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96화 (96/136)
  • 096화 사람에 따라 말의 무게가 다르다.

    김상호 회장은 눈을 반짝이며, 박주혁과 이인우 사장을 번갈아 봤다.

    “그러니까 Mp3를 구매해야지만, 휴대용기기에 저장할 수 있단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박 대표님은 저작권료 때문에 날 만나자고 하신 거군요.”

    김상호 회장도 보통 연륜은 아니었는지, 바로 핵심을 짚었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DRM 개발과 플랫폼 개발은 막바지입니다.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저작권 문제를 해결할 환경을 만드는 일인 만큼 협회 차원에서 협조가 필요합니다.”

    박주혁의 숨은 뜻을 간파한 김상호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민을 끝내고, 김상호 회장이 눈을 뜨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아직 실체가 없는 일이니. 개발이 완료되면 그때 다시 한번 얘기해 봅시다. 저도 이사진들과 회의를 해봐야 하는 일이고···.”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이사진들과 자리를 한 번 마련할 테니, 그 프로그램과 DRM 시스템을 시연할 수 있으십니까?”

    “가능합니다.”

    박주혁이 자신 있게 답했고, 김상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이른 시일 내에 그 플랫폼을 보고 저작권료도 협상해보도록 하죠.”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준비해보세요. 정말 저작권 보호가 가능한 환경이라면 내가 파격적인 저작권료를 검토해보겠습니다.”

    파격적이라는 말에 박주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고, 이인우 사장은 미소 지으며 박주혁의 팔을 툭 쳤다. 대박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저작권협회를 나오자마자, 이인우 사장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박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퍼즐이 완성돼가는군요?”

    “아직입니다. 조각은 찾았으나 어디에 맞는지는 아직 모르는 거니까요.”

    “으음···!”

    박주혁의 말에 이인우 사장이 낮게 신음하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오늘따라 앞서가는 박주혁의 키와 덩치가 더 커진 것만 같았다. 가만히 박주혁의 뒷모습을 보던 이인우 사장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생각보다 더 큰 사람이었구나’

    #

    파인랭스 회의실.

    박주혁과 개발팀 전원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사운드바다의 DRM이 표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물음에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스피커폰으로 연결되어 있던 윤태현이 갑자기 소리쳤다.

    “워메! 표준이라니! 좋아부러써!”

    보안 쪽에 관심이 많았던 윤태현이 만들어낸 DRM이었다. 박주혁의 말에 가장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다.

    “DRM은 걱정하지 마시랑게요. 내가 확실허게 만들었응께.”

    “난, 우리 태현 군을 믿고 있었지.”

    “어따, 감사해부러요. 사장 형님.”

    윤태현의 말에 직원들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너무도 구수한 말투 때문이겠지? 박주혁도 피식 웃으며 개발팀원들에게 말했다.

    “저작권협의회에 우리 플랫폼을 시연해야 합니다.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박주혁의 질문에 심영찬 과장이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더니 말했다.

    “로컬에서 시연이라면 지금도 문제없습니다. 다만, 웹상에서 구동되는 것을 시연하는 것이라면···.”

    심영찬 과장이 속으로 계산하려 할 때 박주혁이 말했다.

    “로컬에서 시연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시연 결과에 따라 우리가 협상에 유리할 테니 신경 써서 준비했으면 좋겠군요.”

    “음. 그렇다면 다자인도 입혀서 보기 좋게 다듬어야겠습니다.”

    박주혁과 심영찬 과장은 척하면 척이었다. 회의가 끝내고 사장실로 돌아온 박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박주혁 입니다.”

    “헬로우? 미스터 박?”

    수화기너머로 영어가 나오자, 박주혁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예. 맞습니다. 누구시죠?”

    “아, 저는 나이스의 골프용품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제이슨입니다. 백키나 선수의 에이전트 맞죠? 백키나 선수와 스폰서십을 체결하고 싶은데요.”

    ‘나이스···? 스포츠 용품 업계를 대표하는 그 나이스?’

    박주혁이 눈을 살짝 키우며 휴대폰을 귀에 밀착시켰다.

    스포츠 업계에서 나이스와 스폰서십을 체결한다는 것은 곧 슈퍼스타라는 것을 뜻했다. 우선 나이스가 개나소나 계약하는 업체가 아니었고, 스폰서십의 규모가 다른 업체와 규모가 달랐다. 물론, 백희나의 경우 이제 막 LPGA에서 1회 우승한 신예라 슈퍼스타급 대우는 아니겠지만, 나이스가 백희나에게 투자가치가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나저나 에이전트라니? 파인랭스는 그저 백희나를 후원하는 작은 스폰서일 뿐인데···.’

    박주혁이 뭐라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데 제이슨이 말을 이었다.

    “백키나 선수가 미스터 박과 얘기하라고 하라며 연락처를 줬습니다.”

    “예? 아, 그랬군요. 말씀하시죠.”

    “나이스의 제안을 이메일로 보내드릴 테니 검토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이슨의 당당한 말투에서 스폰서십 계약 내용이 상상을 초월할 것만 같았다. 졸지에 에이전트 업무를 하게 돼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뿌듯하기도 했다. 계약을 검토하고 번역해주는 것도 파인랭스가 하는 일 중 하나였으니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백희나가 파인랭스를 전문 에이전트로 나이스에게 소개했다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알겠습니다. 검토 후 회신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박. 좋은 소식 기대합니다.”

    박주혁이 막 전화를 끊으려는데, 제이슨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말했다.

    “아참! 미스터 박. 백찬우 선수가 전화 한번 달라고 하더군요.”

    “예? LA 다져스의 백찬우 선수요?”

    94년 LA에 처음 왔을 때···. 더는 말하지 않겠다. 백찬우 선수가 정말 대단한 국민적 영웅이라는 것은 맞지만, 국가대표급 투머치토커라는 것 또한 명백했으니···. 제이슨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꼭 전화해야하는 건 아닙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박주혁이 웃음을 참으며 백찬우 선수의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전화를 끊고 박주혁은 수첩에 적힌 백찬우 선수의 전화번호에 동그라미를 치며 중얼거렸다.

    “백찬우 선수가 희나에게 뭔가 조언해주고 싶나 본데···. 전화해 봐야겠지?”

    사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레전드 선수와 통화를 한다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겠나? 다만, 귀에 습기가 찰 것이라는 각오는 해야 할 터···. 박주혁의 고민은 짧았고 수화기를 들었다.

    “헬로우?”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의 박주혁이라고 합니다.”

    “아아! 백희나 선수의 에이전시라고 전해 들었는데 제 조언이 필요할 것 같아서 연락처를 남겼습니다. 아시죠? 제가 94년도 LA에 처음 도착해서···.”

    시작됐다.

    박주혁은 백찬우 선수의 멈추지 않는 말속에서 백희나의 조언을 찾아 헤맸다.

    “나이스와 스폰서십을 체결하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용품 중 골프채는 받지 마세요. 나이스의 골프채는 아직 실험적인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백희나 선수에게 득이 되는 것들만 취하라는 것입니다. 스폰서십 계약금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에이전트의 수익과 직결되겠지만, 그래도 알고 계시죠? 스폰서십 계약보다 백희나 선수가 우승해서 벌어들이는 금액이 더 많다는 것을 말이죠.”

    계속 듣다 보니 블랙홀에 빠진 듯 헤어날 수 없었지만, 상당히 중요한 말이었다. 대기업 스폰서에 끌려다니기 시작하는 순간, 선수 본인의 재량권이 줄어들게 되고 그건 바로 경기력 하락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제안서를 잘 살펴보고 백희나 선수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하겠습니다.”

    “박주혁 대표님. 참 마음에 드는군요. 제가 94년도 LA에 도착했을 때는 낯선 사람, 낯선 땅 그리고 낯선 음식 때문에 힘들었었는데···. 백희나 선수는 그래도 든든한 에이전트가 있으니···.”

    ‘끊고 싶다.’

    박주혁이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가로저은 후에도 통화는 더 지속됐다. 쉽사리 끊겠다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통화한 후에야 백찬우 선수와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오늘 대화 즐거웠습니다. 백희나 선수를 잘 도와주세요. 그리고 다음에도 통화하고 싶은데 연락드려도 되죠?”

    불길한 마지막 인사말에 박주혁은 쉽사리 답을 못했다.

    #

    사운드바다와 Mp3 플레이어 개발 그리고 모델 D의 런칭 등 바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백희나의 스폰서십까지 체결한 박주혁은 하루하루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던 SJ 텔레콤에서 연락이 왔다.

    “박 대표님. 저 SJ 텔레콤 표태수 입니다.”

    “아, 표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내부적으로 많은 토의 끝에 어느 정도 결론을 도출했는데 한번 만났으면 합니다.”

    표태수 사장의 말투는 차분했고 어떤 결단을 내린 듯했다. 하긴 그동안 크트프리텔과 한국통신 연합과 극성텔레콤, 한설PCS 그리고 신세계 통신이 힘을 합쳐 SJ 텔레콤을 드잡이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 프레임은 갈수록 진해졌고, 그들은 SJ 텔레콤의 독과점도 문제 삼으며 압박했다. SJ 텔레콤도 여론전에 뛰어들어 반박했지만, 국민 정서상 친일 프레임이 씌워진 SJ 텔레콤은 이미지 타격이 불가피했다.

    판세는 파인랭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표 사장님.”

    “어서오세요. 박 대표님.”

    박주혁과 표태수 사장은 악수를 주고받으며 자리했다. 이미 그룹차원에서 결단이 내려진 상태라 표태수 사장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박 대표님의 제안을 심도 있게 논의한 결과···.”

    이미 결과는 알 것 같았고, 이제는 머니게임이겠지.

    “그렇군요. 잘 결정하신 것 같습니다. 일본 자본과 합작은 국민 정서에 부합되는 일은 아니죠. 특히나 지금 같은 IMF 시대에 말입니다.”

    “으음.”

    표태수 사장은 할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꾹 참았다.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고 이미 결정은 났으니 말이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니 박주혁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수 금액은 얼마로 책정하셨습니까?”

    “SJ 텔레텍은 교세라와 총 380억 원을 출자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렇군요.”

    벤타 그룹의 투자 의사도 있으니 무리 없는 금액이었다. SKY가 런칭되면 기업가치는 10배 이상 오를 터. 남는 장사였다.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표태수 사장이 의외의 제안을 해왔다.

    “금액적 부담이 있으실 테니, SJ 텔레콤에서 20%의 우호 지분을 투자하면 어떻겠습니까? SJ 텔레텍에서 SJ 텔레콤에 우선 공급한다는 조건을 넣는 대신에 말이죠.”

    “으음. 저의 제안은 SJ 텔레콤 향 전용 모델을 별도로 만든다는 것이었는데요?”

    “박 대표님. 개발비, 금형비 등 SJ 텔레콤 향을 별도로 만드는 것보다 SJ 텔레콤에 먼저 공급하는 것이 더 유리한 조건입니다. 아시겠지만, SJ 텔레콤은 이동통신 시장의 거진 과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쁜 조건이 아닙니다.”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6개 통신사가 난립한 시장 속에서 SJ 텔레콤의 점유율이 압도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정경유착으로 먼저 시작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말이다.

    “얼마나 먼저 공급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모델에 따라 협상하는 것으로 하시죠.”

    ‘이것 봐라?’

    박주혁은 SJ 텔레콤이 꼼수를 쓴다는 느낌을 받고 미간을 좁혔다. 표태수 사장도 박주혁의 분위기가 변한다는 것을 감지했는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직 어떤 모델이 나올지 알 수 없고, 또 박 대표라면 획기적인 제품이 나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번 조율하겠다는 의미입니다. SJ 텔레텍 입장에서도 나쁜 조건이 아닐 텐데요? 협상 결과에 따라서는 타통신사와 동시 공급도 가능할 테니까 말이죠.”

    박주혁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싸늘한 어투로 답했다.

    “그러니까 지금 간 보시겠다는 거군요?”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뭐 좋습니다. SJ 텔레콤에서도 지분 참여를 하신다고 했으니, 생산될 휴대폰의 물량을 SJ에는 확정 공급하도록 하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박주혁은 표정을 바꿔 씩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만들 휴대폰은 없어서 못 팔테니, SJ 텔레콤에는 확정적으로 물량 공급을 해주겠다는 말입니다.”

    “허! 하하하.”

    표태수 사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반면, 박주혁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언제까지 네가 웃을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말이다. 표태수 사장의 웃음이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린 박주혁은 선언하듯 힘주어 말했다.

    “칼스타와 모델 D를 사기 위해 고객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휴대폰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죠.”

    박주혁의 호언장담에 표태수 사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실제로 칼스타를 사려면 대기 순번을 걸어야 할 정도로 아직도 인기가 높았다. 거기에 모델 D가 더해지며, DD 자동차의 명성은 하늘 높은지 모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만큼 주가도 천장을 뚫을 기세였고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박주혁이 만들어낸 것이었으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의 무게는 매우 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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