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88화 (88/136)
  • 088화 It's Different.

    98년 1월 1일.

    박주혁은 파인랭스 직원들과 함께 새해 해돋이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산에 올랐다. 정상에 다다르니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산등선 너머로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해는 여느 때처럼 따사로웠다.

    “각자 소원을 빌어봅시다.”

    박주혁에 말에 다들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최지훈이 큰소리로 외쳤다.

    “승진시켜주세요!”

    진심이 묻어있는 그의 외침에 직원들이 쿡쿡 웃어댔다. 최지훈 대리가 박주혁을 획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 덕에 박주혁도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최 대리에게 권선호의 색깔이 다 빠지긴 했지.’

    조금 떨어진 곳에 다정하게 붙어 있는 커플이 보였다. 조광연 차장과 구경숙 과장이었다. 회사 내에서는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더니, 막상 부부 금술은 좋은 것 같았다.

    경제주권이 IMF에 넘어간 암울한 시기였지만, 파인랭스 직원들의 표정은 밝았다.

    정권이 바뀌면서 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한국 경제는 시험대에 오를 것이며 큰 진통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직원들과 함께라면···.’

    박주혁은 곁에 서 있는 직원들을 한번 쓱 돌아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할 수 있다.’

    #

    98년 1월 10일.

    당선자 신분이었던 DJ는 4대 그룹 총수와 조찬을 하며 ‘기업 구조조정 5원칙’에 합의할 것을 요구했다.

    500%를 넘어서는 부채비율과 문어발식 확장, 심지어 외화차입까지···. 외환위기가 재벌들의 귀책 사유라고 보긴 어려웠지만, 대수술은 불가피했다. 재벌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너무도 차가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조조정 5원칙이 전격 합의됐다.

    2월 9일.

    여의도의 전경련 회의실.

    30대 그룹 기획조정실 실장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한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장인 최재헌에게 말이다.

    최재헌은 한국 경제의 주축인 30대 그룹의 기획실장들을 앞에 두고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번 주말까지 구조조정 계획서를 제출해 주십시오. 그리고 곧바로 구조조정에 착수해야 합니다.”

    30대 그룹을 향한 최재헌 단장의 말투는 무거웠으며 차가웠다.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말속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외환위기 전까지는 은행장이 대기업의 자금 담당 임원을 만나는 것도 어려웠다. 그만큼 대기업의 힘이 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구조조정 5원칙에 의해 대기업과 은행의 위치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은행에 빨대를 꽂아 돈을 뽑아 쓰던 대기업들은 이제 은행에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부가 기업의 생사를 결정하는 칼을 은행에 줬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은 필패라고 생각하는 최재헌 단장이 있었다. 정부가 개입되면 어느 순간 정부와 기업이 서로 타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되지 않겠나?’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최재헌 단장은 대기업이 구조조정 계획을 세우면 주거래 은행이 그 계획을 점검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최재헌 단장은 정부 주도가 아닌 시장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의 틀을 만든 것이다.

    올바른 방향이었지만, 부채비율을 줄이기 위한 구조조정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불만을 표출한 곳은 역시나 높은 부채비율을 자랑하는 운송업체들이었다.

    “원화 가치 폭락으로 비행기를 사려면 대출을 받아야 합니다!”

    “해운 쪽도 배를 빌려서 운영하기 때문에 대출이 많습니다. 일반 제조업과 같은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건설 쪽에서도 볼멘소리를 냈다.

    “건설업은 자금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구조인데 부채비율을 딱 맞춰 잘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몇몇 그룹을 시작으로 불만의 소리가 튀어나오자 회의실은 단번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이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최재헌 단장이 목소리를 키우며 주도권을 가져왔다.

    “지금이 매우 중요한 시기란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최재헌 단장의 말에 기획조정실장들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재무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외환위기의 수렁에서 우리는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원론적인 말에 불만의 소리가 또 터져 나왔다.

    “아니! 누가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까? 구조조정을 할 수 있도록 여유를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일주일 만에 구조조정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게 말입니까?”

    “부채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 업종은 무시하는 겁니까!”

    둑이 터지니 물살이 거셌다.

    그들의 불만을 참고 들어주던 최재헌 단장의 이마에 힘줄이 불쑥 솟았고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대기업 기획조정실장이란 사람들이 현재 상황을 모르지는 않을 터. 어떻게든 부채비율을 유지하고 싶은 그들의 욕심 섞인 말에 염증을 느낀 최재헌 단장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면. 대기업들은 평생 높은 부채비율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최재헌 단장의 일갈에 불만 표출을 주도하던 몇몇이 땀을 닦았다.

    “예외 없습니다.”

    최재헌 단장이 정색했고, 회의실은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좌중을 둘러본 최재헌 단장이 말을 이었다.

    “기한 넘기지 마십시오. CEO의 도장까지 찍어서 가져옵니다. 연쇄 부도를 막기 위해 올 3월부터는 그룹 내 상호지급보증도 금지입니다. 대출이 필요하시면, 기업의 신용으로 받으시면 됩니다.”

    가뜩이나 냉랭해진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최재헌 단장은 마지막으로 목소리에 힘주어 말하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재벌 개혁은 절대로 흐지부지하지 않겠다는 각하의 말씀,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최재헌 단장이 나가자, 회의의 마무리는 땅이 꺼질듯한 한숨 소리의 합창이었다.

    #

    전경련 회의에 참석했던, 차동진 전무는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사장실로 향했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회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얼추 알 수 있었다. 박주혁은 굳어있는 차동진 전무에게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차 전무님. 회의는 어떠셨나요?”

    “좋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말까지 구조조정 계획서를 제출하라더군요.”

    박주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차동진 전무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보고했다. 보고를 마친 차동진 전무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피바람이 불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우리는 건재할 겁니다. 이미 DD의 무대는 전세계입니다. 내수시장에 의존하는 기업들과는 달리 봐야 합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박주혁이 DD 자동차에 취임한 이후로 전기 골프 카트와 칼스타 그리고 스테디셀러인 물쏘와 코린도로 재무구조가 안정화되었다. 외환위기에 앞서 부채를 줄여나간 것이 주요했다. 물론, 전부 박주혁의 지시하에 이뤄진 것이긴 하지만···.

    “DD의 부채비율은 100% 수준으로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새로 바뀔 정부에서 드라이브를 걸겠지만, 우리와는 관계없는 얘기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박주혁의 말에 차동진 전무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박주혁의 마지막 말에 결국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곧 모델 D를 세상에 발표합니다. 분위기에 휘둘리지 마시고, 우린 우리대로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차동진 전무가 상체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고 나간 후 박주혁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여태껏 태연하던 박주혁이 그제야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죠···.”

    박주혁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건드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여의도 컴택 본사.

    유병엽이 박주혁을 밝은 얼굴로 맞이했다.

    “박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유병엽 사장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밝았다. 박주혁이 유병엽 사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오늘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예. 아주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래요?”

    박주혁이 눈썹을 올리며 호기심을 표하자, 유병엽 사장이 씩 웃으며 말했다.

    “미국의 모터놀라에서 우리에게 제안이 하나 왔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구나···.’

    박주혁은 모터놀라의 행보를 알고 있었지만, 무척이나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떤 제안이었습니까?”

    “CDMA 휴대폰 단말기를 OEM방식으로 생산하여 중국 및 아시아 시장에 수출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오. 정말 잘됐군요.”

    박주혁이 박수 치며 감탄하자, 유병엽 사장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지분율이 20%에 육박하는 2대 주주에게 칭찬받는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잠시 축하를 만끽하던 유병엽 사장이 박주혁에게 상체를 가까이 가져가더니 속삭였다.

    “솔직히 말하면, 모터놀라의 휴대폰 제조 기술까지 우리 손에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유병엽 사장이 살짝 흥분한 듯 얼굴이 상기되었다. 반면, 그의 기분을 맞춰주고 있던 박주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단 미래큐리텔을 인수할 절호의 기회죠.’

    DJ 정부의 빅딜 정책으로 미래전자는 극성반도체를 흡수합병하는 대신 자회사 35개 사를 시장에 내놓게 된다. 미래큐리텔도 그중 하나였고 컴택은 미래큐리텔을 인수해야 한다. 아직 시일이 좀 남긴 한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오늘은 그런 사안으로 컴택을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잠시 유병엽의 기분을 맞춰주던 박주혁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사실 저도 유 사장님께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박 대표님도요?”

    유병엽 사장이 눈을 크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구상중인 상품이 있는데···. 이게 휴대폰과 합쳐진다면 엄청난 시너지를 낼 것 같습니다.”

    “휴대폰과 합쳐진다? 뭐가 말입니까?”

    “Mp3 플레이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음···? Mp3면 음악파일 확장자 아닙니까?”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플래시 메모리를 탑재하여 만들면 카세트 플레이어나, CDP 심지어 MDP보다 작은 기계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휴대폰이 Mp3 플레이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

    유병엽 사장이 박주혁의 말을 들으며 눈을 끔벅였다. 최첨단 휴대폰을 제조사가 Mp3 플레이어를 모른다니···? 조금 답답했지만, 아쉬운 것은 박주혁이었다. 유병엽 사장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음악 재생기를 휴대폰에 이식하자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흠···.”

    유병엽 사장이 턱을 쓸며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아이디어가 좋긴 하지만, Mp3 플레이어라는 시장도 없는 마당에 휴대폰에 그걸 이식한다고 팔리겠습니까?”

    생각보다 부정적인 유병엽 사장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벤처 성공 신화를 쓴 유병엽 사장의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보수적인 의견이었다. 실망감에 박주혁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는데 이어진 유병엽 사장은 말은 실망감이라는 불씨에 기름을 부어버렸다.

    “OEM으로 생산기술을 쌓고, 저가 제품으로 컴택의 인지도를 쌓아야 합니다. 아직 그런 실험적인 투자는 경계하고 싶군요.”

    OEM으로 기술을 체득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가 제품으로 컴택의 인지도를 올리겠다니···! 그리고 실험적인 투자는 벤처기업에서 당연한 것 아니던가? 유병엽 사장의 벤처 정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박주혁의 미간이 좁혀지다가 곧 펴졌다.

    ‘아니, 내가 착각했을지도···. 컴택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원래 저가 보급형이었지.’

    구상했던 것이 한 번에 무너졌지만, 차라리 잘됐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의향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유병엽 사장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고개를 가로저은 박주혁이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주혁은 사색에 잠겨 여의도를 배회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하려면 직접 회사를 차려야 하나···?”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걷고 있던 그때, 우연히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함께 홍보에 열을 올리는 한 휴대폰 매장 앞을 지나게 됐다.

    “SJ 텔레콤 전용 모델 SKY가 출시되었습니다! 오직 SJ 전용으로 한국지형에 강한 야니콜 보다 더 잘 터져!”

    “···.”

    화려한 언변에 박주혁의 시선이 슬그머니 옮겨갔고, 투박한 디자인의 휴대폰들 사이에서 SKY의 은빛 메탈바디가 햇빛을 반사했다. 어두운 컬러가 대부분인 휴대폰 시장에서 유독 존재감을 뽐내는 녀석이었다. 박주혁은 SKY를 가만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흠. 컴택이 SJ텔레텍을 인수하고 무너졌었지. 가만, 차라리 내가 SJ텔레텍을···.’

    ‘나는 달라!’라고 외치는 SKY가 어쩌면 박주혁의 구상에 맞는 마지막 퍼즐 조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0