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92화 (92/136)
  • 092화 모델 D의 존재감.

    SJ 그룹은 오래전부터 텔레커뮤니케이션 부서를 별도로 만들어 기술을 축적할 정도로 통신산업 진출을 염원했다. 그리고 사돈지간인 TW 대통령이 부임하자, 드디어 SJ 그룹은 통신산업 진출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다.

    그 일환으로 TW는 먼저, 공기업인 한국통신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92년에는 공기업이 운영 중인 이동통신에 민간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SJ 그룹이 민간사업자로 선정된다. 세 살짜리 아이가 봐도 TW와 SJ 그룹의 정경유착이었다.

    손쉽게 통신 시장을 장악하려던 TW와 SJ 그룹은 재계와 정치권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그들이 오랜 시간 공들인 작업이었지만, 반대하는 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SJ 그룹은 사업권을 반납하는 형식으로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철회한다. 정부 차원에서 SJ 그룹의 선정을 취소해야 맞는 일이었겠지만, 이상하게도 SJ 그룹은 큰 반발 없이 선심을 쓰는 것처럼 사업권을 반납하는 쇼를 한다.

    그 결과, 포항스틸과 코오론이 신세계 통신을 설립하게 되고 SJ 그룹은 군침을 삼키며 다음 먹잇감을 노려보며 한껏 웅크렸다.

    누가 보면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모양새라고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TW와 SJ 그룹에는 플랜 B가 있었을 뿐 아니라,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TW의 임기가 끝나기 전 플랜 B는 차근차근 진행된다. 지지부진하던 한국통신 민영화에 채찍을 가했고 한국통신의 자회사였던 ‘한국이동통신서비스’의 민영화가 진행된다. 오롯이 SJ 그룹의 이동통신 사업의 발판을 만들어주기 위해 말이다.

    멀쩡히 사업을 진행하던 한국통신의 자회사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별안간 SJ 그룹의 품에 들어가게 된다.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반환하며 선심을 썼던 SJ 그룹이었기에 재계와 정치권은 가만히 그런 상황을 묵인해 버린다. 그게 SJ 텔레콤의 시작이었다.

    신세계 통신이 이동통신망을 구축하고 있을 무렵, SJ텔레콤은 94년도에 ‘한국이동통신서비스’를 인수하자마자, 구축되어있던 이동통신망을 이용해 기다렸다는 듯 서비스를 시작한다. 신세계 통신보다 2년 앞선 시기였다. 어쩌면 TW와 SJ 그룹은 애시당초 ‘한국이동통신서비스’를 인수하는 것이 목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2년 먼저 서비스를 시작한 덕에 SJ 텔레콤은 이동통신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대등한 싸움이 될 수 없는 구조였다. 신세계 통신은 이동통신망을 구축해야 했고 한국통신은 이동통신사업 자체를 SJ 텔레콤에 뺏겼다. 무주공산에 SJ 텔레콤만 있는 상황이니 당연한 얘기일 터.

    급속히 신장하는 이동통신 시장을 바라보며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던 한국통신은 96년도 PCS 사업에 뛰어들어 다시금 이동통신 시장에 발을 내디뎠다. 극성텔레콤과 한설PCS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통신시장은 SJ텔레콤이 이미 블루오션 속에 유유자적 헤엄친 후였다. 한국통신은 새빨간 레드오션에 발을 디딘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한국통신에게 SJ 텔레콤은 눈엣가시였다. 멀쩡히 운영되고 있던 이동통신서비스 회사를 뺏기고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 앙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박주혁은 이 점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한국통신···. 이제는 크트프리텔이죠?”

    박주혁의 질문에 이연호 사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SJ텔레콤에 악감정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 그야 당연히···.”

    이연호 사무관은 잠시 옛 추억에 빠지는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SJ 텔레콤은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였으니까.”

    한국통신 출신인 이연호 사무관으로서도 SJ 텔레콤에게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듯했다.

    “그 감정의 골을 이용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으음?”

    안태희 주사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단순 휴대폰 부품생산업체인 SJ 텔레텍이 일본 자본까지 끌어들여, 휴대폰을 제조한다? 국민들이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이연호 주무관과 안태희 주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장지배적 사업자인 SJ 텔레콤이 휴대폰까지 자체 생산한다고 하면···.”

    “가입자 유치가 쉽겠지. 어떤 경쟁사보다 저렴한 휴대폰을 공급할 수 있을 테니···.”

    이연호 사무관이 박주혁의 말을 자르며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 안태희 주사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이연호 사무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렇다면 작년부터 본격적인 이동통신서비스를 시작한 크트프리텔입장에서는 타격이 클 겁니다.”

    “그렇겠지. 지금도 시장점유율이 낮은 편인데···.”

    안태희 주사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공감대를 형성한 박주혁은 이연호 사무관과 안태희 주사를 똑바로 마주하며 힘주어 말했다.

    “크트프리텔의 모기업이 아직은 한국통신입니다. 공기업의 힘을 이용해서 SJ 텔레텍 설립에 힘을 빼야 합니다. 특히, 일본에 CDMA 휴대폰 제조기술 유출 문제까지 거론하면서 말이죠.”

    박주혁의 말에 이연호 사무관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자본에 대한 안 좋은 감정에 더해 기술 유출의 우려까지 있다라···.”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어필하는 기업은 크트프리텔이 아니라 한국통신이어야겠죠.”

    “뭐 그거야···. 다른 통신 업체들과도 연대를 해야겠군.”

    국가 기간통신망을 쥐고 있는 한국통신만 나서도 충분하겠지만, 다른 통신사에서도 합류한다면 약발은 더 좋을 터.

    이연호 사무관이 감고 있던 눈을 뜨더니 안태희 주사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 같은데?”

    “으음. 한국통신의 힘을 이용한다면···. 압박용으로는 최고지.”

    안태희 주사도 이연호 사무관의 뜻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연호 사무관이 턱을 매만지더니 박주혁에게 말했다.

    “일본이라는 친일 프레임을 씌우고 국내 자본인 파인랭스를 은근슬쩍 소개해주면 되겠군?”

    “맞습니다.”

    “하하하. 박 대표는 이미 다 계획이 있었구만?”

    이연호 사무관이 이빨을 드러내며 호쾌하게 웃었고, 안태희 주사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박주혁이 어떤 속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일본 자본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이연호 사무관과 안태희 주사는 잔을 들며 건배를 외쳤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건배!”

    판은 짜였고, 말들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박주혁이 의도한 대로 말이다.

    #

    98년 5월.

    DD 자동차의 전기차 모델 D의 샘플 차량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그리고 어린이날 즈음하여 ‘상상속의 미래차’라는 컨셉으로 모델 D의 공개 행사를 개최했다. 물론, 모델 D의 내장재를 담당한 챠넬의 럴커펠트와 DD 자동차의 대주주 메르헨도 함께 자리했다.

    귀빈들을 모셔두고 차동진 전무가 마이크를 잡고 굵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세계최초로 자율주행 기능이 탑재된 전기차! 모델 D의 모습을 여러분께 가장 먼저 공개합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어두운 스테이지를 한줄기의 조명이 비췄다.

    조명이 비춘 곳에는 동그란 헤드라이트가 인상적인 모델 D의 전면부 모습이 드러났다. 칼스타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는 하지만, 박주혁의 눈에는 롤스로이스와 함께 세계 3명 차라 불리는 불탈리 플라잉 스퍼의 모습이었다. 불탈리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지상억 소장이 디자인한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현재 불탈리의 디자인과는 또 달랐기에 문제 될 소지는 없었다.

    모델 D의 그릴과 헤드라이트 등 전면부를 잠시 비춘 조명이 꺼지고 다음 조명은 모델 D의 엔진룸과 전면 유리창 그리고 A필러로 이어지는 라인을 비추었다. 동그란 헤드라이트에 이은 호선이 보닛에 부드러운 느낌을 더했고 일직선으로 곱게 뻗은 A필러가 강직함을 더했다.

    “와우.”

    럴커펠트가 하나씩 드러나는 모델 D의 면면에 놀라 감탄사를 내뱉을 때, 직선이 강조된 B필러를 조명이 비췄다. 강렬한 직선들 사이에 C필러로 넘어가는 쪽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곡선이 인상적이었다. 차량 일부를 스팟 형식으로 공개한 후, 박주혁이 차동진 전무에 이어 마이크를 잡으며 크게 외쳤다.

    “여러분. 모델 D 입니다!”

    - 팟!

    조명이 한꺼번에 켜지며, 모델 D가 드디어 공개되었다.

    “와.”

    “저게 정말 우리나라에서 만든 차란 말입니까?”

    “영국 명차라고 해도 믿겠는걸?”

    사람들이 감탄하는 사이 박주혁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시동을 걸어주세요.”

    박주혁의 말과 동시에 모델 D에 앉아 있던 진행요원이 시동을 걸었다.

    - 뷔이잉.

    일반적인 시동음이 아니었다. 마치 영화속에서나 들어보던 UFO의 엔진음이라고 해야 할까? 이질적인 시동음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시동음이···?”

    “저 소리가 시동음이라고? 그럼, 지금 시동이 걸렸다는 거 아냐?”

    “엔진음이 안 들려!”

    덜덜덜, 탈탈탈, 부릉부릉 등 흔히 알고 있던 엔진 부밍음이 전혀 들리지 않자, 사람들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박주혁과 모델 D를 쳐다봤다. 의아함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빛을 즐기기라도 하듯 박주혁은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주행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어,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스테이지에 있는 이 모델이 DD 자동차 주행코스를 달리는 모습입니다.”

    박주혁의 말끝에 스크린에 영상이 흘러나왔다.

    - 뷔이잉.

    이질적인 시동음이 들리고 난 후 모델 D는 들어본 적 없는 주행음을 내며 미끄러져 나갔다.

    - 쇄애앵.

    비공개 행사의 컨셉처럼 미래에서나 볼 수 있는 자동차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모델 D가 천천히 미끄러져 가더니 갑자기 속도를 내며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헛.”

    “오 마이 갓!”

    “스포츠카?”

    순식간에 카메라와 멀어진 모델 D가 점이 되어 사라지자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박주혁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모델 D의 최대 출력은 980마력입니다. 최고 속도 240km, 시속 100km에 도달하는 시간은 2.8초. 세단의 편안함을 지니고 있지만, 슈퍼카 못지않은 성능을 갖췄죠.”

    박주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영상에 모델 D와 맥라렌, 페라리, 포르쉐, 람보르기니와 같은 차들이 출발 선상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모습이 나왔다.

    “슈퍼카들과 드래그 레이스를 펼치는 모델 D를 잠시 감상하시죠.”

    박주혁의 말에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리며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설마, 슈퍼카들을 상대로···?”

    “난 못 보겠다.”

    슈퍼카들 옆에 당당히 서 있는 모델 D를 사람들은 숨죽여 지켜봤다.

    출발 신호를 알리는 버저 음이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고, 그 소리에 맞춰 사람들이 숨을 들이마시고 참았다.

    - 띠!

    출발 신호와 함께 세상을 향한 거대한 엔진음이 합창하듯 울렸다.

    슈포카들을 제치며 먼저 튀어 나간 건 모델 D였다.

    “헉!”

    “말도 안 돼!”

    “맥라렌을!”

    맥라렌을 가뿐히 젖히며 튀어 나간 모델 D에 맥라렌과 합작을 해서 SLR을 출시할 생각이던 메르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했다.

    “이건 꿈이야.”

    마지막에 맥라렌이 모델 D를 가까스로 따라오며 1등으로 들어왔고, 모델 D는 간발의 차로 2위를 차지하는 영상에 사람들이 말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이어진 다음 영상에 사람들의 다리가 풀렸는지 휘청거렸다.

    바로 운전석에 사람이 없이 여러 장애물을 피해 스스로 전진하고 주차하는 모델 D의 영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가장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것은 한민철 교수였다.

    “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한민철 교수는 귀빈들의 넋을 잃은 반응에 흡족한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상이 끝나고, 박주혁은 모델 D를 가리키며 귀빈들에게 말했다.

    “이제, 직접 모델 D를 살펴 보시죠.”

    귀빈들과 기자들이 무엇에 홀린 것처럼 모델 D를 향해 흐느적흐느적 걸어갔다. 그들의 벌어진 입과 한껏 커진 눈이 모델 D가 세상에 던진 메시지가 얼마나 충격적인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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