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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101화 (101/136)
  • 101화 맨발의 투혼.

    박주혁과 메르헨이 식당에 도착하자, 점원이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되어 계십니까?”

    “예. 박주혁으로 예약했습니다.”

    점원은 잠시 리스트를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두 분으로 되어 계시는데요?”

    “어머니께서 먼저 오셨나 보군요. 한사람 추가되면 문제가 있나요?”

    박주혁의 말에 점원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쭤본 겁니다. 그럼, 따라오시죠.”

    점원은 앞장 서가며 가슴팍에 있는 무전기로 오더를 내렸다.

    “7번 방. 손님 한 분 추가입니다. 지금 바로 세팅해주세요.”

    7번 방에 가까워지자, 박주혁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메르헨이 여자친구가 아닌 투자자였지만, 그래도 어머니에게 여자를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기에 본인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다.

    ‘메르헨은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다.’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잡고, 방 앞에 섰다.

    “손님. 들어가겠습니다.”

    점원은 잠시 텀을 둔 후 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점원의 서비스가 눈에 거슬렸다. 왜 이렇게 느리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문이 열리고 최효정 여사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박주혁을 맞이했다.

    “주혁이 왔···니?”

    반갑게 인사말을 건네던, 최효정 여사는 금발에 밝은 푸른 눈동자의 메르헨을 발견하고 말을 살짝 더듬었다. 최효정 여사는 박주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해명을 요구했다.

    “벤타의 부회장 메르헨이십니다.”

    “메···르헨?”

    “아룡하세요. 어머니.”

    메르헨의 말에 최효정 여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 아. 안녕하세요.”

    겨우 메르헨에게 인사를 건넨 최효정 여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박주혁을 다시 쳐다봤다. 어색한 분위기에 박주혁의 미간이 와락 좁혀졌다 다시 펴졌다.

    “일전에 말씀드렸었죠? 메르헨이 DD 자동차를 인수하고 절 사장으로 임명했다고···.”

    “아아! 아이고 감사합니다.”

    최효정 여사가 그제야 누군지 알겠다는 듯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메르헨도 최효정 여사의 손을 맞잡고 웃으며 말했다.

    “반가워욜. 어머니.”

    “아이고, 한국말도 잘하시네요.”

    최효정 여사의 말에 메르헨은 엄지와 검지를 가깝게 붙인 후 눈가에 가져와 윙크하며 말했다.

    “쪼큼해요.”

    “응? 아하, 조금 하시는구나.”

    발랄한 메르헨 덕분에 최효정 여사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렸다. 반면, 박주혁은 굳은 얼굴로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죠.”

    메르헨은 박주혁 옆으로 다가와 앉았고, 최효정 여사는 박주혁의 맞은 편에 앉으며 메르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상당이 부담스러웠다.

    “메르헨 씨는 올해 나이가?”

    아직 메뉴도 고르지 못했는데, 최효정 여사는 예고도 없이 훅 들어왔다. 메르헨은 아무렇지 도 않은 듯 웃으며 어색한 한국말로 또박또박 답했다.

    “저, 스물···. 음. 스물칠이에요.”

    “스물칠? 아, 스물일곱?”

    “네네. 일고옵.”

    그렇게 말을 주고받더니 서로 까르르 웃었다. 반면, 박주혁은 영문도 모른 채 눈만 끔벅였다.

    ‘왜들 이러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백희나 선수의 티샷 깔끔하···. 어? 어! 아, 안타깝네요. 티샷이 워터 헤저드에 빠진 것 같죠?

    - 물결이 치지 않는 것을 보면, 물에 빠진 것 같진 않고, 러프에 공이 걸린 것 같네요.

    -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벌타 없이 칠 수 있겠죠?

    - 음. 공이 놓은 상태를 봐야 합니다. 공을 칠 수 없는 상태라면 벌타를 받고 공을 옮겨서 쳐야 할 수도 있습니다.

    - 아아···.

    아나운서의 안타까운 탄식이 백희나를 응원하는 국민들의 탄식과 같았으리라. 1차 연장전, 중요한 순간이었건만···. 백희나의 공은 카메라가 찍지 못하는 워터 헤저드 근처 러프 속에 처박혔다.

    그리고 이어진 미국 해설가들의 말을 시청자들을 위해 통역해야했지만, 아나운서와 해설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 저걸 치려고 하다간, 공이 러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차라리 벌타 맞고 공을 빼는 게 낫죠.

    - 제니 추는 과자를 먹으면서 웃고 있어요! 승리를 직감한 것 같죠?

    - 서든 데스니 만큼 여기서 벌타를 받는 순간 백희나는 졌다고 봐야겠죠···. 안타깝군요.

    백희나가 걸어가는 장면에서 나오는 미국 해설가들의 말을 통역 없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그러다 아나운서가 정신이 들었는지 말을 더듬으며 중계했다.

    - 어, 어렵겠군요. 아···.

    - 골프는 마지막까지 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제니 추가 방심하다가 실수할 수도 있고요. 설사 지더라도 여기까지 온 것이 엄청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해설자가 애써 기운을 북돋으려 했지만, 백희나의 패배는 짙어지는 것 같았다. 공이 낙하한 지점에 다다른 백희나는 공를 찾아 기웃거렸다. 캐디로 나선 백연주도 함께 공을 찾았고, 마침내 러프 사이에 놓인 하얀 공을 찾았다. 워터 헤저드에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저 공을 쳐 내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백희나는 캐디인 사촌 언니 백연주와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신발과 양말을 벗어젖혔다. 검게 탄 다리와 달리, 백희나의 발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얬다. 그녀의 행동을 본 미국 해설자들이 놀랍다는 듯 소리쳤다.

    - 설마? 칠 생각인가요?

    - 백희나 선수가 무리수를 두는 것 같군요.

    - 아닙니다. 벌타를 받으나, 지금 이 샷을 치느냐는 결과론적으로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백희나 선수는 도전을 택했군요. 멋집니다!

    미국 해설가들의 말을 무시한 채 한국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감격했다는 듯 소리쳤다.

    - 백희나 선수가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저 공을 칠 생각인 것 같습니다.

    -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어요!

    감정이 이입돼 잔뜩 흥분한 상태로 소리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감정이 백희나를 지켜보고 있던 국민과 같았으리라.

    - 백희나 선수가 어드레스를 취합니다.

    -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어요! 백희나, 할 수 있다!

    해설가는 주문을 외우듯 소리쳤다. 그리고 백희나가 스윙을 시작하자,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백희나를 쳐다봤다.

    - 딱!

    아이언 헤드가 공을 정확히 맞혔고, 풀떼기들이 허공으로 날렸다. 백희나의 공이 페어웨이에 잘 떨어졌다. 그 순간,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 백희나 선수가 공을 살렸습니다!

    - 할 수 있다아!!

    카메라는 백연주가 내민 아이언을 붙잡고 웃으며 헤저드에서 올라오는 백희나를 찍었다. 그녀의 밝은 웃음이 지금 당장 우승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카메라는 과자를 먹으며 피식 웃고 있던 제니 추도 비추었다.

    과자를 든 제니 추의 손이 입 앞에서 멈춰있었다. 제니 추는 백희나의 공을 뚫어져라 보며 입을 벌렸고 눈도 휘둥그레졌다. 카메라는 제니 추가 놀라는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고, 오히려 쌤통이라는 듯 클로즈업했다.

    무승부.

    백희나의 환상적인 샷 덕분인지 제니 추의 퍼팅이 흔들려 다행히도 연장 첫 번째 홀은 무승부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미 승부는 기울었다. 제니 추는 백희나의 연못 샷에 이미 흔들렸다. 결국, 연장 2번째 홀 6m 이상 떨어져 있던 백희나의 공이 먼저 홀컵을 향해 굴러갔다.

    - 드, 들어갈까요?

    - 할 수 있습니다. 들어갑니다!

    그들의 염원 덕분일까? 정말로 백희나의 볼은 홀컵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린에서 사라져버렸다.

    - 땡그렁!

    백희나의 공이 홀컵으로 들어가자, 환호성이 스피커를 찢어버릴 것 같았다. 아나운서와 해설자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지만, 그 감동을 전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 백희나아! 우스으응!

    -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아악!!

    백연주가 케디백을 바닥에 던지고 백희나를 얼싸안았고, 백희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백희나가 투지를 불사르며 우승하는 장면은 외환위기인 대한민국에 희망이라는 불씨를 남겼다.

    곧이어 백희나의 US 오픈 우승시상식이 진행됐다.

    “올해 US 오픈의 우승자는 한국의 백희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 속에 백희나 선수가 활짝 웃으며 시상식에 올랐다. 자신의 몸보다 큰 트로피에 키스한 후 백희나는 활짝 웃으며 트로피를 높게 치켜들었다.

    “백희나 선수. 정말 축하드립니다. 소감이 무척 궁금하군요. 지금 기분 어떠세요?”

    “너무 좋아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가슴 벅차 경황이 없어 보이는 백희나를 배려해 아나운서가 재빨리 질문을 바꿨다.

    “지금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음. 가족들 그리고 제 캐디를 봐준 연주 언니, 그리고 제가 골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준 파인의 식구들과 박주혁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 물론 나이스도요.”

    최대 스폰서인 나이스보다 파인을 먼저 소개한 백희나는 스스로도 조금 민망했는지, 윙크하며 혀를 쏙 내밀었다. 질문하던 아나운서가 백희나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함께 웃어버렸다.

    인터뷰 와중에 아니카 쇠렌스람을 포함한 동료 골프선수들이 백희나에게 샴페인을 뿌리는 통에 인터뷰는 더 진행할 수 없었다. 인터뷰는 백희나가 돌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꺄아아!”

    #

    최효정 여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메르헨의 앞접시에 갈비를 올렸다.

    “많이 드세요.”

    “가삼합니다. 어머니.”

    “호호호.”

    어머니라는 말이 그렇게 좋았는지, 최효정 여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박주혁은 다시금 최효정 여사를 환기시켰다.

    “어머니, 투자자이십니다.”

    하지만, 최효정 여사는 박주혁을 쳐다보지 않고 건성으로 답했다.

    “응.”

    뭐가 그리 좋은지,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은 시종일관 까르르 웃고 있었다. 서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다. 뭔지 모를 불길함에 박주혁은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에게 그만 일어나자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메르헨, 많이 들어요. 필요하면 더 시킬까요?”

    “괘차나욜.”

    “아이고, 참 맛있게도 먹네.”

    “어머니도 드세욜.”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박주혁은 쓴 입맛을 다시며 인제 그만 일어나자고 보챘다.

    “아직 다 안먹었는데 왜 그러니?”

    “주혁 씨, 급한 일 생겼어욜?”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의 반응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박주혁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리가 점점 더 불편해지려는데 때마침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박주혁 입니다.”

    “꺄아아아아!”

    돌고래 소리에 박주혁이 휴대폰을 귀에서 얼른 떼고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주혁을 바라봤다. 아직도 휴대폰에서는 돌고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박주혁은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속삭이듯 말했다.

    “백희나 선수가 우승했나 봅니다.”

    “뭐? 맞아, 오늘 US 오픈 마지막 날이었지? 우승했데?”

    최효정 여사도 관심이 많았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백희나 선수를 알고 있던 메르헨도 눈을 끔벅이며 박주혁을 빤히 쳐다봤다. 박주혁은 휴대폰을 다시 귀에 가져갔고,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은 침을 꼴깍 삼키며 박주혁의 입만 쳐다봤다.

    “희나니?”

    “오빠아! 나 우승!”

    “그래! 축하해 연장에서 아주 심장이 쫄깃하더라.”

    “보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정말 축하해. 대단하고 장하다!”

    분명 갈비를 뜯고 있었는데 보고 있었다는 박주혁의 말에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한창, 백희나를 북돋아 주고 전화를 끊었는데, 다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박주혁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에게 양해를 구한 후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저 심 과장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트래픽이 몰려서 서버가 또 다운되기 직전입니다.”

    박주혁이 심영찬 과장에 뭐라 지시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려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중년의 한 남성이 소리쳤다.

    “혹시! 백희나 선수를 스폰하는 기업의 대표님이십니까?”

    난데없는 사람의 난입에 모두 눈을 끔벅일 때 박주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남성이 괴성을 지르며 박주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영광입니다. 제가 이 가게 사장입니다. 오늘 음식값 받지 않겠습니다. 백희나 선수를 키운 중요한 분께 음식값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갈비집 사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박주혁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격하게 흔들었다. 박주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뭐라 말하려 했지만, 사장은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여기 갈비 10인분 추가, 아니 20인분을 포장해줘!”

    “사장님.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경사를 만드신 분인데 이 정도로도 부족합니다!”

    사장은 막무가내였다. 사장이 환호하며 방을 나간 후, 박주혁은 그제야 심영찬 과장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백희나 선수가 우승했나요?”

    “네, 조금 전 그렇게 된 것 같네요. 심 과장, 아무래도 오늘은 서버가 위태로운 것을 즐겨야 할 것 같네요···.”

    “예?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백희나 선수가 우승 소감에서 우리 회사를 언급한 것 같아요.”

    “···아!”

    그제야 심영찬 과장이 갑자기 트래픽이 폭증한 이유를 이해하겠는지 탄식과도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심영찬 과장과 통화를 끝내고 박주혁이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에게 고개를 돌렸는데, 당황하여 입을 쩍 벌렸다.

    “뭡니까?”

    최효정 여사와 메르헨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빙글빙글 돌며 소리쳤다.

    “백희나 만세!”

    “만쉐!”

    “박주혁 만세!”

    “만쉐!”

    박주혁은 고개를 떨구고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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