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105화 (105/136)
  • 105화 투자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박주혁은 메르헨과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와인을 주고받았다. 비행기 일등석에 이은 호텔 펜트하우스까지···. 역시 어머니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메르헨이 잔에 담긴 황금빛 와인을 뱅글뱅글 돌려 향을 맡으며 말했다.

    “제이콥이라는 사람이 꼭 필요합니까?”

    “음. 마이애플은 그 기술을 개발하고 있고, 저흰 없으니까요.”

    박주혁은 미간을 좁힌 채 와인잔을 바라보며 답했다. 메르헨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삼송에서 어떤 제안을 했을까요?”

    “알 수 없죠. 다만, 그들은 원하는 인재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제이콥을 대신할 사람은 없나요?”

    박주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와인잔을 입에 가져갔다. 박주혁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던 메르헨이 말했다.

    “어려운 일이네요.”

    “그러게요. 제안은 했으니 연락을 기다려봐야죠.”

    “네.”

    #

    한편, 제이콥은 집으로 돌아와 찬장에 있던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박주혁과 얘기를 나눌 때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위스키 잔을 든 채 의자에 몸을 기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종인···. 한 번도 연락하지 않더니 같이 일하자고? 매정한 새끼.”

    제이콥은 위스키를 입에 털며 신음했다.

    “크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난 제이콥이 책장에 나열된 대학생 시절의 사진을 바라봤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이종인과 제이콥 그리고 제일린이 활짝 웃고 있었다. 컴퓨터 사이언스 컨퍼런스에서 1위를 했다는 표창과 트로피를 든 채···. 사진을 바라보던 제이콥의 눈빛에서 진한 슬픔이 묻어났다. 제이콥은 사진 속 제일린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더니 중얼거렸다.

    “제일린의 장례식장에도 안 온 새끼가···. 어떻게 나와 함께 일하자고 할 수 있지? 얼굴이 두꺼워도 너무 두껍네.”

    - 탁!

    제이콥은 사진을 덮어버리며 남아있는 위스키를 입에 털어버렸다.

    “크으.”

    제이콥은 쇼파에 몸을 파묻고 팔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옛 추억이 떠올랐다.

    #

    94년 코넬대학교의 한 강의실.

    “자, 조별 과제를 진행하겠습니다.”

    “아아···.”

    학생들의 탄식에 교수는 씩 웃으며 말했다.

    “3인 1조로 C/C++ 등 우리가 배운 언어들을 활용해 프로그램을 만들어 오세요.”

    “아아···.”

    학생들의 탄식이 다시 이어졌고, 교수는 펼쳐진 수업 교제를 덮으며 말했다.

    “주제는 자유! 여러분들의 번뜩이는 창의력을 기대해보겠습니다.”

    교수가 나가자마자 강의실은 소란스러워졌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조별 과제!”

    “3인 1조랬지? 난 그럼 페이크랑 해야겠다!”

    “무슨 소리야. 내가 페이크랑 할 거야.”

    수석 입학을 한 페이크와 같은 조를 하기 위해 야단법석이었다. 그때 이종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앉아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제이콥에게 다가갔다.

    “안녕. 제이콥, 맞지?”

    제이콥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이종인을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어.”

    “한국 교포라고 들었어. 나도 한국 사람이거든.”

    “알아.”

    제이콥 함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이종인은···.

    “헤이! 종인. 페이커가 같은 조 하자던데? 생각 있어?”

    “난 괜찮아.”

    “뭐? 조별 과제 A+를 포기하겠다는 거야?”

    “페이커 아니어도 A+를 받을 수 있거든···.”

    이종인의 말에 페이커의 제안을 전하러 왔던 학생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갔다. 이종인은 제이콥에게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와 같은 조 하자.”

    “그래.”

    “잘 부탁해. 이종인이야.”

    제이콥은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내밀어 이종인과 악수했고, 곧 한 여학생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나도 끼워줘.”

    아리따운 목소리에 제이콥과 이종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종인과 차석을 다퉜다던 제일린이 팔짱을 낀 채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중이떠중이랑 하느니, 그래도 상위권인 너희랑 하는 게 좋겠지. 잘 부탁해. 제일린이야.”

    수석 페이커만 빠지고 TOP4가 그렇게 뭉쳤고, AI 제이린이 탄생했다.

    제이콥의 제, 이종인의 이, 제일린의 린이 합쳐서 만든 이름이 제이린이었다.

    조별 과제로 딥러닝의 기초 개념을 탑재한 AI 제이린은 당연하지만, 극찬을 받았다. 특히 발표자였던 이종인이 말이다. 교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종인의 발표를 듣고는 물었다.

    “종인, 딥러닝이란 개념을 넣을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지?”

    “AI라면 스스로 학습해야 한다고 가정해봤습니다. 한 번 익힌 문장, 단어 등을 적재적소에 다시 배열할 수 있도록 수학적으로···.”

    설명을 듣고 있는 교수의 눈에 이채가 서렸고 박수를 치며 물었다.

    “와. 대단한데? 이 AI를 설계한 사람은 누군가? 제일린?”

    제이콥이었지만, 이종인은 재빨리 답했다.

    “리더인 접니다.”

    “역시, 그랬구나. 훌륭해!”

    이종인의 말에 제일린이 제이콥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제이콥, 네가 설계한 거잖아? 왜 가만히 있어?”

    “그게···. 중요한가?”

    “뭐라고? 엄청 중요하지!”

    제일린이 답답하다는 듯 제이콥을 다그쳤지만, 제이콥은 강단 아래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AI 제이린을 조작하기 바빴다.

    “제이콥!”

    “학점만 받으면 그만이야.”

    “허.”

    그렇게 생각했었다. 조별 과제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지도 않았고 말이다.

    교수의 눈에 띈 이종인은 AI 제이린으로 장학금은 물론이며, 프로그래밍 대회를 휩쓸며 승승장구했다. 중간에 그룹을 탈퇴한 제이콥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제일린이 제이콥을 찾아왔다.

    “제이콥. 종인이를 말려줘.”

    “그게 무슨 소리야.”

    “AI 제이린이 자신의 작업인 듯 상도 다 받고 있다고. 분명 우리가 함께 만든···.”

    “그건 불안전한 AI야. 너도 알잖아.”

    “그래. 알아 하지만, 그걸 가지고 종인이가 이룩한 것들을 봐. 심지어 널 제외한 채로 말이야. 그걸 설계한 건 너잖아!”

    AI 제이린.

    딥러닝이 채택된 AI로 이슈몰이는 하겠지만, 불완전 작품이었다. 스스로도 그 허점을 알고 있었기에 제이콥은 별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제일린은 그렇지 않았던 듯싶다. 그때라도 제이콥이 나섰으면 제일린이 죽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를 지금도 한다.

    제일린은 제이콥을 빼놓고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영 찜찜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룹에서 스스로 발을 뺀 건 제이콥이었다. AI 제이린의 한계와 문제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는 화상회의 시스템 개발에 몰두했었다.

    그러는 사이 일이 터졌다.

    “여러분, AI 제이린 입니다!”

    한 컨퍼런스에서 이종인이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AI 제이린을 발표했다, 그리고 제이콥이 그렇게 불안전하다고 우려했던 오류가 터졌다. 지속된 데이터 입력으로 AI 제이린은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분명 경고했을 텐데···.

    컴퓨터 사이언스 컨퍼런스는 대학생 위주였기에 이런 실수들은 다수 발생했다. 하지만, 이종인은 그 실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폭탄 돌리기였다.

    “제일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담당한 파트잖아?”

    마이크를 끄지도 않고, 이종인은 제일린을 바라보며 나무랐다. 마치 너의 잘못이라는 듯 말이다. 가뜩이나 제이콥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프레임까지 덮어쓰니 제일린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컨퍼런스가 끝나고 제일린을 술에 잔뜩 취해 이종인과 언쟁을 벌였다.

    “당장 제이콥에게 사과해!”

    “내가 왜? 배신한 건 그 녀석이라고. 솔직히 오늘 오류도 제이콥이 빠지면서 생긴 거 아냐?”

    “뭐, 뭐라고? 달콤한 성공에 취해서 제대로 챙기지 않은 네 탓이겠지! 왜 제이콥 탓이야?”

    “아, 몰라. 젠장!”

    이종인이 계속 부정하자, 제일린이 술기운을 빌려 버럭 소리쳤다.

    “치사한 놈. 내일 교수님께 다 말하겠어!”

    “뭐? 뭘 말해?”

    제일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술집을 빠져나갔고, 이종인은 그런 제일린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이를 꽉 물었다.

    그날 저녁, 제일린은 뺑소니 차에 치여 명을 달리했다. 이종인에게는 혐의가 없다는 경찰 측의 답변을 들었지만, 제이콥은 이종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은 냉혈한 이종인, 그를 말이다.

    제일린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탓이라고 느낀 제이콥은 그날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무심했던 제이콥이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으리라. 다시는 제일린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제이콥의 내성적인 성격은 카드 뒤집듯 밝게 바뀌었다. 그리고 제이콥은 코넬대를 자퇴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개발하고 있는 것에 몰두하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이종인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다행히도 그가 연구하던 화상회의 시스템에 관심이 있던 로그 미 인은 그를 기술 이사로 발탁했다. 그렇게 이종인과 제일린을 잊어가나 싶었더니 이종인이 찾아와 과거를 헤집어 놨다.

    “제길!”

    이종인과 마주했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지만, 속이 부글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박주혁을 노려보던 이종인의 그 눈빛 또한 계속 생각났다.

    “그 새끼랑은 절대 같이 못하지 하지만, 이종인 이 새끼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어쩌지?”

    제이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아 고개를 떨궜다. 한참을 고민하던 제이콥은 갑자기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제이콥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

    다음날.

    아침을 먹고 나서 박주혁은 메르헨과 LA의 햇살을 만끽하며 해변을 걸었다. 바다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을 보며 메르헨이 말했다.

    “우리도 수영이나 할까요?”

    “예? 그럴 기분이 아니네요.”

    “그럴수록 기분 전환이 필요한 법이에요.”

    메르헨이 박주혁의 팔을 잡아끌어 수영용품을 파는 곳에 들어갔다. 떨떠름한 박주혁과 달리 메르헨은 웃으며 박주혁에 수영복을 추천하며 입어보라고 부추겼다.

    “괜찮은데···.”

    “주혁 씨가 기분이 처지면 저까지 우울해진다고요. 어서요!”

    메르헨이 골라준 수영복을 챙겨 들고 박주혁은 탈의실로 향했다.

    ‘하긴, 메르헨 말이 맞아. 내가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결과가 바뀌지 않아. 조금 여유롭게 생각하자.’

    마음을 고쳐먹은 박주혁이 수영복을 입고 나오자, 메르헨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저는 이걸로 골랐어요. 입고 나올 테니 어떤지 봐줘요.”

    “예.”

    무심하게 답한 박주혁은 다른 물건들을 뒤적였다. 그때 메르헨이 다 갈아입었는지 박주혁을 불렀다.

    “주혁 씨!”

    “예. 갑니다.”

    박주혁이 구경하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탈의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검은색 끈들이 메르헨의 매끈한 등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수영복이라지만, 등을 너무 드러내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할 때 메르헨이 빙글 돌아 포즈를 취했다.

    메르헨의 아름다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비키니였다. 메르헨의 몸매가 좋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때요?”

    메르헨의 물음에 박주혁이 순간 대답을 못 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메르헨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메르헨은 시선을 돌려버리는 박주혁의 반응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탈의실로 몸을 돌렸다.

    “별론가 보네요.”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힘주어 말했다.

    “아니요. 예쁩니다. 잘 어울려요.”

    “그래요?”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이 화색을 띠며 밝게 웃었다. 수영복으로 탈의한 박주혁과 메르헨은 LA 바닷가로 향했다. 메르헨이 박주혁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는데 그도 이제 메르헨의 이런 스킨십이 익숙했는지 자연스럽게 받아줬다. 조금 자연스러워진 박주혁의 반응에 메르헨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바닷가에 오니까. 산낙지 생각나요.”

    “산낙지요?”

    “예. 오독오독 그리고 쏘맥.”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그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박주혁이 살짝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받았고, 메르헨은 그의 곁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박주혁을 바라봤다.

    “네, 박주혁입니다.”

    “안녕하세요. 로그 미 인의 제이콥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제 메르헨의 제안은 생각해보셨습니까?”

    “네. 그런데···.”

    제이콥이 말끝을 흐리자, 박주혁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박주혁의 표정 변화에 따라 메르헨도 얼굴을 굳히며 박주혁의 곁에 더욱 바짝 다가와 그의 어깨를 살포시 껴안았다. 하지만, 이어진 제이콥의 말에 박주혁과 메르헨은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끔벅일 수밖에 없었다.

    “파인에서 일하는 것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대신 저는 멀티 터치스크린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회사를 직접 차릴 생각입니다.”

    “예?”

    “좀 당황하셨을 것 같은데요. 박 대표님이나 메르헨님이 혹시 제가 설립할 회사에 투자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제이콥의 말에 박주혁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메르헨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제이콥 함이 설립할 회사의 대주주가 되어 그 기술을 이전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차라리 잘됐다. 머니게임이라면 삼송에 밀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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