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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95화 (95/136)

095화 DRM = 복제 방지기술.

이연호 사무관 덕분에 박주혁은 SJ 텔레콤 표태수 사장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SJ 텔레콤은 박주혁의 안을 보기 좋게 거절했다.

“아, 이 조건으로는 어렵습니다.”

표태수 사장이 난색을 표하며 말하자, 박주혁은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군요.”

“예, SJ 텔레텍이 애초 목표가 SJ 텔레콤에 사용될 휴대폰을 직접 생산하기 위해 설립하는 겁니다.”

표태수 사장은 박주혁의 내민 제안서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 보면, SJ 텔레콤 뿐 아니라, 타 통신사에도 납품하겠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조건으로는 어렵다는 겁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더는 할 말이 없군요. 애초에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SJ 텔레텍을 직접 운영하시지 왜 투자 유치를 하셨을까요?”

“예? 아···. 그야 물론···”

표태수 사장의 다음말은 이미 뻔했기에 박주혁은 그의 말을 잘랐다.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저에겐 투자만 하라는 것 같은데 그럴 수는 없죠. 그만하시죠.”

표태수 사장은 회의실을 나가려는 박주혁의 소매를 붙잡으며 말했다.

“에이. 박 대표님. 조율하기 위해 만난 자리 아니겠습니까? 지금 조건으론 어렵지만, 변경해보잔 얘기를 한 겁니다.”

표태수 사장의 만류에 박주혁이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SJ 텔레텍에서 생산되는 최신형 휴대폰을 SJ에 우선 공급하는 조건은 어떻습니까?”

박주혁이 팔짱을 끼고 고민하자, 표태수 사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쁜 조건이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이동통신 시장의 선두는 저희 SJ 텔레콤입니다. 그 말은 즉, 많은 소비자를 확보할 수 있단 얘기죠.”

틀린 말은 아니다. 심지어 신세계 통신까지 합병하게 되면 시장 지배자적 사업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문제는 그 과정에서 희생될 SJ 텔레텍이었다. 연간 120만대 생산이라는 목줄과 SKY는 SJ 텔레콤 전용 모델이라는 인식이 강해 시장의 저변을 넓히는데 발목이 잡힐 것이다. 그런데도 SJ 텔레콤이라는 확실한 구매처가 있다는 것은 이점이었다.

박주혁은 짐짓 고민하는 척하더니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SJ 텔레텍을 파인랭스가 인수하겠습니다. 대신, SJ 텔레콤 향 전용 모델을 향후 3년간 공급하는 방식은 어떻겠습니까?”

“예? 아예 인수하시겠다고요?”

박주혁은 표태수 사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는지 표태수 사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그건 저도 그룹에 보고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민해보시죠. 시장 지배적 사업자로서 휴대폰까지 직접 생산한다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 이참에 분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로 생각합니다. 물론 인수하더라도 SJ 텔레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전제조건이 붙겠죠?”

“으으음.”

표태수 사장이 고민되는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당장 답할 수 없는 안건이었던 만큼, 박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논의해보시고 다시 만나시죠.”

“그렇게 하시죠.”

공방이 오갔지만, 박주혁이 허를 찔러버리는 바람에 표태수 사장의 공격과 방어가 소용없어졌다. 표태수 사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회의실을 나가는 박주혁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예 인수하시겠다···?’

곰곰히 생각하던 표태수 사장이 뒤늦게 정신이 들었는지 갑자기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아, 저 새끼는 대체 뭐지?”

#

다음 날 아침 구로공단.

토목공사가 끝나고 골조가 올라가고 있었다.

박주혁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한설계 사장이 현장소장과 함께 박주혁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벌써 골조가 올라가는군요.”

“골조는 올해 안으로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한설계 사장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현장 소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시공에 애로사항이나 문제점은 없습니까?”

“현재까지는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골조는 그런데 추후 외관 작업이 살짝 걱정입니다.”

“외관이요? 아, 유리 외벽 말씀이시군요.”

현장소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우직한 사람이었다.

박주혁은 빙그레 웃으며 현장 소장에게 말했다.

“안전사고가 나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진행해주세요. 유리 외벽이지만, 시공에 문제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맞는 말씀이지만, 작업자들도 아직 경험이 없다 보니 염려가 됩니다.”

“그럴수록 더 안전에 빈틈이 없어야 합니다.”

현장소장은 박주혁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보통 시공을 앞당겨달라는 요청은 많이 들어왔지만, 안전에 만전을 기해달라는 건축주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 배려에 시공자들을 대신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여기서 일하시는 한 분 한 분이 모두 한 가정의 가장이자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 아니겠습니까?”

현장소장은 박주혁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는지, 안전모를 벗어 가슴에 올리며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성실 시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구로공단 건설 현장을 시찰한 박주혁은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자, 늘 듣던 라디오가 아닌 속보가 흘러나왔다.

[속보입니다.]

[백희나 선수가 LPGA 진출 후 처음으로 빅맥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LPGA 역사상 한국인 최초입니다. 백희나 선수는 벤타 인비테이셔널에 아마추어 자격으로 우승을 해서 LPGA 참가 자격을 얻은 바 있습니다. 이번 우승으로 백희나 선수는 총상금···.]

박주혁이 눈을 살짝 키우며 뉴스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네, 박주혁입니다.”

“꺄아아아!”

전화를 받자마자, 귀를 때리는 돌고래 소리에 박주혁이 황급히 휴대폰을 귀에서 뗐다.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휴대폰을 바라보던 박주혁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뭐야?”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는데 상대방이 여전히 소리치고 있었다.

“오빠! 나 우승. 꺄아아!”

그제야 박주혁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희나니?”

“오빠! 꺄아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아마도 백연주와 백희나가 얼싸안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박주혁의 말이 들릴지 알 수 없지만, 박주혁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정말, 축하해!”

“오빠, 정말 고마워요!”

“내게 고마울 게 뭐 있나?”

“왜요. 매번 번역도 다 해주시고 제겐 큰 도움이 되요.”

별것 아닌 일에 감사함을 표하는 백희나가 더욱 고마웠다.

“이제 다음 경기는 US 오픈인가?”

“어? 어떻게 알아요?”

“희나 경기는 챙겨보고 있었지.”

“피, 거짓말.”

챙겨본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US 오픈이 다음 경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외환위기에 시름 하는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 백희나의 그 유명한 맨발의 투혼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나?

“선크림 잘 발라. 다리에도 듬뿍듬뿍. 저번에 보니까 많이 탔더라.”

“어머? 보긴 보셨나 봐요?”

“챙겨본다고 했지?”

“피~”

박주혁의 기억 속에 유독 하얗던 백희나의 맨발이 떠올라서 한 말이었다. 세계적인 선수로서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는 하지만···. 박주혁이 뭐라 더 말하려 할 때, 동료 선수들이 백희나를 축하하러 왔는지 수화기 너머로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다음에 또 전화할게요.”

“그래. 선크림 잘 바르고. US 오픈도 기대할게, 긴장하지 말고.”

“알았어요. 고마워요!”

- 딸깍.

백희나와의 요란한 통화가 끝나고 박주혁은 빙그레 웃었다.

“다들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는구나.”

#

박주혁은 휴대폰 제조업에 진출을 타진하면서도 Mp3 플레이어 개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늘은 프리즘 형태의 Mp3 플레이어의 목업이 완성되어 이인우 사장과 만났다.

“목업은 잘 빠졌네요. 그런데 좀 두툼한 것 아닌가요?”

“역시 좀 그렇죠? SMT 업체에 문의했는데 기판을 이보다 작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고 해서 말이죠.”

“그럼 다른 업체를 찾으셔야죠. 디자인에 맞춰야지, 타협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두꺼워진다면 처음 이 사장님이 디자인한 Mp3 플레이어와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후우. 다시 한번 SMT 업체를 찾아보겠습니다.”

이인우 사장이 수첩에 박주혁과 나눈 얘기를 적으며 말했다.

“소프트웨어의 개발 성과는 어떻습니까? 하드웨어를 만들어도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껍데기인데요.”

“지금도 테스트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예 음질 좋은 오디오까지 셋팅해놓고 청음하고 있더군요.”

“청음까지요? 그냥 음악 재생하는 정도면 되는 것 아닐까요?”

이인우 사장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Mp3 플레이어 자체에서 음색을 보정하고 최적의 음질을 경험할 수 있도록 보조까지 해야 제대로 된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야 사운드바다 플랫폼까지 연동해서 소비자들이 사용할 테고요. 거의 막바지긴 한것 같던데···.”

박주혁이 말 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정확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말이다.

“손 과장. 홍자씨 좀 바꿔줘요.”

“네! 사장님. 잠시만요.”

“사장님. 전화 바꿨습니다.”

“아, 홍자씨. 사운드바다의 진행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Mp3 플레이어의 목업이 나왔는데···.”

“모, 목업이 벌써 나왔나요?”

홍자가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주도하여 개발하는 것이 제품화 되는 단계니까 말이다.

“사운드바다의 Mp3 재생은 마무리 단계입니다. 이제 검색인진과 함께 플랫폼화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죠.”

“좋습니다. 그럼 우선 플레이어는 탑재하여 제품화시킬 수 있다는 건가요?”

“플레이어만이라면 가능합니다. 살짝 튜닝을 더 해야 하지만···. 아, 그리고 추후 업데이트를 통해 사운드바다와 연동시키면 되겠죠.”

홍자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수고했어요.”

박주혁을 빤히 보고 있던 이인우 사장이 궁금했는지 엉덩이를 들썩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어떻다고 합니까?”

“지금 당장 Mp3에 탑재해도 무방하다더군요. 먼저 제품화 시키고, 플랫폼은 추후 업데이트로 지원하면 된다는데···. 이 사장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흐음···. 일전에 대표님께서 구상했던 로드맵에 따르면 플랫폼이 가장 중요한 무기인데 그게 빠져야 한다면···. 글쎄요.”

이인우 사장의 대답에 박주혁이 흡족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플랫폼과 연동시키지 않으면 음원 불법유통을 막을 길이 없을 겁니다. 우리는 사운드바다를 통해 정당하게 음원을 사고 들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Mp3를 융통하려면 말이죠.”

“예. 귀에 박히게 들었습니다. 하하하.”

“그랬나요. 오늘 오후 늦게 저작권협회와 미팅을 잡았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함께 가시죠?”

“오. 벌써 그렇게 까지 판을 벌이셨군요.”

박주혁의 추진력에 감탄한 듯 이인우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고, 둘은 강서구에 있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로 향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 김상호 회장은 초면인데도 상당히 고자세를 취했다. 어딘가 언짢은지 표정까지 굳힌 채 말이다.

“파인랭스라고 했던가요? Mp3 플레이어를 기획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박주혁의 대답에 김상호 회장이 얼굴을 더욱 굳히며 말했다.

“Mp3면 인터넷에 떠도는 불법 음원들인데 그걸 휴대용기기에 저장해서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저작권협회는 지금 이 상황에 상당히 민감합니다.”

김상호 회장의 말에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상호 회장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만나 뵙길 청한 겁니다.”

“으음.”

김상호 회장이 박주혁의 말에 의문의 눈길을 주며 낮게 신음했다.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김상호 회장의 눈길을 받으며 박주혁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저희는 Mp3를 합법적으로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환경을 만든다?”

“그렇습니다.”

“···환경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겁니까?”

사운드바다의 시스템을 설명해도 김상호 회장은 이해하지 못할 터. 박주혁은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했다.

“아시겠지만, 음반을 구매하여 Mp3로 추출한 음원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 아주 골치야.”

김상호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박주혁이 이어 말했다.

“저흰 Mp3를 쉽게 내려받을 수 없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저작권료를 지급한 사람만 음원을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예. DRM이라고 하는데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복제 방지기술이라고도 하죠.”

“오오?”

아직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시대, 박주혁은 또 한 번 앞서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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