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우린 그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강서구 내발산동,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대회의실.
박주혁과 심영찬 과장 그리고 홍자가 김상호 회장과 저작권협회 이사진들 앞에 섰다. 박주혁이 먼저 상체를 숙여 인사한 후 직원들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이쪽은 개발팀의 리더인 심영찬 과장이고, 사운드바다를 담당하는 홍자 프로그래머입니다.”
박주혁의 소개에 따라, 심영찬과 홍자가 인사를 했고 협회 이사진이 박수를 쳤다. 이런 제안을 수도 없이 받아봤을 터. 그들의 시선에 의심이 가득했다.
“먼저, 심 과장이 파인랭스가 개발 중인 전반적인 흐름을 설명하겠습니다.”
박주혁은 심영찬 과장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이사진들과 함께 자리했고, 홍자가 노트북을 조작해 스크린을 넘겼다.
“안녕하십니까? 개발 총괄 심영찬 과장입니다. 파인랭스는 ‘파인’이라는 검색엔진을 만들어 런칭을 준비 중입니다. 검색엔진은 현재 한국에서 서비스 중인 ‘야이후’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심영찬 과장의 설명에 이사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인터넷을 좀 만져본 사람들일 터. 나머진 눈만 깜박이며 심영찬 과장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이사님들이 가장 궁금해하실 사운드바다는 검색엔진인 파인과 연동하여 Mp3 파일 탐색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제목, 가수명, 작곡가, 작사가 또는 음악의 장르와 시대별로 검색할 수도 있죠.”
심영찬 과장이 홍자에게 눈짓했고, 곧 스크린에 하늘색 계열의 시원한 사운드바다의 메인 화면을 열었다.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가 연상되는 사운드바다의 디자인에 김상호 회장과 몇몇 이사들이 눈을 살짝 키웠다.
“지금은 임의의 곡들로 채워져 있지만, 검색창 바로 밑에 이 차트는 고객들의 구매수에 따라 순위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규 음반이 출시할 경우, 이곳에 앨범 자켓과 함께 소개됩니다. 최대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심영찬 과장의 설명에 협회 이사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까지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다른 많은 업체와 비교해도 이사진들의 분위기를 볼 때 파인랭스는 수위권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었다.
“기본적인 레이아웃과 기능을 설명해 드렸고, 이사님들께서 가장 궁금해하실 결제와 DRM을 설명하겠습니다. 홍 프로그래머님?”
심영찬 과장이 마이크를 홍자에게 넘겼고, 범생이 공대생 홍자가 마른침을 삼키며 앞으로 나섰다.
“아, 안녕하십니까? 사운드바다 개발을 담당한 홍자라고 합니다. 현재 저작권협회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Mp3 파일들의 무분별한 유출일 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운드바다의 파일은 일반 MP3 파일과는 조금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홍자가 심영찬 과장을 살짝 쳐다보자, 사운드바다 플레이어가 화면에 나타났다.
“이건, 사운드바다의 메인 플레이어입니다. 돌디 사운드가 탑재되어 풍부한 음을 즐길 수 있죠. 각설하고, 플레이리스트를 보시면 고객이 듣고자 하는 파일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조금 다른 점이 있는데요.”
홍자가 이어 설명하려는 데 김상호 회장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확장자가 Mp3가 아닌데?”
“맞습니다. 사운드바다에서 구매한 음악파일은 확장자가 Fin으로 사운드바다 이외의 플레이어에서는 재생할 수 없습니다.”
“오?”
김상호 회장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사를 내뱉었고, 홍자가 심영찬 과장을 향해 손짓하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금 재생한 음악이 Fin 파일을 사운드바다에서 실행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음악파일이죠? 이제 같은 Fin 파일을 윈엠프에서 실행해 보겠습니다.”
홍자의 말에 심영찬이 다음 스크린을 불러 윈엠프에서 Fin 파일을 실행시켰다.
- 띵!
경고음과 함께 팝업이 떴다.
[알 수 없는 파일 형식입니다.]
“오오.”
이사진들이 놀랍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을 때 누군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확장자를 변경하거나, Fin 파일을 해킹하면 Mp3와 같은 것 아닙니까?”
“네, 이제 그 부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심영찬이 확장자를 단순하게 변경하는 것과 인코딩하여 mp3로 파일을 변화하는 장면을 보여 준 후, 윈엠프에서 변환된 파일을 실행시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중후한 남성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멘트가 출력되었다.
[이 파일은 불법으로 변환된 파일로 재생이 불가합니다.]
“이럴 수가!”
이사진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하자, 홍자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변환한 파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자의 말에 심영찬이 변환한 파일을 윈엠프에서 실행시켰다.
[이 파일은 불법으로···.]
역시 같은 멘트가 출력되자, 회의실이 웅성거렸다.
“저, 저런 기술이···!”
“저렇게 한다면, 불법유통을 막을 수 있겠습니다.”
“확실히 그렇긴 한데, 너무 적대적인 프로그램 아니겠습니까? 고객들이 사운드바다를 선택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일입니다.”
이사진 중에도 제법 날카로운 사람이 있었다. 박주혁이 그런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렇기에 협회 차원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저작권을 확실히 보호받고 싶으시다면 이만한 솔루션이 없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사운드바다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해야만 저작권 보호라는 큰 과실을 맺을 수 있는 겁니다.”
김상호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사진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 우리를 찾아온 개발사들이 몇이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처음인 것 같군요.”
김상호 회장의 말에 반박할 사람은 없었다. Fin 파일이 위변조되면 다른 멘트가 재생되는 것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천재 프로그래머 윤태현의 기지와 실력이 그대로 녹아있는 멋진 한방이었다. 해킹 기술을 도입한 것이었는데 효과가 엄청났다. 가뜩이나 Mp3로 불법유통에 골머리가 아팠는데, 이런 기술이 있다는 사실에 협회는 축제 분위기였다.
#
브리핑이 끝나고 박주혁은 김상호 회장과 별도로 만났다. 김상호 회장은 웃는 얼굴로 박주혁에게 말했다.
“박 대표. 호언장담하더니 정말 대단한 것을 들고 오셨군요.”
“과찬이십니다.”
“아니, 정말 우리의 고민을 깨끗하게 해결하는 제안이었습니다.”
김상호 회장의 말에 박주혁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이제,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던 파격적인 저작권료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하하하. 박 대표는 앞만 보시나 봅니다?”
김상호 회장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박주혁은 웃을 수 없었다. 불현듯 메르헨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인생의 최종 목표가 뭐예요?’
중요한 이 순간에 왜 메르헨의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박주혁의 머릿속이 일순간 복잡해졌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김상호 회장과의 면담이 더 중요했기에 박주혁은 다시 김상호 회장의 말에 집중했다.
“1년간 저작권료 면제하면 어떻겠습니까? 사운드바다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데 필요한 시간으로는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김상호 회장의 얼굴에 번지는 옅은 미소를 박주혁은 놓치지 않았다.
‘흠. 1년이라···. 미끼군.’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저작권료를 면제해준다는 것은 확실히 파격적이긴 했다. 문제는 그 후였다.
“그 후에는 어떻게 산정하실 생각인가요?”
마이튠즈는 한 곡에 99센트였다. 소득수준 차이를 생각하면 한국에서는 한 곡에 300원 내외가 적당할 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던 박주혁에게 김상호 회장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1년 뒤에 사운드바다가 저작권 보호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면 그때 협상해 보도록 합시다. 말하자면 협회 차원에서 파인랭스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역시···.’
언뜻 듣기에는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주혁의 좁혀진 미간은 다른 부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운드바다가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하여, 고객이 많아지고, 음원 다운로드 수가 많아질 것이다. 그럼 자연적으로 협회는 높은 저작권료를 요구하지 않겠나? 박주혁은 이런 리스크는 품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박주혁이 미간을 피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작권료 1년 유예라는 파격적인 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1년 뒤 저작권료를 협상하자는 안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김상호 회장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김상호 회장이 웃으며 손을 내밀려 할 때 박주혁이 정색하며 말했다.
“하지만, 1년 뒤 저작권료 협상은 저희에게 무척 불리한 얘기 같군요.”
“음? 박 대표. 그게 무슨···?”
박주혁은 김상호 회장의 말을 잘랐다.
“회장님께서 그러실 리는 없겠지만, 사운드바다가 시장에 잘 안착하여 많은 고객을 확보했을 때가 염려스럽습니다.”
“으음? 시장에 잘 안착하면 협회나 파인랭스나 양쪽 모두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씀이지만, 그 과정에 사람의 욕심이라는 변수가 빠졌습니다.”
“···!?”
박주혁의 말에 김상호 회장의 미간이 패였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죠?”
박주혁의 언사가 언짢았는지, 김상호 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박주혁은 덤덤하게 답했다.
“1년 무료를 앞세워 시장의 저변을 확대한 후 협회가 높은 저작권료를 부과하면 저희로서는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회장님의 임기도 모르는 일이고요. 지금 확답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향후 다운로드가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고려하면 말이죠.”
“스트리밍?”
“예. 라디오처럼 인터넷망을 이용해 듣기만 하는 서비스를 뜻합니다.”
“그,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사실, 불법유통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죠.”
확신에 찬 박주혁의 말에 김상호 회장이 턱을 쓸며 신음했다.
“으음. 저작권료에 대한 확답을 달라···.”
“예. 회장님도 눈치채셨겠지만, 사운드바다는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점을 참작하여 저작권료를 책정해주시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불확실성을 가지고 사업을 추진할 수 없습니다.”
말이 좋아 부탁이지, 협박이었다.
“크으음.”
김상호 회장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솔직히 1년 후 사운드바다의 성장도에 따라 저작권료를 달리 책정하겠다는 욕심이 김상호 회장의 저변에 깔려있긴 했다. 그리고 그걸 박주혁이 제대로 간파해 이렇게 카운터를 날리니 난감할 수밖에···.
결국, 박주혁은 공영방송이 지급하는 요율과 동일한 저작권료를 부과한다는 약조를 받고서야 김상호 회장과 웃으며 악수를 했다.
김상호 회장은 당차게 걸어 나가는 박주혁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서운 놈이네. 정말 20대 맞아? 내 속을 훤히 보고 있구만? 허허.”
#
인수 절차가 마무리된 파인테크의 대회의실.
박주혁이 이인우 디자인센터장과 함께 입장하자, 회의실에 있던 전 SJ 텔레텍 임원들이 기립했다. 어디서 많이 봐온 풍경이었다. 박주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임원들에게 인사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DD 자동차에 처음 출근했을 때는 임원들이 정문에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지···.’
이런, 허례허식(虛禮虛飾) 보다는 실력으로 말하는 것을 박주혁은 더 좋아했다. 파인테크도 같은 길을 갈 것이고···. 박주혁은 상석에 서서 임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오늘부로 파인테크를 이끌게 된 박주혁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전 인우디자인의 사장이셨던 이인우 디자인센터장입니다.”
박수로 환영을 받은 후 박주혁은 앞으로의 비젼에 대해 설명했다.
“SJ 텔레텍은 휴대폰 부품 제조회사였죠? 이제는 부품이 아닌 완성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될 것입니다.”
SJ 텔레콤이 추진했던 일들을 알고 있었기에 임원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박주혁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는 다들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터치스크린 휴대폰입니다. 이름하여, 스마트폰. 휴대폰과 컴퓨터가 합쳐진 새로운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휴대폰 부품을 생산하던 임원들은 박주혁의 말이 기가 찼다. 뜬금없이 휴대폰과 컴퓨터를 합친 새로운 개념의 폰을 만들겠다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임원들의 표정이 썩어가자,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안되리라 생각하시는군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임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박주혁을 차갑게 쳐다봤다.
“제가 DD 자동차의 대표라는 것은 아실 겁니다. 여기 계시는 임원 중에 DD 자동차가 전기차를 만들 거라고 생각하신 분 계십니까?”
“···.”
순간적으로 임원들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아무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실제로 DD 자동차가 전기차로 세계의 이목이 쏠린 회사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최종 목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린 그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박주혁이 정색하며 말하자, 임원들의 눈에 알 수 없는 이채가 서렸다. 왠지 박주혁과 함께라면 정말 그렇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