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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89화 (89/136)
  • 089화 역시 직접 움직여야 하나.

    박주혁은 파인랭스의 사옥을 시안이 나왔다는 한설계 사장의 전화를 받고 바로 강남으로 향했다. 과연 어떻게 시안이 나왔을지···!

    “오셨습니까?”

    한설계 사장이 밝은 미소로 박주혁을 맞이했다. 회의실에 잠시 앉아 기다리는데, 한설계 사장과 직원들이 설계모형을 들고 들어왔다. 총 3개의 시안이었는데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모형이 있었다.

    “오.”

    “마음에 드시는 설계가 있습니까?”

    한설계 사장과 직원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박주혁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박주혁이 한 설계 모형에 손을 뻗자, 곧바로 설명이 시작됐다.

    “이 설계는 기본적인 철골 베이스로 디자인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하여···.”

    그냥 네모반듯한 특징 없는 건물이었다. 덕분에 건축비는 적게 들겠지만···. 설계모형을 한바튀 돌려본 박주혁이 다음 설계모형으로 손을 옮겼다.

    “이건, 젊은 감각을 녹인 설계로···.”

    ‘타워 만드냐?’

    에펠타워 처럼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디자인이었는데 10층부터는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박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지막 설계모형으로 눈을 옮겼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왔던 모형이었다. 그리고 한설계 사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 설계는 제가 직접 한 것인데, 입체감을 주기 위해 층별로 조금씩 각도를 틀어···.”

    ‘멋지다.’

    박주혁이 설계 모형을 들고 천천히 살펴보자, 한설계 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곁에 서있는 직원들의 표정은 점점 굳으며 아쉬움의 타식을 뱉었다. 자기들끼리 무슨 내기라도 한 것 같다. 박주혁은 그들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모형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역시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사장님의 모형이 끌리는군요. 외벽은 유리로 처리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강화유리를 사용할 생각이고 색감은 라이트 블루로···.”

    한설계 사장의 설명을 들으며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12층의 낮은 빌딩이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건물이 나올 것 같았다.

    “좋군요.”

    박주혁의 말에 한설계 사장의 입꼬리가 옆으로 벌어졌고, 직원들은 고개를 떨궜다. 박주혁은 다시 모형으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은데···.'

    휴대폰이 아직 벽돌이라, 카메라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아쉬움이 진해질수록 휴대폰 제조업 진출에 대한 욕망이 자극됐다.

    ‘SJ 텔레텍···.’

    모형을 바라보는 박주혁의 눈빛이 달라지자, 한설계 사장이 당황하며 물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라도?”

    “네?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요.”

    박주혁의 대답에 한설계 사장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박주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설계 디자인 이메일로 받아볼 수 있습니까? 직원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데요.”

    “물론입니다.”

    #

    박주혁은 파인랭스로 복귀하여 회의실로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드디어, 우리 사옥의 디자인이 완성되었습니다.”

    “오오.”

    직원들이 무척 기대된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스크린을 응시했다. 마치 반짝이는 회오리같은 디자인의 건물에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말 저렇게 지을 수 있답니까?”

    “건물 외벽 재질이 뭔데 저렇게 빛이 나는 것 같죠?”

    “와···. 사옥이라니!”

    다들 흥분하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회사라는 것이 직원들과 함께 성장할 때 시너지가 가장 커진다. 파인랭스가 좋은 사례고 말이다. 박주혁은 흡족한 얼굴로 직원들에게 말했다.

    “1층은 카페테리아, 고객 접견실 그리고 프리랜서 번역가들이 작업할 수 있는 워크플레이스를 만들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 직원들도 답답한 사무실을 벗어나거나 집중하고 싶을 때 사용 가능합니다.”

    “우오오.”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2층은 아시아 언어 담당 부서, 3층은 영어와 제3외국어, 4층은 소프트웨어 개발팀과 디자인···.”

    박주혁의 말에 직원들의 입은 점점 더 벌어졌다.

    “그리고, 지하는 구내식당 및 매점 아니면, 직원들의 건강증진을 위한 헬스장도 고려하고 있고요. 파인랭스가 쓰지 못하는 곳은 임대할까 합니다. 특히 탑층은 스카이라운지로 고급 레스토랑을 유치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옥상은 정원으로 꾸밀 생각입니다.”

    “···.”

    박주혁의 설명에 직원들은 침만 삼킬 뿐,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생각만으로도 좋았는지 직원들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때 박영희 팀장이 책상을 두손으로 내리치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모두의 시선이 한순간에 박영희 팀장에게 쏠렸다.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저 건물을 지으려면, 우리가 뭘 해야 할까요?”

    “···!”

    “지금 당장 일합시다. 저 건물에 들어갈 벽돌 한 장도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열심히 할수록 건물이 빨리 지어질 겁니다. 그렇죠?”

    박영희 팀장이 박주혁을 쳐다보며 물었고, 박주혁은 웃으며 답했다.

    “이 건물을 여러분들이 만든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인 것 같군요.”

    “오오오!”

    직원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단체로 소리치더니 기합이 잔뜩 들어간 채로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이런 것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졸지에 직원들을 독려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회의실에서 마지막으로 나가던 박영희 팀장이 박주혁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사장님. 건물 진짜 멋지네요. 빨리 들어가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네. 제가 악역을 자처하겠습니다.”

    박영희 팀장의 눈이 번뜩였고, 박주혁은 눈썹을 치켜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굳이 그럴 것까지는···.’

    박주혁이 막 입 밖으로 너무 다그치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이미 박영희는 뒷모습을 보인 채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에 유독 힘이 잔뜩 실렸다. 그녀는 회의실 문앞에서 직원들을 향해 강단 있게 소리쳤다.

    “자! 모두 파이팅!”

    “파이팅!”

    박영희 팀장의 외침에 다들 하나가 되어 소리쳤다.

    회의실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박주혁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옥을 지을 돈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지만, 차마 박주혁은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 싫었기 때문이다.

    “못 말리겠군.”

    박주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

    98년 2월 중순.

    IMF의 악몽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년 초부터 화의를 신청하는 대기업들에 대한 뉴스가 줄을 이었고, 심지어 대학도 부도가 났다. 그룹들은 해체되었고, 중소기업들은 하루에 100여곳이 넘게 도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호황인 시장이 있었으니···. 바로 정보통신산업이었다.

    정부는 차세대 먹거리로 정보통신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그리고 파인랭스는 정보통신산업의 전문 번역회사 아니겠나?

    극성전자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있음에도 파인랭스는 통신업체들이 의뢰한 문서들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외환위기 초창기 거래절벽이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었다. 극성전자 제닉스 프로젝트로 초반 위기를 잘 넘기고 나니 탄탄대로였다.

    그리고···. 심영찬 과장은 개발팀의 역량을 모아 검색엔진 개발에 열을 올렸다. 홍자를 필두로 한 공대 3인방은 사운드바다 개량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제 파인랭스는 번역만 하는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로 체질이 변화하고 있었다. 어차피 번역은 시간이 흐를수록 MT(기계 번역)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니, 파인랭스의 투트랙 전략은 시의적절했다.

    그런데도 박주혁은 아직 배가 고팠다.

    “시스템 온. 검색, 요키아 심비안.”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총 190건이 검색되었습니다.

    요키아가 PDA에 사용했던 모바일 기기 운영체제로 처음으로 스마트폰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OS였다. 2008년까지는 전세계 6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을 정도로 심비안은 요키아에게 성공을 가져다줬다. 그런 심비안이었지만, 마이애플사의 마이폰과 고글의 드로이드가 출시되며 순식간에 몰락했다.

    심비안의 소유주였던 요키아가 마이OS와 드로이드의 등장에 의기를 느끼고 MS와 손을 잡으며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위기의식도 한몫했겠지만, 사실 요키아가 심비안을 포기한 결정적 이유는 심비안이 90년대 후반 피쳐폰 하드웨어에 맞춰 개발된 운영체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이폰의 등장과 함께 모바일 하드웨어의 성능은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심비안은 그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도 요키아는 마이OS와 드로이드에 시장을 내주고 말았다.

    시스템에서라도 모바일 운영체제에 대한 힌트를 좀 얻어볼까 싶었는데 심비안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었다. 하긴, 한국 시장에서도 수많은 버그와 현지화가 되지 못해 철저히 외면을 받았으니, 번역할 것도 없었겠지···.

    박주혁이 입맛을 다시며 의자에 몸을 맡기며 중얼거렸다.

    “OS는 무리인가···.”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OS는 공개소프트웨어인 심비안뿐이었지만, 심비안은 낙하하는 칼날이었다. 박주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다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잠깐만···. 고글의 드로이드도 개방형 OS였잖아?’

    생각해보니 고글도 드로이드를 제조업체에 무료로 공급하면서 시장을 확대했었다. 그 말인즉슨, 고글 관련 번역 중 소스코드와 관련된 것들이 상당수 있다는 말이었다. 고글이 파인랭스와 번역 업무를 하진 않았지만, 스마트폰 제조사들과 앱 개발회사들은 파인랭스의 고객이었다. 분명 어딘가 맥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쇠뿔도 단김에 뽑아야 한다고 했다. 박주혁은 바로 눈에 불을 켜고 시스템을 뒤지고 또 뒤졌다.

    “검색. 앱 개발.”

    -총 34,210 건이 검색되었습니다.

    한참을 뒤져보던 박주혁이 번역에 소스코드가 함께 있는 문서들을 반출시켰다. 지루한 일의 반복이었지만, 이 퍼즐 조각들을 모은다면 고글의 드로이드와 비슷한 OS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해가 저물어 갔지만, 박주혁은 멈추지 않았다.

    “검색. 엑스노스”

    “검색. 극성전자 스마트폰.”

    ...

    ..

    .

    “으으.”

    박주혁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리에서 기지개를 켰다. 검색을 시작할 때는 아침이었는데 벌써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긴장되어 있던 목을 매만지며 풀었는데 집무실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장님.”

    “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직원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식사도 거르고 시스템에서 고글 소스 코드를 탐색한 지 12시간이 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부족했다. 박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스트레칭을 한 후 다시 눈앞의 목록들을 하나하나 누르며 문서들을 반출했다.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박주혁은 그 후로도 일주일 넘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달렸다.

    이렇게까지 몰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작은 마이폰 보다 앞서 스마트폰을 시장에 출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이 확장되면서 이 OS가 시장에 미칠 영향력이 어마어마 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DD 자동차의 모델 D에도 OS를 탑재하여 이후 개발된 앱들을 활용하여 편의성을 올릴 수 있다면···.

    그가 멈출 수 없는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정도 맥을 잡을 수 있을 만큼 소스코드가 모였다. 그는 정리해돈 소스코드들을 쓱 훓어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심 과장!”

    “예. 사장님.”

    “잠시 들어오세요.”

    심영찬 과장은 지체없이 들어왔다. 검색엔진 개발건에 대한 두툼한 보고서와 함께 말이다.

    “앉아요.”

    “개발엔진 개발과 관련하여 보고드리겠습니다.”

    “아, 그 전에 먼저 이것 부터 좀...”

    박주혁은 스크린에 자신이 파인랭스 시스템에서 일주일을 밤새며 추출한 자료를 띄웠다.

    “음?”

    심영찬이 소스코드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국에서 개발중인 모바일 운영체제의 일부라고 합니다.”

    가만히 소스코드들을 뜯어 살피던 심영찬 과장이 중얼거렸다.

    “고···글?”

    심영찬의 중얼거림에 박주혁이 답했다.

    “9월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인 검색엔진이죠. 그들도 휴대폰이 곧 컴퓨터를 대체한다는 생각인 것 같더군요. OS도 미리 개발중이라고 합니다. 우연히 손에 쥔 소스 코드는 이게 다인데···.”

    심영찬 과장이 안경을 치켜올렸다. 안경너머 그의 눈이 번뜩인 것을 박주혁은 똑똑히 보았다.

    “검색엔진에 이은 OS라니···. 사장님 이 자료 제게 보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당연하죠.”

    “제가 한번 공부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검색엔진은 랭귀지패스트를 기반으로 하여 업그레이드를 했습니다. 지금도 잘 가져오고 있긴 합니다만···.”

    심영찬 과장이 보고하다 말고 스크린에 띄워진 고글의 소스 코드를 힐끔 쳐다봤다.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오.”

    “필요하면 얼마든지요. 그리고 개발자 인력도 추가로 채용해야겠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군요.”

    “감사합니다.”

    심영찬 과장이 물러나고, 박주혁은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서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박 대표님.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이요? 갑자기 무슨···.”

    “유능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들 좀 소개해주십시오.”

    무작정 직진하는 박주혁의 말에 서주경 교수가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투정 섞인 말투로 그녀가 말했다.

    “내가 무슨 인력소개소인 줄 아세요?”

    “한민철 교수님을 소개해준 서 교수님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OS를 개발하려고 하거든요.”

    “허···. OS요?”

    “예, 모바일 OS를 개발할 생각입니다.”

    “···!”

    모바일이라는 말에 서주경 교수가 순간 말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뒤 서주경 교수가 누군가가 떠오른 듯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아!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제가 곧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홍어 있는 한식으로요.”

    “그럼요.”

    박주혁의 말에 서주경 교수가 피식 웃더니 전화를 끊었다. 박주혁은 잠시 수화기를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원하는 대로 하려면 역시 직접 움직여야지.’

    박주혁은 시선을 수화기 옆에 놓여있던 메모지로 옮겼다. SJ 텔레콤이라고 적혀 있는 메모지는 그가 얼마나 힘주어 별표를 해놨는지 찢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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