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98화 (98/136)
  • 098화 조각들은 모였다.

    통상산업부 대회의실.

    장관의 한마디로 인해 회의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장관님!”

    “55개 기업 퇴출입니다. 그걸 안 주사의 뜻대로 하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장관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입가는 파르르 떨렸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장관의 이마에 힘줄이 불쑥 솟았다. 장관은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 탁!

    “이 사람들이!”

    장관의 호통에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장관은 잠깐 심호흡을 한 뒤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구 하나 똑바로 된 의견 낸적 있었습니까? 어떻게든 기업에 유리한 쪽으로 얘기하는 너, 너, 너!”

    장관의 손가락에 지목된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떨궜다.

    “안 주사의 말에 틀린 점이 있다면 반박을 하세요. 안된다고만 하지 말고! 55개 기업이 어떤 기업인지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하여간 썩어빠져서···! 기업들의 돈 놀이에 휘둘린 결과가 눈앞에 있음에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쯧쯧쯧.”

    장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모를 것 같았습니까? 아직도 위기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당장 사직서를 가지고 오세요! 명명백백히 밝힐 수 있으나, 그러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당신들이 잘나서? 아니죠. 착각하지 마세요. 지금 같은 시기에 더 큰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참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장관의 서슬 퍼런 말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안태희 주사를 포함한 몇몇 직업정신이 투철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리고 안태희 주사.”

    “네!”

    “그대를 TF의 수장으로 임명할 테니, 퇴출 기업 리스트 다시 정리하여 보고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이상 끝! 모두 안태희 주사를 돕도록! 알겠습니까?”

    “...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자, 장관이 미간을 와락 좁히며 버럭했다.

    “목소리가 작다!”

    “예!”

    “깨끗하게 합시다. 깨.끗.하.게! 언제까지 통상산업부에서 구린내가 나게 할 겁니까?”

    장관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통상산업주 사무관과 주사들이 모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큰일 났네.”

    “이거, 어쩌냐···.”

    난감해하는 와중에 안태희 주사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TF를 구성할 사람들을 이 자리에서 뽑겠습니다.”

    안태희 주사의 말에 모두 눈을 끔벅이며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안태희 주사는 이제 일개 주사가 아니었다. 장관이 직접 지명한 TF 장으로 막강한 힘이 실리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더군다나, 장관이 못 자르는 것이 아니라, 자르지 않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55개 퇴출 기업을 손수 정리한 안태희 주사의 성격을 미뤄보건대 구린내 진동하는 사무관, 주사들의 리스트를 가지고 있지 말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직장 동료들을 바라보며, 안태희 TF 단장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악한 저승사자의 웃음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은 뒤가 캥기는 사람들이겠지?

    “제가 뽑는 것보다는 자원 받는 것이 좋겠군요. TF에 함께 하실 분들은 손들어 주십시오.”

    - 우르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손을 드는 모양새가 제법 웃겼다. 하지만, 안태희 단장은 이미 마음속에 정해둔 사람들이 있었다. 장관의 큰소리에도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었던 바로 그들 말이다.

    #

    박주혁은 메르헨의 팔에 끌려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유명한 맛집이었다. 메르헨이 그 사실을 알고 온 것인지 의문이 들 찰나, 메르헨이 손을 번쩍 들더니 소리쳤다.

    “리모!”

    예상하지 못한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메르헨? 방금, 이모라고 한 거예요?”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박주혁은 배시시 웃는 메르헨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리모, 두로취기 리인분이요.”

    “두루치기 2인분, 알겠습니다. 근데 아가씨 한국말 엄청 잘하시네요?”

    “가삼합니다.”

    언제 이렇게 한국말을 연습했단 말인가? 박주혁이 놀랄틈도 없이 메르헨은 주문을 추가했다.

    “아, 리모! 쏘주 하나, 맥쥬 2개.”

    “하이고, 완전 한국 사람이네···?”

    이모님이 혀를 내두르며 주방으로 향했다. 박주혁도 역시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아니, 메르헨 한국말은 언제 배웠습니까?”

    “손슈찬에게도 도움도 받았고, 따로 공부했죠. 한국에서 맛있는 거 먹으려면 필요해서요.”

    메르헨이 혀를 낼름 내밀더니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미소 지었고 박주혁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냥 저에게 말씀하시면···.”

    “미스터 박은 바쁘잖아요. 그리고 내가 한국말 배우면 미스터 박이 더 편하지 않겠어요?”

    “잠깐···? 설마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 한국어 수업이었나요?”

    박주혁의 물음에 메르헨이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영어로도 소통에 부족함이 없었기에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메르헨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를 탐구하고 공부한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 사이, 이모님이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테이블에 올렸다.

    -자글자글.

    돼지고기의 고소한 냄새와 김치 특유의 향이 더해져 침샘이 자극돼 하관이 살짝 아파왔다. 메르헨은 두루치기를 쳐다보며 소주와 맥주를 박주혁에게 건네며 말했다.

    “미스터 박. 소맥! 플리즈.”

    박주혁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맥을 만들었다.

    “건배!”

    잔이 몇 차례 오가고, 메르헨이 취했는지 발그레해진 얼굴로 박주혁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미스터 박의 목표는 뭐에요?”

    “예?”

    “인생의 최종 목표요.”

    “음···.”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이 소맥 잔을 들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처음 목표는 파인랭스를 망하지 않게 경영하는 것이었다. 파인랭스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 후부터는 파도에 휩쓸린 듯 앞만 보고 달렸다. 그리고 망해가는 DD 자동차를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냈다. 앞으로 스마트폰도 분명 그렇게 흘러갈 터. 그런데 그 후로는?

    메르헨의 질문에 박주혁의 가슴에 큰 울림을 만들었다.

    ‘내 인생의 최종 목표라···.’

    파인 그룹을 만들어 재계에 진출하는 것 외에 인생의 최종 목표... 박주혁이 말없이 소맥을 들이키며 고민하자, 메르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이 천천히 눈을 떠 메르헨을 바라봤다. 박주혁의 눈을 마주하며 메르헨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지금이야. 열심히 앞만 보고 달리고 있지만, 종국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아닐까요? 나와 남편을 똑 닮은 그런 아이들과 행복한 주말···. 노년에는 백발을 휘날리며, 남편과 여행도 다니고···. 소맥도 마시고?”

    마지막 말에 힘주어 말했지만, 박주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메르헨을 바라보고 있었다.

    ‘벤타의 차기 회장의 꿈이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는 것이라고?’

    소박하고 평범했다. 하지만, 박주혁은 알고 있었다. 그 소박하고 평범한 것을 이루기가 쉽지 않음을 말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꿈이지만, 박주혁은 이미 한 번 실패하지 않았던가?

    오리가 물 위에 유유자적하게 떠 있으려면 물속에서 쉬지 않고 발을 놀려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평온해 보이지만,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메르헨의 목표라는 것이 그러한 것이었다.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은···. 그런 꿈 말이다.

    박주혁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입에서 소맥잔을 떼며 말했다.

    “쉽지 않은 목표네요.”

    “그런···가요?”

    “예. 누구나 생각하는 평범한 목표 같지만, 쉽지 않죠. 왜 많은 사람이 이혼하고, 힘들어하고 하겠습니까? 서로 다른 환경에 있던 사람들이 만나 가정을 꾸리고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박주혁이 진지하게 말하자, 메르헨이 눈을 끔벅이며 박주혁을 바라봤다.

    “미스터 박···?”

    우수에 찬 박주혁의 눈 때문일까? 메르헨은 더 말을 잊지 못했다. 박주혁은 천천히 소맥을 마시며 다시 눈을 감았다. 메르헨이 그런 박주혁을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와 함께 늙어가면 안 되는 건가요···?’

    혀끝에 맴도는 말을 그녀는 차마 꺼내지 못했다.

    #

    금융감독위원회로 자리를 옮긴 최재헌 위원장과 안태희 TF 단장은 조율 끝에 최종 퇴출 55개 기업을 확정해 발표했다. 금융감독위원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정부의 실력행사가 시작된 것이다.

    수많은 기자 앞에서 최재헌 위원장은 차분한 말투로 55개 퇴출 기업리스트를 발표했다.

    미래 그룹 산하 4개사, 삼송의 4개사, 극성의 4개사, 태우 5개사, SJ 3개사 그리고 DD 자동차의 계열사 중 하나인 아범석유도 포함됐다.

    “자체 구조조정을 실행하기로 하였지만, 성과가 미비해 금감위에서 강제 구조조정을 추진합니다. 금감위의 안을 거부할 때는 대출이 중단됩니다.”

    대출 중단이라는 금감위의 강력한 카드에 기업들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DD 자동차에 출근하여 신문을 보던 박주혁은 덤덤하게 신문을 덮었다.

    벤타의 지분이 없었던 아범석유는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DD 자동차가 벤타에 넘어간 상태였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더 많은 계열사가 리스트에 올랐을 것이다. 어차피 아범석유는 매각할 생각이었기에 박주혁은 덤덤했지만, 직원들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사장님!”

    차동진 전무가 헐레벌떡 사장실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박주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호들갑을 떠는 차동진 전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큰일 났습니다. 아범석유가 구조조정 대상에 올랐습니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얼굴로 뛰어 들어온 차동진 전무에게 박주혁은 씩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사전 경고도 없이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진정하세요. 어차피 아범석유는 처분해야 할 기업이었습니다.”

    “예? 하지만···!”

    차동진 전무가 입을 달싹이는데 박주혁이 말을 잘랐다.

    “DD는 이제 전기차로 패러다임을 바꿨습니다. 석유화학은 저희가 다룰 사업 분야가 아님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요.”

    “···.”

    박주혁의 말에 차동진 전무가 순간 멍해져 눈을 끔벅거렸다.

    “화,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머쓱해진 차동진 전무가 사장실을 나가는데 박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사장님. 심연찬 과장입니다.”

    “심 과장. 무슨 일입니까?”

    “태현 군이 일을 냈습니다!”

    “···! 태현 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박주혁이 놀라 소리치자, 심영찬 과장이 당황하며 답했다.

    “아, 그게 아니라 검색엔진이 성능이 좋아졌습니다.”

    “아! 그래요? 고글 소스 코드 분석이 이제야 끝난 건가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서비스해도 될 정도입니다!”

    심영찬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박주혁은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나이스 타이밍.’

    고글이 검색엔진으로 시장에 등장한 것이 3개월 뒤고, 넥스트는 자체 검색엔진이 없는 상태였다. 네버에게는 엔진이 있었지만, 아직 삼송 산하 벤처기업이라 본격적인 서비스 전이고 말이다.

    추후, 모바일OS와 검색포털이 연계되어야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였다. 박주혁의 눈에 이채가 서리며 힘주어 말했다.

    “이제 그럼 포털사이트 파인의 오픈을 서두릅시다.”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 과장이 큰소리로 답했다.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스마트폰의 생산기지가 될 파인테크와 포털사이트인 파인, 사운드바다 그리고 개발 중인 모바일 OS인 파인월드까지···. 조각들은 모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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