사진사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아주 좋아요! 좋습니다. 환상적입니다!”
- 찰칵, 찰칵!
메르헨은 사진사가 건넨 사진을 보며 빙그레 웃더니 박주혁에게 건넸다. 아까부터 급속히 말수가 적어진 박주혁이 사진을 받아 살펴보더니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게 정말 우리인가요?”
박주혁의 뜬금없는 말에 사진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사진은 거짓말 안합니다. 두분 정말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니까요. 사진값은 안받겠습니다. 다만, 제가 이 사진으로 마케팅할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사진사의 말에 메르헨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주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석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 박주혁과 메르헨은 검게 처리되어 누군지 특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붉게 타오르는 석양의 정중앙에 박주혁과 메르헨의 입술이 맞닿아 있어 신비롭고 따뜻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풋풋함도 느껴졌고···. 정말 아름답고도 멋진 사진이었다.
“멋지네요.”
“고맙습니다. 지금 한 말씀 마케팅으로 써도 된다는 허락으로 알아도 되겠죠?”
사진사가 환하게 웃으며 박주혁을 팔꿈치로 툭 쳤다. 박주혁은 사진사를 힐끔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사는 중절모를 벗어 정중하게 인사하며 감사를 전했다. 사진사가 떠난 후 메르헨은 박주혁의 손에 있는 사진을 낚아채듯 가져가며 말했다.
“이 사진은 제가 갔겠어요.”
“네, 그러세요.”
“그···. 아까 키스한 건 사진 때문이었으니까 오해는 마시고요.”
메르헨이 아까와는 달리 쌀쌀맞게 말했고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입맞춤이라기보다는 감정이 전해지는 키스였지만, 메르헨이 아니라고 하니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분명 키스였는데···.’
머리와 감정이 따로 놀기는 했지만, 메르헨은 분명 비즈니스 파트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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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를 벗어난 박주혁과 메르헨은 제이콥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멀티 터치스크린 개발을 위한 공통투자합의서를 작성하기 위한 자리였다.
“어서 오세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제이콥이 박주혁과 메르헨을 반갑게 맞이하며 작성된 합의서를 내밀었다.
“초안을 만들어 봤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박주혁과 메르헨은 제이콥이 내민 서류를 천천히 살펴봤다. 통상적인 합의서였지만, 마음에 드는 구절은 있었다.
[멀티 터치스크린 개발완료시 공동투자회사에 그 기술을 제공하며, 매출액의 0.01%의 라이선스료를 지급한다. 그 외 타 회사에 기술 및 특허를 제공할 시에는 라이선스 요율을 별도로 협의하며 수익은 투자 비율에 따라 분배한다.]
조건만 보면, 파인테크는 제이콥이 개발한 멀티 터치스크린을 독점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폭이었다. 파인과 DD는 끈끈한 키스로 묶여있으니 말이다.
박주혁은 제이콥의 합의서를 내려놓고 바로 서명을 했다. 그 모습에 제이콥이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투자금액은 공란입니다!”
“얼마가 필요하십니까?”
박주혁의 힘있는 물음에 제이콥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이며 입술을 천천히 뗐다.
“음. 초기 장비 구매와 연구실 임대 등등 따지면···.”
제이콥이 허공을 바라보며 계산을 하는데 메르헨이 먼저 금액을 제시했다.
“벤타에서는 1,000만 불을 선투자하겠습니다.”
“허! 예?”
“그럼, 파인과 DD에서도 총 1,000만 불을 투자하도록 하죠.”
제이콥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쩍 벌렸다.
“이, 이천만 불···. 맞습니까?”
박주혁과 메르헨은 서로 한번 시선을 교환한 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